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록,「死者의 書 (외)」평설 / 이재복
死者의 書 (외 2편)
유병록
거기서는
죽은 자의 피부를 벗겨 생전에 가까웠던 사람들이 나눠 가진다더군
아끼는 책을 장정하고 이름을 새긴다더군
죽은 자는 책이 된다더군
아기가 태어나 글을 익히면
가장 최근에 죽은 자의 피부로 감싼 책을 선물한다더군
그를 대부로 삼는다더군
거기서는
몇 권의 책을 장정하며 성인이 된다더군
결혼을 서약할 때는 책에 손을 얹고
여기 장엄한 생을 두고 맹세합니다, 말한다더군
때가 되면
책을 꽂아놓은 책장에서 죽은 자들의 음성이 들린다더군
가까운 사람의 명단을 유언으로 남겨야 한다더군
거기서
죽은 자는 몇 권의 책이, 문자의 외투가 된다더군
늙어서 죽은 자는 지혜의 책이, 젊어서 죽은 자는
혁명의 책이 된다더군
아이가 죽으면 예언서가 된다더군
살아남은 자들이 삶에 관한 의문이 드는 저녁에 쓰다듬는
한 권의 생이 된다더군
—《현대문학》2011년 11월호
구겨지고 나서야
바람에 떠밀려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종이가 멈춰 선다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눈부신 세계의 비밀을 누설하리라 다짐하던 시기를 떠올렸을까 검은 뼈가 자라듯 한 글자 한 글자 새겨지던 순간이 어른거렸을까 뼈를 부러뜨리고 온몸에 상처를 남긴 어둠을 남긴 완력이 기억났을까
납작하게 엎드려 있던, 구겨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허공을 소유한 지금
안에서 차오르는 어둠을 응시하고 있을까
어쩌면 종이 안쪽에 이런 문장이 구겨져 있을지 모른다
어둠은 시간의 죽음, 빛의 속도를 따라잡으면 시간을 거스를 수 있지만 어둠의 부피를 측량하면 시간을 지울 수 있을 것……
문장을 완성한 후에야 뒤늦게 의미를 깨달은 것처럼
어둠의 부피를 실감한 종이는 상처를 끌어안은 채 잔뜩 웅크리고 있다 내 눈동자에서 어떤 적의를 발견한 듯이
구겨진 몸을 다시 말라는 듯이 어린 새끼처럼 겨우 잠든 어둠을 깨우지 말아 달라는 듯이
—《시산맥》 2011년 봄호
무릎으로 남은
모래가 사막을 건너고 있다
몇 번이나 쓰러졌다 일어서는 모래의 무릎이 빛난다
아름다운 무릎이란
한 번의 상처로 얻는 것이 아니어서
저 모래는 아슬아슬한 생애를 몇 번이고 건넜을 것이다
수차례 시간에게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구부러진 생애가 무릎으로 남는 법
그걸 무릎의 세습이라 부르자
물가를 서성이던 양서류의 무릎이었으며
갓 직립한 무릎이기도 했을
또 한 번 생이라는 낭떠러지를 지나는 모래들
쓰러지는데
이번 생에서도 길을 잃는데
모래들은 다시 한 방향으로 흘러가며
서로를 어루만진다
나는 상처 많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무릎의 생을 구술하고 있는 모래 속으로 손을 넣어본다
무릎으로 남은
지난 여러 번의 생애를 헤아려 보는 것이다
나는 지금 무릎걸음으로
수천수만 번째의 나를 건너는 중이다
—《시와 경계》201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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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한 시적 관념의 명명
유병록의 시는 관념적이다. 우리는 흔히 관념적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뉘앙스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관념이라는 말은 그런 부정적인 뉘앙스만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시에서 관념이 없으면 상징도 이미지도 없다. 김춘수의 시, 그 중에서도 「처용단장」시편들을 보면 여기에는 무수한 관념의 덩어리들이 산재해 있다. 이 관념성으로 인해 이 시편들은 그의 시 중에서 가장 상징성이 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관념이 모여 만들어 낸 미학적인 시편들은 무수히 많다. 관념적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시의 언어가 감각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관념이란 감각이라기보다는 인지나 지각에 가까운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병록의 시는 이러한 난해한 상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상징을 쉽게 서술하고 풀이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가령 「死者의 書」를 보면 여기에서는 책이 왜 사자의 서라고 불리는 것인지에 대해 상세하게 그것을 풀어놓고 있다. 시인은 그것이 왜 사자의 서가 되었는지에 대해 “죽은 자는 책이 된다더군”, “죽은 자는 몇 권의 책이, 문자의 외투가 된다더군”, “아이가 죽으면 예언서가 된다더군”이라고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이 말 속에는 해독 불가능한 상징이 숨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 말이 상징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죽은 자와 책 사이에는 이미 상징적인 관계가 성립된다. 죽은 자와 책 사이에는 동일성보다는 비동일성의 관계가 지배적이고 그것을 하나의 의미망 속에서 연결하는 방식은 상징의 구조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들은 대개 이런 방식을 택하고 있다. 가령 「무릎으로 남은」에서 시인은
모래가 사막을 건너고 있다
몇 번이나 쓰러졌다 일어서는 모래의 무릎이 빛난다
아름다운 무릎이란
한 번의 상처로 얻는 것이 아니어서
저 모래는 아슬아슬한 생애를 몇 번이고 건넜을 것이다
수차례 시간에게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구부러진 생애가 무릎으로 남는 법
그걸 무릎의 세습이라 부르자
라고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사막의 모래’를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이 사막의 모래에서 ‘무릎’을 상상해 낸다. 그것은 사막을 건너는 모래의 고통과 상처를 인간의 생의 고통과 상처로 치환한 데서 기인한다. 모래가 사막을 건너는 과정에서 당한 고통과 상처의 표지가 바로 ‘무릎 꿇음’이다. 사막의 모래를 보고 그것을 이렇게 무릎 꿇음으로 상상해 내는 과정에는 감각보다는 관념이 깊숙이 개입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이 시를 통해 만들어내려는 관념은 바로 ‘무릎의 세습’이다. 시인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무릎의 세습이라 부르자”고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시적 관념에 대한 명명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이러한 명명에 대해 나는 어떤 억지스러움보다는 참신함을 강하게 느낀다. 이 시에서 시인이 전개하는 시상에 대해 자연스럽게 공감하면서 그가 이끌어 낸 ‘무릎의 세습’이라는 명명에 대해 그것을 훔치고 싶을 정도로 어떤 강한 매력을 느낀다. 그가 형상화하고 있는 이런 식의 관념은 충분히 하나의 미적인 세계를 이룰 수 있다. 다만 언제나 그 관념이 소통 불능의 난해한 자기만의 언어의 독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좋은 관념이란 자아와 세계와 언어 사이의 미적 소통의 긴장임을 시인은 한시라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젊은 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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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복 / 문학평론가. 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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