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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젊은 시인 들여다보기 - 일상에서 거룩한 것들 / 조병세

문근영 2014. 1. 27. 10:31

 

젊은 시인 들여다보기

 

일상에서 거룩한 것들 

        
                                       조병세

 


1
  오른쪽과 왼쪽을 나누기 전의 일이다. 거룩한 게 있었다. 거룩하지는 않더라도, 물론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대척의 첨예한 입장은 지금을 살아가는 인간 삶에 있어 나름대로 중요한 문제이다. 사회적으로 공통된 문제들을 잘 관리하는 것. 이를 정치라 하자. 이때의 정치란 폴리스(polis)라기보다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 가깝다. 폴리스가 이데아라면 오이코노미아는 현실이며, 경제이다. 그러한 차원의 정치이다. 그런 것, 어떤 현실적인 것 안에 놓인 문제들. 그런 것들에 의해 왼쪽과 오른쪽이 나뉜다. 왼쪽과 오른쪽을 나누는 일은 사회적 하부구조의 문제이다.
   한편, 시 쓰기란 그런 것에 대한 저항이거나, 그런 것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일이다. 혹은 뛰어넘고, 건너가 버리는 일이다. 다른 것을 꿈꾸는 일이다. 오른쪽 안에서 또 왼쪽과 오른쪽이 나뉜다. 왼쪽 안에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은 서로의 자리를 맞바꾸기도 한다. 그러니까 오른쪽과 왼쪽은 진리라거나 보편적인 무엇이 아니다. 정치적인 것이고, 하부구조적인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와는 사뭇 다른 시 쓰기란 오른쪽에 대하여 왼쪽을 대응시키는 그런 일일 수 없다. 그것은 경제적 관리이고, 정치적 선언이다. 시 쓰기는 오른쪽과 왼쪽을 그 기원에서 무(無)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시 쓰기는 왼쪽과 오른쪽을 재사색하는 일이다. 무엇이 왼쪽과 오른쪽을 나누었는가. 시 쓰기의 고민은 그런 데 있다.

 

     개미가 모서리를 오르내린다
     왼쪽과 오른쪽에 관하여 내가 알 길 없는 소통으로 나아간다
     바람을 거슬러야 멀리 날 수 있는 새떼는 교행하는 법이 없다
     한때 제 몸속에 갇힌 십자매의 불알에 대하여 궁리해 본 적이 있다
     새도 개미도 제 몸속에 초록 신호등을 품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많은 별들을 머리에 이거나 사막을 보듬어 제 몸을 통행한다
                               ―강태규, 「왼쪽과 오른쪽에 대하여」 부분

 

   고대의 어느 철학자는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의 시인은 말뿐인 시(rhetoric)들을 쓰는 사람들이다. 또는 거룩한 게 아니라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데 시를 사용하는 자들이다. 그것들은 미적이라고 할 수 없다. 때문에 철학자는 정치에 대해 말하면서 그러한 것들을 쓰는 자,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던가 보다. 시가 미라면, 기술과 철학은 시가 아닐 것이다. 정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시가 아니다.
   시가 정치였다면, 시는 왼쪽과 오른쪽 중 어느 하나를 칭송해야 했을 것이다. 쉽사리. 하지만 시는 그럴 수 없다. 시는 오른쪽으로부터의 고통을 노래할 수는 있을 것이다. 왼쪽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적일 수는 있다. 하지만 시는 곧장 정치일 수는 없다. 그것은 아름답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치가 쉼 없이 작동하는 진창이거나 권태인 현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자연을 닮는다. “내가 알 길 없는 소통”으로 나아가 각진 모서리를 비정치로 만드는 개미, 교행하지 않는 새떼, “제 몸속에” 불알을 품은 십자매의 그러함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새도 개미도 제 몸속에 초록 신호등” 같은 소통을 품고 있다. 통한다. 아름다움은 초언어적 소통이다. “새도 개미도” 서로의 언어를 모르는데 소통한다. 그로부터 어떻게 덜어내거나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미는 상대를 매혹시키고, 그리하여 상대를 선하게 작동시킨다. 그것은 좋은 소통이다. 소통은 오른쪽과 왼쪽 너머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삶의 존재 조건이다. 그것 없이 오른쪽과 왼쪽이 무슨 소용인가. 소통 없이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은 없다. 존재이되 소통하지 않는 것은 죽은 사물일 뿐이다.
   소통은 오른쪽과 왼쪽에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인 것이다. 소통은 무언가를 위해 현실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그 무언가를 거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왼쪽과 오른쪽을 아름답게 근거짓는 데는 일말의 거룩함이 필요하다. 왼쪽과 오른쪽이 조금이라도 거룩해지기 위해 정치가 요청되야 하는 것이다. 한편, 그 역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들이 시인일 것이다. 그들에게 정치를 위한 거룩하지 않은 시는 불필요한 것이다.

