이재무 시 깊이 들여다보기
마음의 심층, 그 역설의 소용돌이
―이재무 시의 최근 풍경
김경복
오늘날 우리들 삶의 한 단면을 다음의 시 한 구절처럼 적절하게 표현해 주는 말이 또 있을까?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에 포획되어 생명의 활기와 영성을 상실한 채 쳇바퀴의 회로 속에 갇혀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다음의 시 구절 이상 어떻게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까?
지루한 평화가 날마다 폐지처럼 쌓여간다
―「꽃들의 등급」 부분
이 시 구절은 이재무 시인의 최근 시집 『경쾌한 유랑』(문학지성사, 2011)에 나오는 것이다. 시집을 읽어가다 이 구절에 이르는 순간 어쩌면 현재 나의 삶이 저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면서 무릎을 친다. 아아 들끓는 마음의 내면을 수면 아래 가두어 두고 밖으로 평정한 풍경을 연출해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습을 저렇게 나타냈구나. 아니다, 조금 더 일상성에 강제된 현대인의 삶을 보태 말하자면 주어진 물질적 풍요로움에 삶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삶의 진정성을 결여한 채 인형같이, 조화(造花)같이 살아가는 모습을 시인은 저와 같이 드러냈구나. ‘지루한 평화’라는 역설적 표현이 물질적 풍요로움과 소모성의 이미지인 ‘폐지’와 먼저 호응하고, 그 다음에 무의미함의 반복을 암시하는 ‘폐지처럼 쌓여간다’와 결합되어 읽는 독자에게 현대적 삶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울림을 갖게 한다. 어떻게 오늘날 우리들의 기계적 삶이 갖는 그 본질을 저와 같이 간결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시인은 이러한 일상적 형벌을 시 속에선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있긴 하다. 시인의 말을 끌어와 살펴본다면, 봄과 여름을 맞아 꽃과 벌이 서로 정분을 나누는 모습에 시적 화자는 “마음 발갛게 발기시킬뿐더러/몰두하는 현재의 일 무용하다는 것/일순간 환하게 드러낸 뒤/맹목의 벼랑으로 몸 부추겨 몰아가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이미 지천명을 넘긴 사내”로서 꽃과 벌이 만드는 자연의 정분을, 우주의 가장 자연스러운 범사를 이젠 자제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도 느낀다. 지나가 버린 것, 나에게도 있었지만 이제 ‘시간’이란 그늘에 묶여 ‘마음의 발기’를 내 마음대로, 내 현실에서 쉬이 할 수 없다는 것. 그렇다, 이 시는 사실 이제 나에게 무엇인가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어떤 ‘때’가 도래했다는 놀라움, 아니 두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의 심층은 “맹목의 벼랑”으로 훌쩍 뛰어내리고 싶지만, 그러기에 몸과 현실은 “이미 지천명을 넘기 사내”라는 점을 자꾸 되새겨 “마음의 발기”마저 죄스럽게 느끼게 한다. 부정해버리고 싶지만, 본질이 되어버린 좀생이의 현실, 그 거북한 심리와 슬픔을 이 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차원에서 현대적 일상성에 포박된 자의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것에 해당한다. 자꾸 작아져 가는 것만 같은 당혹, 달리 말해 삶의 진정성이 조금씩 휘발하는 두려운 현실에 당도했음을 이재무 시인은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 점에서 이 시는 이를 목도하는 독자 당신도 이와 같은 사태에 직면하게 되면, 아니 그러한 때가 되면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 터인가 하고 묻고 있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시적 진실에 대해 다시 말하자. 이 시는 일상성의 도로(徒勞)에 대해 우선 발언하고 있지만 그 이면은 시간의 그늘이 만드는 내면의 슬픔에 대해 말하고 있다. 무의미한 일상적 삶을 이어가고 있다가 어느덧 정신 차려 살펴보았을 때, 청춘이 이미 지나가버리고 말았다는 사실 확인에서 오는 황당함 내지 다급함이 이 시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내가 일상적 삶의 무의미함에 무릎 치며 공감한 것도 실은 이와 같은 삶의 덧없음 또는 무력함에 동조되어 같은 심정을 어느 정도 느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시간의 흐름과 그 그늘의 감각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삶과 존재에 대한 본질적 성찰이 시작된다는 것. 