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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심 시 낭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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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의 마지막 유심시낭독회는 ‘텅 빈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로 한 해를 추억하는 자리였다. 김석환, 김영찬, 문숙, 문정영, 박연숙, 신원철, 이명수, 이은봉, 이영혜, 이인철, 임희구, 조정, 조정인, 한소운, 홍일표 시인들이 성신여대 한영옥 교수를 초청하여 함께 시를 낭독하며 즐거운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낭독회의 구성부터 손님 초대는 물론 행사진행까지 도맡아 꾸리더니, 정리 원고마저 마다하지 않은 문숙 시인의 수고로 낭송회 현장을 중계한다.
■2011년 11월 25일 금요일 오후 7시 ■유심아카데미 세미나실 | |
늦은 7시, 드디어 유심시낭독회가 열렸다. 이날은 유독 문단 행사가 많은 날이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시인들이 참석해주었다. 시낭송자들의 특별한 구성 때문에 기대를 갖고 참석한 시인들도 있다. 시낭송자 대부분이 전철 4호선을 따라 살고 있는 특징 때문이다. 이들 중 몇몇은 필자(문숙)와 더불어 매월 등산모임을 하고 있어 구성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또한 초대시인으로 와서 시문학 강연을 해주실 한영옥 교수도 같은 4호선 역에 살고 있는 우연함이 곁들여져 구성원의 특징을 살렸다. ‘텅 빈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로 열리게 된 시낭독회는 11월이라는 심플한 계절의 느낌에 따라 배경음악도 지우기로 했다. 시낭송 중간에 양념처럼 곁들이게 되는 음악이나 무용 같은 색다른 볼거리도 사양했다. 시라는 그릇만 오롯이 남기고 다 비워보자는 취지였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겨울의 중심에 서서 오직 시에 담겨서 위로받고 즐거워 보자는 기획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계절과 같은 색으로 하모니를 이루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시낭독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하나둘 자리가 메워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행사가 많아도 올 사람은 오기 마련이다. 드디어 시문학 강연을 해주실 한영옥 교수가 도착을 하고, 필자가 사회를 보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초대시인 한영옥 교수에 대해, 성신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다시 하얗게》라는 시집을 냈다고 간단히 소개를 했다. 강연석에 앉은 한영옥 교수는, 평소 친분이 있는 교수 시인들이 본인의 강연을 듣겠다고 귀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강연 내용은 이 글 말미 353쪽부터 실려 있다.)
한영옥 교수의 짧은 강연이 끝나고, 다른 행사에 참석했다가 뒤이어 들어서는 사람들로 인해 약간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시낭송이 이어졌다. 열네 명이나 되는 시인이 나와서 시낭송을 해야 하는 관계로 진행이 빨라야 했다. 낭송에 앞서 낭송 순서를 매기는 기준도 예민한 시인들의 감수성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여 시낭송자들의 구성적인 특징에 따라 4호선 역의 순서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필자가 “지금부터 시낭송을 상계역에서부터 출발하겠습니다.”라고 하자 모두들 웃음을 띠었다. 당고개역에서 출발하는 4호선 그 첫 번째 순서는 상계역에 사는 문정영 시인이다.
나는 한때 물처럼 맑다고 생각했다./ 물로 집 한 채 지었거나,/ 물의 집이라는 생각도 가져보았다./ 그런 나를 비추자 물빛이 흐려졌다./ 내가 지은 집은 지는 해로 지은 것이었다./고인 물을 막은 것에 불과했다./ 내가 흐르는 물자리였으면/ 새 몇 마리 새 자리를 놓았을 것이다./ 갑자기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보면/ 눈물로 지은 집 한 채가 생각났고,/ 눈물도 거짓으로 흘릴 때가 많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은 집이 모래집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깊다는 생각은 지우기로 했다./ 물은 엎드려 흐르는 것인데/ 내가 지은 집은 굽이 높았다.
― 문정영 〈수곽(水廓)〉 전문
시산맥 동인회를 이끌며 문학잡지를 발간하는 문정영 시인의 시 〈수곽(水廓)〉이 낭송되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숙연했다. 중년이 된 시인의 자화상 같은 시라는 느낌이 들어서다. 누구나 태어날 때는 “물”보다 “맑은” 영혼을 지닌다. 그러나 삶의 욕망에 휘둘리며 사는 동안 순수함을 잃어가고, 그런 삶이 주는 고통 속에서 지은 집 한 채가 실상은 거짓된 것이며 “모래집보다 못한” 허무한 것임을 알았다는 의미가 주는 파장은 왠지 슬프다. 절대가치를 정할 수 없는 세상에서 깊고 진실한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곱씹게 하는 시다. 이렇듯 시인은 시를 통해 자기성찰과 반성을 시시각각으로 하는 존재들이다. 두 번째 시낭송은 신원철 시인이 나와서 경상도 억양이 묻어나는 굵직한 목소리로 자작시 〈황혼〉을 차분하게 들려줬다.
