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균의 「마흔을 넘는다는 것은」평설 / 오태환
마흔을 넘는다는 것은
전동균
가장 추운 겨울날
식구들 몰래
풍경 하나 매다는 일
밀물이 들 듯
밀물에 배가 떠올라 앞으로 나아가듯
울리는 풍경 소리에
멀리 있는 산이 환하게 떠오르면
그 산속, 배고픈 짐승의
흩어진 발자국 같은 것도 찾아보는 일
마흔을 넘는다는 것은
찬 바람 속에 풍경 하나 매달고
온종일 그 소리를
혼자 듣는 일
풍경 속에 잠든 수많은 소리를 모셔와, 모셔와
그중 외롭고 서러운 것에게는
술도 한 잔 건네는 일
더러는 숨을 멈추며
싸락눈처럼 젖어드는 고요에
아프게, 아프게 금이 가는 가슴 한쪽을
오랫동안 쓸어주는 일
그 끝에 반짝이는
검은 우물을 들여다보는 일
―시집 『거룩한 허기』(랜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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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거름처럼 투명한 검은빛의 시
전동균의 이 시를 읽으면서 먼저 떠올린 것은, 내가 마흔을 넘길 무렵의 일이었다. 좋은 시를 마주하는 동업자라면 마땅히 그 언어들이 풀었다가 당기는 매력에 연鳶줄에 걸린 가오리연쯤 되는 것처럼 남실남실 넋을 맡기고 한껏 안복을 누려야 할 터. 나는 한눈이나 팔며 군생각에 반나마 마음을 적셔야 했다. 내 마흔은 소위 밀레니엄버그에 먹혀 꼼짝 못하고 온데간데없는 꼴이 되고 말았다. 나이 마흔이 그 안에 지닐 법한, 비장 속까지 쓸쓸하게 간질이는 듯한 생의 우수도, 자못 비장하고 경건할 성싶은 철학적 명제도, 도대체 되새기고 뭐고 할 겨를을 찾기 어려웠다. 새 천년을 맞는, 본능에 가까운 사람들의 흥분과 불안이 디지털리즘이라는 얄궂고 낯선 산업환경과 겹치면서 시정市井은 송두리째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하긴 이것저것이 다 세상일에 한창 부화뇌동하면서 정작 나를 참견하고 다스리는 편에는 소홀한 탓이겠다.
이런 마당이라면 「마흔을 넘는다는 것은」에 더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전정前程에 대한 반성은 고사하고, 이 작품을 가만히 읽다 보면 내용과 무관하게, 아무래도 내막을 짐작조차 못하면서도 한없이 고요하고 아프고 아름다운 느낌만 幻처럼 남은 꿈결이나, 그 꿈에서 갓 깨어난 찰나 휙! 눈시울을 스친 무슨 환하고도 짠한 향내 같은 光芒을 경험할 때와 비슷한 질의 어떤 아련하고 안타까운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화자는 마흔을 넘길 무렵 자신의 의식을 두 개의 에피소드로 베낀다. 둘 다 가장 추운 겨울날 매단 풍경소리로부터 파문을 일으키며 의미가 확장된다. 두 의미는 <배고픈>, 또는 <외롭고 서러운> 것들을 향한 연민으로 묶인다. 그것들이 겪는 삶의 신산스러움을 최대한 심화하기 위해 굳이 <가장 추운 겨울날> 풍경을 매단 것이라면, 꾸민 흔적이랄까, 약간 속기가 만져진달 수도 있겠다. 그건 지나친 질정質正이라 할지 모른다. 다만 여기에서 드러나는 물생들에 대한 연민은 더 재고 따질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이런 분위기의 연민은 자칫 풋내 땀내 다 놓친, 수경재배된 식물처럼 맥없이 푸들거리거나, 알코올로 멸균처리된 표본처럼 무상해지기 십상이다. 진정성 내지 핍진감을 구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위험을 영리한 보법步法으로 간단하게 비껴간다. 결구 <그 끝에 반짝이는/검은 우물을 들여다보는 일>(검게 표현된 우물물이 반짝여 보이기는 어려울 듯하다)은 앞의 두 에피소드가 갖는 관념의 낌새를 알뜰히 희석시킨다. 이 시의 의미구조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유년기에 누구나 겪었을, 까마득히 가뭇하고 동그라니 고인 우물물을 고개 숙여 들여다보는 모습이, 어쩌면 우물물을 내려보며 무심히 뱉었을지도 모를 아직 子母가 분화되지 않은 소리맵시가, 시공時空의 가장 먼 곳으로부터 공명하는 듯한 그 웅숭깊은 반향에 대한 기억이 왜 창백한 연민의 모서리를 그처럼 하염없이, 보드랍게 감싸 보듬는지는 설명할 길이 없다. 하여튼 이 부분은 시를 생동케 하는 시안詩眼이라 할 만하다.
