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의섭의 시인조명 2 유종인, 저 한없이 느린 광속이여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2012년 2월호 ㅡ통호 제36호ㅡ
유종인, 저 한없이 느린 광속이여
유종인 시인의 몸짓이 그리 느린 편은 아니다. 그의 말투도 느린 편은 아니다. 그러나 내 느낌에 유종인 시인은 느리다. 어떤 이유에서 그러한 생각이 들었을까. 문제는 그의 시다. 그의 시는 빠르게 읽히지 않는다. 읽는 이를 한참 동안 시에 머물게 한다. 그렇다고 유려하고 장황한 문체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어딘지 모르게 주인을 닮은 그의 시는 누군가 와서 깊은 우물 들여다보듯 봐주기를 바라고 그 우물에서 머리를 들었을 때에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찬바람이 이마를 때린다. 그것은 소소한 일상에서 깨달음을 얻은 자에게 쏟아지는 죽비이다. 그렇게 느리게 읽히지만 번개같이 다가오는 그의 시이다. 이러한 시의 덕목을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다.
재래식 화장실 갈 때마다
짧게 뜯어가던 두루마리 화장지들
내 밑바닥 죄를 닦던 낡은 성경책이 아닐까
떠올린 적이 있다
말씀이 지워진 부드럽고 하얀 성경책 화장지!
외경의 문밖에서 누군가 나를
노크할 때마다 나는
아직 죄를 배설 중입니다 다시
문을 두드려주곤 하였다
바닥난 화장지, 어느 날 변기에 앉아
내 죄가 바닥나버린 허탈에 설사라도 나는
기분에 울먹인 적이 있다
그러나, 천천히 울어야지
저 문밖의 가을, 깃동잠자리 날개 무늬를 살필 수 있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머리에 토란잎을 쓰고 가는 아이처럼
슬픔에 비 맞아 가는 것도
다 구경인 세상이듯이
때론 맨발에 질퍽이는 하늘을 적시며
- 「아껴 먹는 슬픔」 전문
이 시는 유종인 시인의 첫 시집 표제작이다. 시인은 화장실에 갈 때 화장지를 조금씩 뜯어가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것은 ‘성경책’의 이미지를 닮았다. 그러기에 화장실에서의 배설의 시간과 ‘죄’를 배설하는 시간과의 동일시가 가능한 것은 그 ‘성경책’의 이미지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죄’를 다 배설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인데 시인은 ‘내 죄가 바닥나버린 허탈에’ 오히려 기분이 울적해지고 울먹이기까지 한다. 이 역설적 풍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쩌면 ‘죄’는 완전히 배설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애당초 배설되지 말아야 할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 ‘죄’는 동이 나서는 안 되는 것이며 늘 우리의 몸과 정신 속에 남아 있는 존재성의 조건인 것이다. 그런 ‘죄’를 갖고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아직 죄를 배설 중’인 것처럼 생기 넘치는 진행형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죄’가 바닥난 시인은 슬프다. 그래서 ‘천천히’ 울고자 한다. 조금이라도 이 세상에서의 진득한 존재감을 더 느껴보고 싶어 한다. 시인이 천천히 울면서 유예시키고 싶은 것은 바로 이 ‘구경인 세상’ 속에 ‘생동성’ 그 자체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깃동잠자리 날개 무늬’까지 보여야 하는 세상이며 ‘머리에 토란잎을 쓰고 가는 아이’와 같은 동화적 세계가 현존해야 하는 세상이며 ‘슬픔에 비 맞아 가는 것도’ 헛헛한 구경이 되는 세상이다. ‘죄’가 바닥나 버려 슬픈 시인이 조금이나마 오래 붙들고 싶은 세상, 그것은 사는 게 곧 업이며, 불경이며, 죄스러움이며 고행인 우리의 삶을 오히려 아름답고, 환상적이며, 희화화된 삶으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에 의해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 사실 조금이라도 ‘죄’가 있어야 인간적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모두 성인이고 신이다. 그래서 시인은 ‘죄’가 바닥나 버려 곧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그 인간적인 풍경에 대해, 또 그것이 빨리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슬퍼하고 있는 중이다.
위의 시는 이러한 역설적 깨달음을 담고 있지만 얼핏 선명하게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시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보아도 광속의 깨달음은 쉽게 오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다음의 시는 그 속도가 제대로 붙었다.