 

     해진 가랑이 사이로
     얼음송곳이 드는 한겨울 해거름
     나는, 근육이완제 주사를 집행하였다
     야생의 뒷발질을 빼앗고
     초원의 뜀박질도 빼앗고
     새끼를 덥히던 피돌기와 호흡을 빼앗고
     맛 나는 되새김질까지 빼앗았다

 

     살생부를 덮는다

 

     나는,
     값을 후하게 받고
     편안한 잠에 든다
              ―강태규, 「청부업(請負業)」 부분

 

   물론 오른쪽과 왼쪽의 문제가 부질없다는 게 아니다. 그렇게 나누어지지 않는 것들을 겸허히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 보다 근원적인 일이라는 말이다. 청부업(請負業) 살생이어도 “값을 후하게” 받으면 그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도축에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 삶의 회피할 수 없는 현실성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먹고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실은 충만해지고 “편안한 잠에 든다”. 그런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것은 ‘업보’란다. 조금도 거룩하지 않은 일이란다. 그래서 소의 생명을 빼앗고는 대신 창세기를 읽는다. 거룩해지기 위해 말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가득 채우라는
     창세기(創世記)를 거룩하게
     거룩하게, 읽을 것이다
                   ―강태규, 「청부업(請負業)」 부분

 

2
   명이 생명일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이 있다. 그 여러 가지 중의 하나가 소멸이다. 생명은 유한하기 때문에 고유하고, 귀하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소멸하는 존재이기에 생명은 사물과 운명적인 차이가 있다. 사물과 생명의 운명적 차이, 거기에 무엇으로도 훼손할 수 없는 거룩함이 자리잡는다.

 

     나 또한 바늘구멍만한 세상에
     전부를 건 적 있었다
     나를 잊고 산 세월에
     비대해진 몸은
     작은 구멍을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눈에서 지울 수 없었다
     가보지 못한 세계를 향해
     살덩이를 뜯어먹던 어린 짐승의 날들처럼
     그들의 꿈은 어디에 머물러 있었을까
                   ―이옥, 「사라짐은 또 하나의 시작이다」 부분

 