햇볕이 몽실몽실 떨어지는 잔디밭/ 때죽나무 한 그루 오두마니 서 있는데/ 햇살이 좋아/ 해바라기 나온 두 할머니/ 살아온 세월 풀어내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있습니다/ 도란도란 이어가는 정겨운 몸짓/ 죽은 영감,/ 잘 사는 아들네 가족 이야기,/ 살아온 날과 살 날을 셀 수 없는 할머니/ 하얀 머리 속엔/ 옛날밖에 없습니다// 오직 지팡이 하나/ 이야기 들어줄 사람도 마땅치 않아// 그게 안쓰러운 때죽나무/ 발갛게 물들인 잎사귀 하나씩 떨구어 가며/ 말을 붙이고/ 발길 자꾸 붙잡는데// 사실은 가을이 잎사귀를/ 슬슬 간지럼 먹여 떨어뜨리고/ 노인들은 이야기를 줍고 있는 거지요 ― 신원철 〈황혼〉 전문
할머니 두 분이 중심이 되고 있는 가을 풍경이 우리 눈앞에서 선연하게 펼쳐지는 듯하다. 낭송한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신원철 시인은 아이 같은 천진함과 따뜻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다. 그럼에도, 평소에는 투박한 경상도 어조를 고수하는 바람에 상대방이 머쓱해질 때가 더러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필자 역시도 이십 년이 훌쩍 넘는 서울 생활을 했지만 아직도 경상도 억양 때문에 대중 앞에서 발음과 의사 전달에 신경 쓰느라 머릿속에 담은 말들을 다 까먹는 경우가 잦은 편이다. 그래서 더욱 드라이한 사람으로 취급당할 때가 있다. 여하튼 표현에 있어서 서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각설하고, 다음 역인 창동역으로 이동해서 1호선을 갈아타는 박연숙 시인을 만나보기로 했다.
방금 깎아놓은 해가 뜨고, 식탁 가장자리 갈변한 계집애들이 얼룩을 지워. 붉은 색은 식욕을 돋운다는 난센스, 사과껍질과 나란한 햇볕도 신데, 바닥에선 누구나 평등해지잖아. 식도에 묻은 과즙은 잘 닦이지 않고, 날라리 사과 알은 굴러다니다 어긋나지. 비집고 든 고요의 멀어진 머리와 꼬리가 서로를 물어뜯기도 해, 나는 입이 짧고 아직 오지 않은 기억을 씹으며 어금니를 손질하고 가끔 사족을 잘라// 절룩이는 계집애들이 달아나곤 해, 뒷문 레이스커튼이 흔들리지// 너를 설명하는 식도는 충분히 친절하고 숨 막힐 텐데, 검불 묻은 사과를 접시에 올려, 머리·심장·주먹·눈동자·젖가슴, 내가 먹어버린 한 쪽의 사과에 저녁이 먼저 도착하지, 이윽고 군침, 포크는 시인이므로 혀는 이미 두 갈래, 붉고 완벽한 새 사과의 기억을 디스플레이 해놓고 우리는 굶주리지, 머리와 꼬리가 없는 난센스를 반복하면서 ― 박연숙 〈채식주의자들이 있는 식탁풍경〉 전문
박연숙 시인은 〈채식주의자들이 있는 식탁풍경〉이라는 자작시를 낭송했다. 시인의 자유로운 연상에 의해 구성된 듯한 시여서 의미 연결이 어렵긴 하지만 낭송될 때의 느낌은 신선하고 발랄했다. 톡톡 튀는 감각적인 비유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느낌이 들어서다. 낭송을 마치고 들어가는 박연숙 시인을 향해 시가 어렵다는 말을 던지자, 뒤늦게야 말뜻을 알아차린 그녀는 그만의 특유한 미소를 날린다. 오래도록 시낭송을 주관해온 홍사성 유심 주간께서 언젠가 했던 말씀이 생각났다. 귀로 듣는 시와 눈으로 읽는 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과 낭송시는 가능한 한 서사가 담겨 있는 시가 이해가 쉬워 감응이 빠르다는 얘기였다. 낭송시는 일단 쉽게 전달이 되는 걸 선정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다음은 네 번째 순서로 창동역에 살고 있는 김석환 시인이 자작시 〈허수아비의 잠〉을 낭송하기 위해 마이크 앞에 섰다. 무척이나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제가 이런 데에 나와서 시낭송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는데……”라는 멘트로 인사를 대신했다.