교회는 여러 해 전 망했다
뒤꼍에 버려진 십자가는
그게 나무인지라
후일담처럼
십자가에 느타리가 피었다
교회 예배에 한 번도 참석한 적 없는
저 여자의 남편은 발김쟁이고
자식들만 여럿인데
오늘에야 십자가를 새로 봤네
망한 십자가라면 무얼 더 매달랴마는
제 속에서 끌어낸 알심인 양
오동통한 느타리버섯들
잘 씻어 삶아 무쳐 먹자 얘들아
아빠는 늦을 것이다
오늘부터 십자가는 한결 가벼워질 테다
- 「버섯」 전문
이 시는 최근에 유종인 시인이 상재한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문학과지성사, 2011.11)에 수록되어 있다. 시집의 시들은 전반적으로 고풍스럽다. 시인의 취향이 그렇기도 하거니와 시인의 어투도 한몫하고 있다.
이 시에는 한 가족의 내력부터 ‘십자가’라는 소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징이 들어 있다. 망해버린 교회에서 주워온 ‘나무 십자가’에는 느타리버섯이 피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주워온 ‘저 여자’의 남편은 ‘발김쟁이’, 즉 ‘못된 짓을 하며 마구 돌아다니는 사람’이다. 그런데다 지식이 여럿이라니 여자의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자는 느타리버섯을 아이들과 무쳐 먹자고 한다. ‘십자가’에서 궁색하나마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벌써 작은 구원이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에야 십자가를 새로 봤네’라고 한 것이다. ‘교회 예배에 한 번도 참석한 적 없는’ 여자지만 그렇게 새롭게 신의 가호를 느끼게 된 것이다. 더구나 느타리버섯의 모양새가 꼭 그렇지는 않지만 흔히 버섯에서 연상되는 것이 ‘男根’이고 보면 그것을 먹는 행위는 곧 남편에 대한 여자의 대리 보복 심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은 시의 말미에 ‘아빠는 늦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아빠가 늦는다는 것은 이 가족에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어쩌면 시에는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아빠는 영원히 안 올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오늘부터 십자가는 한결 가벼워질’ 것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가벼워지는 것은 십자가에 핀 느타리버섯을 먹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종교적 구원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남편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워준 여자가 죄스런 심정을 조금이나마 덜어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 가족의 고난사는 이렇게 희미한 희망이나마 서광을 비추면서 끝이 난다.
나는 ‘십자가’에 핀 느타리버섯을 통해 이렇게 애틋한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의 예리하면서도 풍요로운 필력에 놀라고 있다. 유종인 시인의 여타 시들도 마찬가지지만 유독 유종인 시인 특유의 감각이 돋보이는 시들은 이렇게 사사로운 일상 속에서 범인은 발견하지 못하는 의미를 보여주는 시들이다. 그의 관찰자적 시선에 포착되면 모두 시가 될 것도 같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섬돌’(「섬돌」) 하나에서도, ‘깨진 됫박’(「됫박」)에서도, ‘딱딱하고 민망한 뼈 공’(「白骨全書」)에서도 詩性을 발견한다. 삶이 곧 시이고 시가 곧 삶인 경지가 바로 이러할 것이다,
시인의 그물망에 포착된 詩性을 쫓다보면 이 세상은 모두 유의미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그는 허투루 버려진 사물에도 애착을 갖는다. 위의 시 「버섯」도 그런 와중에 탄생한 시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는 다 읽는 즉시 한 가족의 내력과 그 가족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풍경까지 퍼뜩 그려지는 찰나적인 섬광이 비춘다. 이 깨달음의 광속도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많은 시가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한 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나 백미의 시는 희귀하다. 내 판단에 유종인 시인은 집중과 몰입으로 세상을 사유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먼저 깨닫고 그것을 게송 전해주듯 우리에게 현시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계수나무가 노랗다 못해 주홍색 물들었다
쌀쌀해졌다 무언가
크게 빈 것이 들이닥쳤다
아, 어머니는 어찌 이리도 늦게까지
비어 오나, 비어서 애국가 속 가을하늘처럼
공활(空豁)해지셨나