그것은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의 절대과제로서 피할 수 없는 것임에도 우리는 종종 잊고 있다. 아니 외면하고 있다. 그것은 존재의 존재성을 맨살로, 정신의 섬모(纖毛)로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볼 수 있는 치명적인 것. 그 점에서 이재무 시인의 사색은 이러한 경지에 비로소 진입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불교적 관점에서 말하는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가장 적절한 시점, 그 시점에 도달해 그는 존재의 숙명과 필연에 대해 숙고하고 있다. 일상과 시간이란 화두를 갖고 존재의 본질에 대해 존재론적 성찰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은 다음과 같은 그의 다른 시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생의 궁극은 완전한 소진에 있는 것
화구 앞에서 생의 완주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씨름 기술이 부족한 사람
번번이 샅바 놓쳐 허둥지둥 나가떨어지기 일쑤였지만
아직 시간의 끈 놓아서는 안 된다
타다 만 흔적처럼 추한 것 어디 있으랴
―「불의 지청구」(『경쾌한 유랑』) 부분
그는 같은 시집에서 시간에 대한 특성을 ‘불’이라는 물질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완전 연소’. 생이, 존재가 “타다 만 흔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추한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완전한 소진”, 다시 말해 완전한 증발. 시간으로 전환해 말해본다면 절대의 시간, 최종의 시간, 완전의 시간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가다가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시적 화자에 이러한 완전성을 가르쳐 주고 있는 물질이 바로 ‘불’이다. 불은 충분한 시간과 여건만 주어지면 완전 연소에 이를 수 있다. 더 없이 깨끗한 흔적을 남긴다. 아니 더 없이 깨끗하게 사라진다. 그것은 끝으로서 새로운 시작을 여는 것, 아니 끝과 시작이 잇대어져 있는 것, 그래서 시작과 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 불의 사색을 밀고 나가면 궁극적 진리라 할 수 있는 ‘역설적 일치’에 이르는 것. 이로써 시적 화자는 시간 속의 자아를 생각한다. 시간 속의 자아의 완성과 궁극을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은 이를 위해 시적 화자는 무엇보다 현재의 삶에 대한 매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 “아직 시간의 끈 놓아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나, 그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씨름 기술”을 궁구하고 있는 것 등은 시적 화자가 현재적 삶을 대하는 치열한 삶의 태도일 것이다. 그 점에서 시적 화자의 삶이란 정신의 열도(熱度)를 끝없이 높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열의 궁극에 이르면 시적 화자도 불이 될 것이다.
얼마나 뜨거운가! 그렇다면 앞의 “지루한 평화가 날마다 폐지처럼 쌓여간다”는 표현은 대체 무엇인가. 이 얼마나 이질적이고 생뚱맞은 표현인가. 이 거리감, 이 상호모순감. 이재무 시인의 최근 시는 이 양면적 이질성이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뜨거움과 시니컬함, 촉촉함과 메마름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표출되어 그의 심사가 갖는 복잡성을 대신하고 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복잡한 것이 생의 진실이다. 복잡성 위에 추를 드리우고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자야 말로 진정한 달인, 장자가 말하는 ‘진인(眞人)’, 아니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시인일 것이다. 랭보가 말했다는 진정한 시인으로서 견자(見者)가 사물의 현상을 넘어 진리의 실체를 보는 자라면 바로 이 복잡성 위에 모순의 추를 드리우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자 역시 견자라 할 수 있다. 진리를 보는 자로서 시인은 이재무 시인의 진면목이다. 그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시편이 바로 다음과 같은 작품이 아닐까.