오수를 깨워 줄 참새도 날아오지 않는다/ 동공을 찌르는 전조등 불빛, 지친/ 차바퀴 파찰음이 일용할 양식이다./ 목 부러진 해바라기, 제 그림자를/ 키우는 고속도로 휴게소 한구석/ 두 팔 벌린 허수아비 군상/ 찢겨진 옷자락이 백기처럼 펄럭인다/ 구겨진 모자 비뚤어진 입/ 노을에 비스듬히 기댄 한 사내/ 심장도 창자도 없이 외발로/ 버텨 온 한 생애가 무겁다/ ……미아를 찾습니다./ ……속히 승차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요란한데/ 점점 깊어지는 허수아비의 잠/ 과속으로 고개를 넘어가는 차량들/ 행렬을 따라가면 물꼬 넘치는 천수답/ 벼 이랑에 뜸부기 알을 품을까/ 꿈길을 동행할 풀벌레 노래 아득한/ 불모의 광장으로 먹구름 진입할 뿐/ 본적도 혈통도 잊은 사생아/ 그 유기된 주검을 덮어 줄/ 폭설이라도 내릴까 ― 김석환 〈허수아비의 잠〉 전문
“노을에 비스듬히 기댄 한 사내/ 심장도 창자도 없이 외발로/ 버텨 온 한 생애가 무겁다”는 시인의 쓸쓸한 정서가 담긴 〈허수아비의 잠〉은 가을 고속도로 휴게소가 배경이 되고 있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인생의 도정에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것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한 인생일까. 목적에만 이끌려 나를 돌아볼 시간도 없이 달려가는 인생이란 “본적도 혈통도 잊은 사생아”이며, 자신으로부터 “유기된 주검”이 아닐까?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밥도 되지 않는 시를 나누며 휴식을 갖는 일도 시를 통해 나를 돌아보며 부질없는 욕망을 비워내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다섯 번째로 미아역에서 치과병원을 하고 있는 이영혜 시인이 낭송을 시작했다.
타고난다는 왼 손금과/ 살면서 바뀐다는 오른 손금/ 육십갑자 돌아온다는 그가 오르내린다./ 양 손에 예언서와 자서전/ 한 권씩 쥐고 사는 것인데/ 나는 펼쳐진 책도 읽지 못하는 청맹과니./ 상형문자 해독하는 고고학자 같기도 하고/ 예언서 풀어가는 제사장 같기도 한 그가/ 내 손에 쥐고 있는 패를/ 돋보기 내려 끼고 대신 읽어준다./ 나는 두 장의 손금으로 발가벗겨진다./ 대나무처럼 치켜 올라간 운명선 두 줄과/ 멀리 휘돌아 내린 생명선./ 잔금 많은 손바닥 어디쯤/ 맨발로 헤매던 안개 낀 진창길과/ 호랑가시나무 뒤엉켰던 시간 새겨져 있을까./ 잠시 동행했던 그리운 발자국/ 풍화된 비문처럼 아직 남아 있을까./ 사람 인(人)자 둘, 깊이 새겨진 오른손과/ 내 천(川)자 흐르는 왼손 마주 대본다./ 사람, 사람과 물줄기가 내 생의 요약인가./ 물길 어디쯤에서 아직 합수하지 못한/ 그 누구 만나기도 하겠지./누설되지 않은 천기 한 줄 훔쳐보고 싶은 밤/ 소나무 가지에 걸린 보름달이/ 화투장 같이 잦혀져 있다. ―이영혜 〈손금 보는 밤〉 전문
이영혜 시인의 〈손금 보는 밤〉을 들으며 개인적으로 궁금증이 인다.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과학자들도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손금이나 사주 같은 것을 볼까 하는 것이다. 어디선가 들은 얘기로는 미신을 믿는 사람들 중에 많은 숫자가 지식인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간들이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 궁금해하고 불안해하는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을 아는 일이 가장 어렵고, 자신을 이기는 일이 가장 힘든 일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시인들이 시를 쓰는 일도 자신을 알고 세계를 알기 위해서다. 따라서 이 세계나 우주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가장 몸부림치는 자들이 어쩌면 창조적인 일에 몰두하는 과학자나 예술가들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이들은 필연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 ‘운명’이라는 단어로 두루뭉술하게 규정짓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알고 싶다는 호기심 때문에 일반인들보다 더 모순적인 행동을 할 때가 있다. 어쨌거나 인간은 자신의 미래만큼은 몰라야 한다. 그래야만 흘러가는 “물길 어디쯤에서 아직 합수하지 못한/ 그 누구를 만나기도” 할 거라는 꿈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음은 여섯 번째로 미아역에 살고 있는 한소운 시인이 자작시 〈빈 배〉를 낭송했다.
