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의 「죽은 나무를 위한 아르페지오」평설 / 최준
죽은 나무를 위한 아르페지오
강인한
흐르는 저 물길 위에 그대 욕망의 물결이 베일처럼
가벼이 흔들리는 게 보이는가, 술탄이여.
죽은 자들의 그림자 우쭐거리는 밤마다 죄를 머금은
이슬은 사이프러스의 촉수 끝끝마다 별빛을 끌어내린다.
장미꽃이 초록빛 작은 입술을 내밀어 관능의 목을 축이는 밤마다
인간의 슬픈 기원이 들린다. 방울방울
젊은 목숨들 잦아진 곳,
한때는 소리 없이 밤새처럼 한 쌍의 그림자 스며들어
죽음도 무릅쓰는 사랑에 기뻤으매
비단바람이 어루만져 나뭇잎을 환희에 떨게 하였으며
생명의 음률을 스스로 읊으며 분수가 뿜어져 나오게 하였는데
금기를 범하여 처단된 술탄의 여인,
그 사랑하는 병사와 더불어 목이 걸렸고
저들에게 밀회의 장소를 제공한 죄로 나는 뿌리를 잘렸다.
처형의 전말을 목격한 죄로 나는 가지를 잘렸다.
죽어서 이루지 못한
슬픔으로 피는 꽃들의 이름을 아아, 나는 모른다.
그 밤의 천둥 속에서 소스라치던 내 이름도 잊고
몇 백 년 물길은 흘러서
이제는 시간의 흐름도 잊었으니
불꽃처럼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먼 데서 깊은 밤 사자들이 배회하고
설화석고 흰 돌에 얼굴을 비추는 벙어리, 물의 정령들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며 아라베스크의 춤을 출 때면
횃불에 비친 궁전의 벽은 핏빛으로 어룽지고 있거늘, 술탄이여
나는 다만 눈뜬 채 영원히 사라지지 못하는 한 개 나무토막,
이 깊은 성 안에서 잠 못 드는 영혼들 하염없는 손짓을 기억할 뿐
한 그루 죽은 나무로 나는 여기
불멸의 사랑을 증언하기 위해 아람브라의 정원에 서 있느니.
—『시와 미학』(2011.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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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무의 영혼, 그 사랑과 죽음의 기억
비극적이고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 낯선 풍경은 일차적으로는 언어적인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이들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타자들의 역사로부터 기인한다. ‘아르페지오’ ‘술탄’ ‘사이프러스’ ‘설화석고’ ‘아라베스크 등등 시에 등장하는 이국적인 언어들은 그 배경이 낯익은 세계와는 아주 먼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정리하자면 이 시는 유럽 스페인에 있는 아람브라 궁전의 비극적인 역사를 화자인 죽은 나무가 회상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나무는 궁전의 주인이자 지배자였던 술탄에게 자신이 “불멸의 사랑을 증언하기 위해 아람브라의 정원에 서 있”다고 말한다. 나무는 오래 전 궁전의 정원에 서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랑을 지켜보고 있었다. 술탄의 여인과 한 병사와의 사랑은 신분 사회인 이슬람 세계에서 용납될 수 없고 용서될 수 없는 사랑이었다.
나무는 이 비극의 한가운데서 사랑과 그로 인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다고 술탄에게 토로한다. “한때는 소리 없이 밤새처럼 한 쌍의 그림자 스며들어/ 죽음도 무릅쓰는 사랑에 기뻤”다면서 “저들에게 밀회의 장소를 제공한 죄로 나는 뿌리를 잘렸”고 “처형의 전말을 목격한 죄로 나는 가지를 잘렸다”고 자신의 죽음의 이유를 고백할 때, 나무는 술탄의 여인과 한 무명 병사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자신의 죽음과 함께 ‘불멸’임을 확인한다.
그렇지만 불멸의 사랑이 있을 수 있는가. 죽음을 넘어서도 지속될 사랑을 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이 시가 사랑에 대한 역설로 읽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름다운 비극이 있을 수 있다면 그건 ‘사랑’ 때문이 아닐까. 인간의 세계에서 남녀의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지속적이고, 영원히 현재적이다. 비극적인 사랑 또한 아람브라 궁전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시를 읽으며 아람브라 궁전을 지금, 여기로 옮겨올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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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준 / 1963년 강원 정선 출생.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 시 당선.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 시 당선.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개』『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
—『시와 표현』(2012.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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