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눈을 뜬 세계 |
|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84) |
사물의 원리
강정
종각에 들어선 중은
세 끼를 굶었거나
어젯밤 몰래 술을 마시고 여자를 품었을 것이다
정념을 탐해서가 아니다
정념과 싸우기 위해서다
저녁 여섯시
둥근 종소리가 산 어귀에서 내려와
치장한 남녀들의 분주한 열망을 품는다
팽팽하던 힘을 놓아버리면
하나의 점이 수천만 배의 면적을 가진다
스스로 공간이 되면서 스스로 지워진다
여름 해를 등피에 바른 뱀이
혀를 찢어 소리의 원환을 삼킨다
소리 자체가 되어 다시
숲 속으로 알을 슬러 숨어든다
도시 한가운데 커다란 연못이 생긴다
다들 언젠가 되돌아갈 물빛의 소리를 찾는다
귀가 씻기니
탁류의 바람마저 상큼하다
한 번도 더럽혀지지 않은 밤이 비로소 눈을 뜬다
둥근 메아리 속에서 온몸으로 메아리가 되어
# 단숨에 손에 잡히는 시가 있고, 그렇지 않은 시가 있다. 개인의 기호와 감식안에 따라 호불호가 달라지겠지만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시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장과 아우라를 갖는다. 대체로 그러한 시들은 다양한 색으로 분광하면서 넓이와 깊이를 확보하고 시간의 폭력을 견디는 내구력이 강하다. 10년만 지나도 퇴색하는 시가 있는가 하면 반세기가 지나도 광휘를 내뿜는 시도 있다. 몇 번을 거듭하여 읽어도 맛이 달라지는 시들의 오묘한 향취는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강정의 「사물의 원리」는 새로운 각도에서 존재의 근원에 접근한 작품이다. 1연부터 3연까지는 승려에 대한 이야기다. ‘중’과 ‘둥근 종소리’는 하나의 의미망을 형성하고, ‘술’과 ‘여자’ ‘열망’ 등은 대립적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대상들이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일반의 통념을 깨고 대척점에 있는 사물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다. 그것은 ‘정념과 싸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싸움의 과정과 이유를 감각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5연이다. 5연은「사물의 원리」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연이다. ‘팽팽하던 힘’과 ‘하나의 점’은 승려와 여자의 관계와 동일하다. 힘을 놓아버리는 행위를 통해 구현되는 것은 ‘하나의 점’이 ‘수천만 배의 면적’을 가지는 것이고 종국에는 ‘스스로 공간이 되면서 스스로 지워’지는 것이다. 6연부터 8연까지는 각성의 공간이다. 5연의 내용을 변주하면서 심화 확대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화자는 9연에서 최초의 밤을 대면한다. 관념과 일체의 인식 행위로 오염된 밤이 아니라 태초의 근원, 시의 탯자리에 속하는 성소이다. 그 자리에서 밤은 ‘둥근 메아리 속에서 온몸으로 메아리가 되어’ 눈을 뜬다. 새로운 인식의 개안이요 존재의 열림과 확장이 성취되는 공간인 것이다.
시집『활』에 수록된「사물의 원리」는 ‘스스로 공간이 되면서 스스로 지워’지는 역설의 형국을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시다. 이처럼 생의 비의를 내장한 한 편의 시를 통해 독자는 주체와 사물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고, 첫눈을 뜬 세계의 황홀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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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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