여기, 꼭 여기 어디쯤 빈 배가 닻도 없이 쇠줄에 묶여 반은 뭍에 또 절반은 강물에 의지해 척 걸쳐 있었는데 그 야심한 밤에 나는 왜 그 배를 찾아갔는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꼭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낡은 뱃머리를 찰방찰방 때리던 물결하며 마을 어귀서부터 개가 짖으면 온 동네개가 다 따라 짖던 것과, 컹컹 소리에 곤히 잠든 풀잎이 사분사분 일어나 서로를 껴안던 거며 쪽밭에 배추며 쪽파며 가을무우가 푸른 달빛을 받아 더욱 푸르게 내 마음에 각인된 잊을 수 없었던 그날을, 그 빈 배는 아직도 기다림을 놓지 않고 있는데 아, 나는 흉흉하게도 한동안 잊고 살았다 하냥 그리울 그 시간들을, 늘 그러했듯 길도 아닌 것이 나를 이끌었다 이제 그만 놓아 주어야겠다 나를 묶고 있던 쇠줄을 ― 한소운 〈빈 배〉 전문
차분한 목소리로 자분자분 들려주는 시가 참 예쁜 느낌을 준다. 바다를 끼고 있는 시골마을의 밤 풍경 속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시인은 그리움을 좇아 자주 과거의 시간 속으로의 여행을 즐기는 듯싶다. 그러나 과거는 길이 아니며 과거에 붙들려 살다 보면 미래가 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듯하다. 그래서 시인은 지금까지 “길도 아닌 것이 나를 이끌었다”며 “이제 그만 놓아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있어서 과거를 비워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인가. 자신의 미래를 알기 힘든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며, 심장이 멎기 전에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특히 그리움을 담고 있는 과거라면 더욱 그러리라. 어쨌든 자신을 묶고 있는 과거를 쉬이 끊어내지 못하고 그리움과 갈등하는 시인의 모습이 참 예쁘게 생각되는 시다.
다음은 일곱 번째로 길음역 이은봉 시인이 자작시 〈가을 잎새들〉을 낭송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한영옥 교수가 강연하는 도중에 숨찬 모습으로 들어왔던 터라,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오늘은 행사가 너무 많은 날이네요. 그래서 대산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하고 오느라 좀 늦었습니다……”라며 인사를 했다. 작가회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어 가야 할 데도 많을 것이다. 시낭독회 구성원으로 참석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앞선다.