수평은 고요가 아니다
수평은 정지가 아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라
선 안팎 넘나들며 밀려갔다
밀려오는 격렬한 몸짓,
소리 없이 포효하는 함성을
저, 잔잔한 수평 안에는
우리가 어림할 수 없는
천연의 본성이 칼날을 숨긴 채
숨, 고르고 있는 것이다
저 들끓는 정지와 고요가
바깥으로 돌출하는 날
수평은 날카롭게 찢어지리라
제 속 들키지 않으려
칼날의 숨 재우고 있는
저 온화한 인품의
오랜 침묵이 나는 두렵다
―「수평선」(『경쾌한 유랑』) 전문
이 시에 이르러 나는 한참 숨을 고르고 보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고요가 긴장이라는 사실을, 다시 말해 고요가 그 내면에 그렇게 많은 “격렬한 몸짓”과 “포효하는 함성”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에 전율을 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앞의 “지루한 평화가 날마다 폐지처럼 쌓여간다”는 표현에서 내가 “아아 들끓는 마음의 내면을 수면 아래 가두어 두고 밖으로 평정한 풍경을 연출해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습을 저렇게 나타냈구나.”하는 감상은 나의 감상이자 이재무 시인의 감상, 즉 시인의 마음에 동화돼 가지게 된 감정임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좋은 시는 그 시적 전언과 구조를 통해 독자의 감상마저도 자기의 세계로 불러내 조직해 낸다. 가공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에 말을 건네며, 하나의 새로운 진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 시에서 고요의 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수평선’이다. 시인은 수평선을 보고 일상의 고요의 의미와 그 안에 잠들어 있는 들끓음을 연상해 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보다 시인이 살아가는 일상의 고요와 그 안에 잠들어 있는 마음의 들끓음을 수평선이라는 이미지로 제시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이 사물을 발견하게 하니 말이다. 그 점은 역시 수평선을 다루는 그의 다른 시에서 “사랑의 수평도/마음속 벼랑이 이룬 것이다//수직의 고독이 없다면/수평의 고요도 없을 것이다”(「수직과 수평」)를 보면 알 수 있다. ‘마음속 벼랑’이 ‘사랑의 수평’을 만든다는 말에서 볼 수 있듯 결국 마음의 긴장이 어느 정도 정신의 단련을 거쳐 고요로 표출된다는 진실을 이 시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전이와 전환이 아니라 그러한 전이와 전환에 이르기까지 갖게 되는 시적 화자의 고통, 즉 그 강도와 감당의 시간, 다시 말해 시적 표현에서 볼 수 있는 “수직의 고독”이 갖는 긴장의 강도와 시간의 너울을 우리는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의 벼랑’으로 표시된 긴장, 또는 고통의 깊이와 넓이를 우리가 쉬이 맛보거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진실에 대해 끝없이 탐구하고 그 치명적 진실이 갖는 무게를 당당히 감당하고 발언할 수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재무 시인의 삶을 통해 이러한 점을 살펴본다면 이 시에서 말하는 시간의 깊이와 고통의 강도가 충분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표현이 그 삶의 인식론적 깊이를 대신한다는 말에 동조한다면 이와 같은 표현이 나오기까지 그가 겪었을 삶의 고뇌와 그것의 삭임 내지 단련의 강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 점에서 무심한 듯 말하는 어조에서, 혹은 밖으로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서 마음의 그 수많은 격정과 고뇌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고, 이를 갈고 닦아 그것의 평정으로서 고요를 말할 수 있게 된 이재무 시인의 체험의 깊이와 독특성에 대해 우리는 기꺼워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특징을 표상하는 또 하나의 정신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수평의 고요’는 그렇게 익어 이번 특집시에서 시인에게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터져 나온다.
일 년 중 고요의 힘이 세지는 때는
망종(亡種)에서 몸을 빼 소서(小暑) 쪽으로 느리게 걷는 절기의
빨랫줄 바지랑대 그림자의 키가 가장 작아지는 때
한동안 각축하듯 울어대던 매미 울음 뚝 그친 막간
어슬렁대던 개들도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가 오수 즐기고
숫돌 다녀온 왜낫처럼 날 선 햇살 따갑게 내려
축축한 생각의 물기 휘발시켜
백치의 순간에 이르게 하던,
살구씨처럼 단단한,
이제는 어데 먼 데로 귀양 떠나 죽었는지 소식조차 없는
―「단단한 고요」 전문