이 시의 매력으로 빼놓기 어려운 것은 2연에 드러난 이미지다. 미당의 「추천사」나 지훈의 「낙화」를 살짝 연상하게 하지만, 이미지의 품새는 일탈과 기발에 의존하는 요즘의 팝아트다운 천품賤品에 견주면 성실한 만큼 값지다. 바람결에 단속적으로 들리는 풍경소리와 밀물의 물마루 사이로 동실동실 떠흐르며 뱃전을 숨겼다 드러내곤 하는 장면의 비유를 상상해 보시라. 청청하게 아름답다.
제목 <마흔을 넘는다는 것은>에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나라면 <마흔을 넘긴다는 것은>으로 했을 것 같다. <넘는다>라는 동사는 주어의 의지가 많이 배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허위허위 숨찬 느낌마저 든다. 마흔 넘는 걸 바라는 경우도 흔한 일이 아니겠지만, 무엇보다 시가 지닌 숙연하고 경건한 저음低音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잘못하면 마흔을 넘은 다음 봉사활동을 하는 기분으로 신산하게 세상을 건너는 것들을 가련히 여기고 위로하는 것처럼 이해하게 할 소지가 있다. 이 시의 의도가 마흔 이후 생의 맑은 적막함을 바라볼 수 있는 눈트임을 <하게 되는> 방향에 있다면, 하물며 그것이 이성적 훈련이나 도덕적 수양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제목은 <마흔을 넘긴다는 것은>으로 붙여야 할 듯하다. 보기에 따라 과민한 시 읽기로 비쳐질 수 있겠다.
4연 4행의 <모셔와, 모셔와>의 반복도 적이 걸린다. 마무리연 3행의 <아프게, 아프게>와 함께 놓았을 때, 시 전체의 율격적 탄력을 미리 훼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의미상으로 보아, 풍경소리가 복수로 들리고 <외롭고 서러운 것>이 여럿일 수 있기 때문이거나, 의미를 강조하려 했기 때문이겠다. 그러나 시의 깨끗하고 겸허한 어조에 비추면 호들갑스럽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약간 때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발품을 팔면서 「마흔을 넘는다는 것은」을 읽는 것은, 시가 예인하는 미학의 사늘한 의취를 눈짐작하려는 까닭도 있지만 전동균의 시적 성취를 다시 돋워 가늠하려는 속내도 있다. 앞서 지적한 몇 가지가 시의 품위를 훼손할 리 없다. 나는 오히려 흠집이 없는 완벽完璧의 옥돌은 존재할 수 있지만, 흠결이 아예 없는 예술품으로서의 서정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누구의 손길을 탔든지 간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모조리 헛것이거나 가짜다. 이 시가 수록된 『거룩한 허기』에 실린 시편 가운데 어떤 것들은 살며시 미당이나 백석의 한 부분을 옷섶에 여며두기도 할지언정, 모두 가지런히 전동균다운 언어의 결을 타고 있다. 그의 주제는 너무 이르게 난숙해서 되레 아슬아슬 위태로운 면도 없지 않지만, 해거름처럼 투명한 검은빛 속으로 한량없이 침전하려는 시정신의 포즈는 요즘처럼 부산하고 소란한 세태에 더 소중하다. (2008년)
-http://cafe.daum.net/poemory(푸른 시의 방)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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