부는 바람에 떨어져/ 아스팔트 위 나뒹굴고 있는 플라타너스 잎새들 보아라/ 플라타너스 찢어진 잎새들 속에는/ 이 골목 선화미장원 우유 아줌마의/ 서러운 휘파람 소리 들어 있다/ 마음까지 칙칙하게 물든 채/ 손 흔들며 떨어지고 있는/ 골목 옆 흙바닥 위 나뒹굴고 있는 감나무 잎새들 보아라/ 감나무 찢어진 낙엽들 속에는/ 이 골목 혼자 사는 중늙은이 세탁소 김씨의/ 아픈 기침소리 들어 있다/ 그럼 너는 어떠니? 자동차도 없이/ 터벅터벅 걸어 퇴근하는 네 마음은?/ 뭐라고? 시궁창 속으로 떨어져/푹 썩고 있는 은행알의 마음이라고?/ 뭐라고? 실업(失業)으로 끓어 넘치는 이 세상에/ 아직은 직장이 있어 아프지 않다고?/ 음음 그래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니? 생각해보면 네 마음도 부는 바람에 떨어져/ 차츰 흙이 되어가고 있는 낙엽이겠지/ 그럴수록 더욱 보아라 저기 저 가을 잎새들 속에는/ 아플 때마다 네가 줄곧 속으로 외워온/ 관세음보살이 들어 있다/ 나무아미타불이 들어 있다/ 너 혼자 몰래 키워온 오랜 다짐이 들어 있다. ―이은봉 〈가을 잎새들〉 전문
이은봉 시인은 바닥에 나뒹구는 〈가을 잎새들〉이라는 시를 통해 아픈 이웃들과 자신에 대한 애잔한 마음을 들려준다.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시인이 또 다른 자아를 향해 자문자답하는 구절이다. “그럼 너는 어떠니?/……/ 시궁창 속으로 떨어져 푹 썩고 있는 은행알의 마음이라고?/ 뭐라고? 실업으로 끓어 넘치는 이 세상에/ 아직은 직장이 있어 아프지 않다고? /그래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니?”라며 자신도 아픈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삶은 다 아픈 것이라고 규정하며, 삶의 존재들에 대해 측은함을 전한다. 그런데 이 시를 들으면서 더욱 재미있게 생각되는 것은 이은봉 시인이 어느새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을 찾을 만큼 믿음이 강한 불교 신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분명 오래도록 《불교문예》와 인연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미소를 띠게 한다. 여덟 번째 순서로는 이은봉 시인과 가까이 살면서 서로 각별한 사이로 느껴지는 이명수 시인의 차례다. 이명수 시인은 마이크를 잡자, “내가 오래도록 제주도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오늘 이 시낭독회 때문에 일부러 올라왔어요. 참석 안 하면 4호선 모임에 안 끼워줄 것 같아서 말입니다.”라는 말로 좌중을 웃기면서 낭송을 시작했다.
아프다/ 뽑고, 때우고, 갈고, 씌우고/ 얼굴 가리고 눈 감아도/ 은행잎 노랗게 눈앞에 지고 있다// 성 아래 베들레헴 어린이집/ 아이들 셋이 걸어온다/ 여섯 살 솔비는/ 주민번호를 몰라 치료도 못 받고/ 돌아가며/ 벌레 먹은 이를 가리고 웃어보인다// 성북동 성 너머 솔비의 뒤가 저녁빛이다/ 죄도 없이 눈만 큰 아이/ 참 아프겠다// 가을엔/ 벌레 먹은 사과도 버리지 말라 했다 ―이명수 〈솔비―아이들〉 전문
고아처럼 생각되는 ‘솔비’라는 아이의 아픈 삶을 시인이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솔비’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특히 “가을엔/ 벌레 먹은 사과도 버리지 말라 했다”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 긴 여운을 남긴다. 폭염과 비바람에 맞서며 고통을 견딘 것들의 삶을 외면하지 말고 이 사회가 아니 우리가 먼저 소중하게 보듬어주자고 외치는 소리로 들리는 듯해서다. 평소 이명수 시인의 푸근한 마음이 잘 전달되고 있어 좋았다.
다음 아홉 번째 순서는 일산에 살고 있는 조정 시인이 〈초충도(草蟲圖)〉를 낭송하기 위해 무대 앞으로 나왔다. “저는 4호선 역과는 상관없는 일산에 살고 있지만, 사패산터널이 뚫리는 바람에 4호선과 연결이 쉬워서 저를 불러주신 듯합니다.”라고 인사를 해서 좌중을 웃겼다.