고요가 단단해지기까지 그 고요를 이루는 바탕의 고통은 얼마나 단련되어야 했겠는가. 삶은 일면이 아니라 양면임을, 양면적 현상의 통합과 갈등, 또는 긴장이 진실임을 보여주는 기법이 역설이라 할 때 위 「단단한 고요」라는 제목과 시 속의 내용은 이와 같은 삶의 진실을 은연중 말해준다. “숫돌 다녀온 왜낫처럼 날 선 햇살 따갑게 내려//축축한 생각의 물기 휘발시켜//백치의 순간”에 “살구 씨처럼 (가장) 단단한” 고요가 된다는 전언의 이 시는 뜨거움이 가장 차가운 긴장의 순간과 일치한다는 역설적 인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앞의 시들에서 보았던 수평의 고요가 내면의 무한히 들끓는 격정과 고뇌의 단련 위에 마련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과 동궤의 내용이다. 이것은 시간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절대적 경지에 이른 역설적 정지의 순간의 표현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앞에서 언급했던 ‘역설적 일치’의 순간에 해당하는 절대 시간이 바로 ‘단단한 고요’로 탄생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단단한 고요에 드는 것은 일상적 시간으로부터 일탈이자 본질적이자 본래적인 것으로의 귀환의 의미를 갖게 된다. 나의 편협성과 일시성을 벗어나 동시성과 순환성의 시간 속에 들어감으로써 앞에서 시간의 샅바를 붙잡고 싸움의 기술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욕망, 즉 완전 연소로서 영원의 시간 속에 들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고자 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이 바로 산업자본주의적 일상으로 대변되는 물질적 속박으로부터 초월에 있을 것임은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일상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울타리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마저 가축으로 만들고 마는 마약과 같은 존재가 되기 십상이다. 안전은 보장되어 있으나 자유 의지를 꺾고 마는 당대의 현실에서 진정한 자유의지를 발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성의 추구이자 참된 용기일지 모른다. 장자가 진인은 속세에 있더라도 속세의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라 했을 때 이는 하나의 시선이나 계율로 인간이란 존재를 판단하면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과 상통하는 말이다. 그 점에서 절대의 시간에 들고자 하는 존재는 ‘불’의 질료처럼 완전 연소가 갖는 자유, 불의 질료를 대신 외화해 보여주는 바람이나 공기처럼 천상적 질서로의 초월이나 자유로운 비상을 꿈꾸게 된다. 다음 두 편의 특집시들은 이러한 이재무 시인의 마음의 정처를, 즉 마음의 긴장과 고요가 갖는 갈등과 길항 끝에 다다른 지점을 잘 보여준다.
사람아, 사람아,
꽃과 나비 나무와 새 비와 바람과 눈
그리고 하늘과 구름과 음악과 시(詩)를
평생의 측근으로 두어 살면 어떻겠는가
―「측근, 이라는 말」 부분
경전 따위 율법 따위 침이나 뱉어주고
가볍고 시원하게 간들간들 근들근들
영혼 곳간에 쟁인 시간의 낱알
한 톨 두 톨 빼먹으며 살면 어떤가
해종일 가지나 희롱하는 바람같이
―「건들건들」 부분
자연 속에서 자연의 한 종으로서 그들과 분별없이 산다면 이는 산업자본주의가 규정하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고 이 시 속의 화자가 현재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적 화자들은 그와 같이, 즉 “꽃과 나비 나무와 새 비와 바람과 눈/그리고 하늘과 구름과 음악과 시(詩)를/평생의 측근으로 두어 살면 어떻겠는가” 하고 묻거나, “해종일 가지나 희롱하는 바람같이” “가볍고 시원하게 간들간들 근들근들” 거리면서 “영혼 곳간에 쟁인 시간의 낱알/한 톨 두 톨 빼먹으며 살면 어떤가” 하고 묻고 있다. 그렇지만 이 말들은 물음이기보다 대답에 가깝다. 누가 삶에 대해 물으면 이와 같은 삶이 진정한 삶이 아닐까라고 말하고 싶다는 전언이다. 그 전언의 요지는 세속적 경전이나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즉 가벼움과 무소유의 정신이다. 불과 바람처럼 완전 연소와 절대 비상을 꿈꾸며 주어진 생의 현실을, 즉 “영혼 곳간에 쟁인 시간의 낱알”을 “한 톨 두 톨 빼먹으며” 소요하는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逍遙遊)’의 경지. “가볍고 시원하게 간들간들 근들근들” 또는 시 제목처럼 「건들건들」 조금은 껄렁하게 보일지라도 일상적 삶에 구속됨이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이야말로 제 삶을 주체로 온전하게 살아내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우리가 꿈꾸는 삶임에 틀림없다. 일상적 현실의 눈으로 볼 때는 조금 무책임해보이거나 시대와 맞지 않는 행동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시인이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양면적인 것. 어느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까운지 모른다. 그 어느 것이 생의 진실에 가닿더라도 이재무 시인의 시에서 보이는 단 하나의 사실은 생의 어떠한 깨달음도 그 안에는 이중적, 또는 상호모순적, 또는 양면적 힘의 장들이 팽팽하게 긴장과 균형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긴장과 균형이 깨어질 때 삶의 진실 또한 사라지게 된다는 게 이번 시들의 전언이 아닐까? 그 점에서 존재는 외부로 고요를 표상하고 있지만 그 내부로 무한의 들끓는 소용돌이를 지닌 역설적이고 상호모순적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진리를 이번 이재무의 시편들은 깨우쳐주고 있다.
─『시에』 (2011. 가을)
▶김경복
부산 출생. 199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문학과비평』으로 등단. 평론집 『풍경의 시학』, 『서정의 귀환』, 『생태시와 넋의 언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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