뱅어포에 고추장 발라 연탄불에 구워주시던,
어머니는 얼마나 많은
작은 어머니를 이어 붙여 만든 뱅어포 같은
전면적(全面的)인 어머니였나
눈코 뜰 새 없이 이어붙인 뱅어포여,
누가 그걸 내장 똥 머리 지느러미 따로 발라내고
먹으랴 먹을 수 있으랴
그냥 어머니는 어머니를 구워 주는 대로
있는 그대로 먹는, 먹게 되는 수밖에 없었으니,
뱅어포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게 된 공활(空豁)의 가을날,
어머니가 없다! 하늘 하늘에다 대고
어머니를 내다오, 다시 물려다오 재채기라도 해야 하나
가을의 살이라니, 아직도 어머니는 내 식욕이다
뱅어포에 고추장 발라 연탄불에 구워주시던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내 식탐이다
- 「뱅어포」 전문
이 시는 최근 『문학과의식』(2011. 겨울호)에 발표된 시이다. 어린 시절 뱅어포를 양념 발라 구워 반찬으로 먹어본 사람들은 이 시의 묘미가 더욱 새삼스러울 것이다. 시인은 ‘뱅어포’의 특징을 간파하고 있다. 뱅어포는 멸치새끼보다 작은 뱅어들을 사각 틀의 체에 담아 눌러 말린 음식이다. 그러니 촘촘한 가운데 구멍이 듬성듬성 날 수밖에 없고 여기에 ‘공활(空豁)’이라는 시어가 연계된다. 또한 뱅어포엔 수많은 뱅어들이 얽혀 있고 여기서 어머니의 수많은 자식 사랑과 희생을 의미하는 ‘얼마나 많은/작은 어머니를 이어 붙여 만든 뱅어포’라는 말이 나온다. 뱅어포는 넓적한 네모꼴이다. 대략 복사용지만하다. 전면(前面)을 다 구우면 뒤집어 후면(後面)을 굽는다. 어쨌거나 전면(全面)이 구워져야 한다. 그리고 뱅어포는 자신들을 전면적으로 다 내어준다. 이런 뱅어포의 전면성은 곧 어머니의 전면적인 사랑과 연결된다. 뱅어포는 ‘내장 똥 머리 지느러미 따로 발라내고’ 먹을 수가 없다. 뱅어들이 너무 작고 촘촘하게 붙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식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을 ‘구워 주는 대로/있는 그대로 먹는, 먹게 되는’ 상황과 겹친다. 이렇게 뱅어포의 다양한 특징들이 모두 어머니와 직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재 ‘어머니가 없기’ 때문이다. 그 절실함과 그리움으로 시인은 어머니를 내달라고 간청한다. 어머니가 어쩔 수 없는 ‘식탐’의 대상이 되는 이유도 어머니의 그 음식 솜씨와 더불어 함께 가버린 어머니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이 시는 이렇게 예전 시절의 기억과 어머니의 사랑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뱅어포라는 소재를 매개로 하여 ‘전면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시를 읽다 보면 공활한 가을날의 쌀쌀한 풍경이 왜 1연에 나왔는지를 알 수 있다. 뱅어포의 색깔은 노랗지만 고추장을 발라 구우면 주홍색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없는 지금, 어머니가 떠오르는 지금, 가을날은 더 없이 쌀쌀한 것이다. 이렇게 1연에서부터 시 전체를 예지하며 시가 쓰이고 있기에 이 시는 ‘전면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더욱 ‘뱅어포’처럼 촘촘하다. 시인의 구상력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절심함이 잘 묻어나고 있는 이 시 역시 다 읽고 나면 무릎을 탁 치며 아,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이 퍼뜩 느껴진다.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꼭 거창한 종교적 깨달음까지 가지 않아도 좋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우리를 미소 짓게 하고 따뜻하게 하는 깨달음이 시를 통해 전달될 때 우리는 얼마나 풍요로운가. 시인은 시 속에 우리의 시선을 천천히 흘러가도록 붙잡고서 어느 순간 느닷없는 일갈을 내지르고 있는 것만 같다. 사실 느린 산책 뒤에 사유가 깊어지듯이 우리는 시인의 느린 발걸음에 기꺼이 보조 맞춰야 한다. 유종인 시인과 함께 느리게 산책하기, 그의 시를 읽는 느낌이란 그런 것이다.
Y 윤의섭의 시인조명 【2】
1968년 경기도 시흥에서 출생. 아주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同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199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와 1994년 《문학과 사회》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문학과지성사, 1996), 『천국의 난민』(문학동네, 2000),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문학과지성사, 2005), 『마계』(민음사, 2010)가 있음. 애지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 中. 대전대학교 교수.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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