   그럼에도 삶은 “바늘구멍만한 세상”처럼 비루하다. 그 세상에 “전부를” 걸고 산 적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 세상’이란 인간의 세상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세상의 넓이란 바라보기 나름이다. 어차피 눈으로 밟을 수 있는 세상의 물리적 넓이는 한정적이다. 그런 세상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더 넓은 세상”이란 ‘꿈’이 있는 곳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린 짐승들이 자신들의 전부와 맞바꾼 무엇처럼, “더 넓은 세상”에 자리하거나 그 “더 넓은 세상” 자체일는지도 모를 ‘꿈’ 역시 자신의 전부를 걸지 않으면 이루기 힘든 무엇이다. 자신의 전부를 건다는 점에서 어린 짐승들과 ‘나’의 꿈은 평행하다. 그렇게 놓고 보니 ‘나’가 말하고 싶은 것은 ‘꿈’의 정체가 아니라, ‘꿈’의 형식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꿈은 현실의 것보다 더 넓은 것이다. 더 깊거나 높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 그러한 꿈이 있기에 삶은 “가보지 못한 세계를 향해” 조금씩 더 움직여 갈 수 있는 것이다. 가보지 못한 세계, 더 넓은 세계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서 비롯되어 조금씩 넓어지는 세계란, 결국 더 넓어진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망의 다름 아니다. 조금씩 넓어지는 세계는 어린 짐승들이 자신들 전부를 건 꿈과 연결되고, 그 꿈을 통해 ‘나’는 자신의 꿈을 평행하게 연역해낸다. 이 독특한 윤리적 형식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개미가 (인간의)모서리”(강태규, 「왼쪽과 오른쪽에 대하여」(괄호는 필자))를 무너뜨릴 때 이편의 인간이 자신의 왜소함을 깨닫는 것처럼 조금 거룩한 일일 것이다.

 

3
   아 있는 것에 있어 모든 거룩함은 보편적인 것이다. 현실성에 속박된 채로 살아가는 우리도 어느 순간, 어떤 지점에서 살아 있는 것의 거룩한 보편성을 깨닫는다. 예를 들어, “청도를 지나는 길” 위의 순간이 그러한 때는 아닐까.

 

     청도 지나는 길이다
     저 건너 사무름에는 고봉밥 눌러주던 왕대고모님 옛집이다
     초라하나 오랜 소읍 청도를 지난다
     도시에서 흘러온 불빛
     저녁이 밤으로 바뀌는 시간이다
     늦어진 길 더욱 늦어져도 걱정마라
     전등 아래 꽃까지 잘디잘게 바람 맞는 길이다
     아 청도 지난다
     어느 아픈 어버이도 작은 등을 켜고
     오지 않을 아침을 위해 돌아누울 길이다
     집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박승, 「청도 지나」 부분

 

   청도를 지나는 순간이 조금 거룩한 것은 거기가 내가 가야 할 도착지가 아니라는 데 더 큰 이유가 있다. 청도를 지나는 그 길은 “집으로 이어지는 길”임에도 ‘나’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거기를 무력하게 떠나간다. 지나쳐버린다. “청도 지나는 길이다”와 “아 청도 지난다”의 감정적 간극 사이에 “늦어진 길 더욱 늦어져도 걱정마라”는 자기 위안이 들어찬다. 하지만 그것은 왠지 공허하고, 답답하다. 무엇이 그 자기 위안을 공허한 것으로 만들었을까. “전등 아래 꽃까지 잘디잘게 바람 맞는” 서늘한 고요가 유인하는데도 ‘나’는 지척에 있는 ‘마음의 집’에 가지 못한다. 다른 데 가야만 하는 길인 모양이다. 그것도 모르고 “아픈 어버이”는 “오지 않을 아침을” 기다리느라 잠이 오지 않아 돌아눕는다. “도시에서 흘러온 불빛”이 밤이 되어 이윽고 소멸하고 마는, 마음의 “집으로 이어지는 길”을 ‘나’는 그냥 스친다. 정신 없이 살다가 돌아보니 집이란 게 ‘나’로부터 너무 멀어져버렸다.
   이렇게 사는 게 무슨 목적을 갖고 있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물음이 시 쓰기일 것이다. 닿지 않는 것을 시로 복원하는 것. 청도가 시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질 수 없는 것, 제 몸의 전부를 걸고 다른 세계로 우화(羽化)하려는 욕망이 시다.
   그 다른 세계와 이쪽 현실을 이어붙이는 일이 시 쓰기이다. 여기 청도를 지나는 길 위의 삶과 청도를 잇는 일이 시 쓰기이다. 그러므로, 추방당하지 않는 시인들의 모든 시 쓰기는 일상에서 거룩한 일일 것이다.
         

       

 ─『시에』 (2011. 가을)

 

 

▶조병세
서울 출생. 2011년 『시에』로 등단.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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