사내 둘 앉아 만취 중인 점방은/ 쥔마누라가 들어가 나올 생각 안 하는 휴대전화보다 조금 컸다 // 가까스로 칫솔 하나 사들고 걷는데/ 벼 베인 무논에/ 백로 두 마리 목이 불룩하다가 고상해졌다// 분홍 하양 코스모스 몇 포기 뒤에 망개가 익고 산국이거나 들국이거나 돌배나무거나/ 무차별 찬란했다/ 앞서 가는 자전거에 깔려 굵은 지렁이가 동강났으나/ 그 뿐,// 산성은 뒷덜미에 남쪽을 거느린 채 속수무책 문만 남아 서있었으나/ 그 또한,// 전하, 간첩 1명 침투지라 쓰인 철조망 멀리 민둥산 또한 전하의 백성이시오/ 이편이라야 잡초 무성하고 각시거미도 겨우 제 밥벌이 할 그물이나 치고 있나이다// 높이 집지을 수 없는/ 구절초 더미 몇몇/ 부러져 잘 낫지 않는 줄기에 볕을 쬐고 있었다// 어제 기어가던 개미 떼 기어가고 무위무위 내일 기어갈 개미 떼 기어가고/ 사이에 끼어 마음이 잘록해졌다// 칫솔을 사왔으므로 이를 닦았다/ 초록 타일 벽이 만나는 모서리에 암컷 지네가, 변기 밑에 수컷 지네가/ 숨을 죽였다// 일시에 파들거리는 만 개 발을 콕 쪼아 삼켜버렸다/ 나는 닭이다 ―조정 〈 草蟲圖〉 전문
조정 시인의 〈초충도〉는 앞서 낭송한 시인들의 시와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다. 표층적으로는 서정성을 띠고 있으나 심층적으로는 강한 정치이념을 깔고 있는 시라는 판단이 들어서다. 얼핏 풍자성이 강한 조선시대 김홍도의 그림이 연상되기도 한다. 특히 풀과 벌레, 닭이라는 삼각구도가 재미있다. 이들의 상징이 뚜렷해서 시의 이해가 어렵지 않으며 마지막 구절이 인상적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해충이라고 생각되는 지네를 속 시원하게 해치워버리는 닭의 존재가 다름 아닌 화자, 곧 시인이라고 악센트를 강하게 한 점이 웃음을 머금게 한다. 한편 시인의 공격성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느 시대에 이런 힘 있는 시인이 나타나서 부조리한 세상을 바로 잡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세상을 만들겠나 싶다. 시인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시 속에서나마 이뤄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에는 열 번째 순서로 돈암역에 사는 홍일표 시인이 나와서 〈숟가락과 삽〉을 낭송했다.
나는 한 생애를 숟가락질로 탕진하였다/ 내 속의 허공을 메우기 위해/ 아침, 점심, 저녁/ 그것도 모자라 수시로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이때껏 작은 고랑 하나도 메우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다/ 여전히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왼손 오른손 다 동원해도/ 나는 텅텅 울리는 커다란 독이다/ 채워지지 않는 슬픈 욕망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금속성의 연장은 자란다/ 조금씩 키가 커지고/ 쓰면 쓸수록 욕망의 몸집도 불어난다/ 기진하여 더 이상 생의 도구를 들 수 없을 때/ 숟가락은 슬슬 떠날 채비를 한다/ 작고 날렵했던 한 시절을 청산하고/ 평생 섬겼던 주인을 위해 마지막 봉사를 한다/ 밥 대신 붉은 땅을 파내어 잠자리를 마련하고/ 주인과 더불어 고단한 생을 마감한다/ 고분에서 출토된 청동 숟가락이/ 터무니없이, 크고 많이 야윈 까닭이다 ―홍일표 〈숟가락과 삽〉 전문
홍일표 시인의 이 시는 숟가락이 자라서 삽이 된다는 관계성이 절묘하게 생각된다. 숟가락질이 늘어갈수록 인간의 욕망은 더욱 커져서 작은 숟가락으로는 메울 수 없을 만큼 되고, 끝내 인간이 지쳐 “생의 도구를 들 수 없을 때” 삽이 인간의 무덤을 파게 된다는 시적 논리가 재미있게 와 닿는 시다. 이렇듯 적확한 이미지를 찾아내는 일이 시의 생명이며 감동이다. 가끔 홍일표 시인의 시를 접하다 이런 감동을 먹을 때가 많다. 다음은 열한 번째로 김영찬 시인 차례가 되었다. 시낭송이 열 번째를 넘기면서부터 분위기가 지루하고 경직되어 있는 느낌이 든다. 이쯤에서는 약간의 파격이 필요하다. 그래서 필자가, 4호선이 이탈을 해서 강남으로 와버렸다고 너스레를 떨며 김영찬 시인을 소개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사실상 그렇게 된 셈이다.
두 대의 피아노와 한 마리 당나귀가 있다// 당나귀는 귀가 너무 커서 타악기소리를 싫어한다*/ 그러나 과도하지 않게/ 언제나 피아노 건반 위를 뚜벅뚜벅 걷는, 걸어가면서/ 산책 중 명상에 잠기는/ 습관이 있다// 당나귀 발굽을 닮은 내 손바닥엔 두 대의 피아노/ ――한 대는 피아니시모/ ――또 한 대는 피아노포르테/ 흰 포말 부서지는 해안에서 안단테와 비바체/ 그리고/ 하얀 건반을 두드리고 지나가는 광풍들// 해안선 저쪽에는/ 반라의 연인들을 그늘에 숨기는 검은 건반의 숲도 있다// 두 대의 피아노와 한 마리 당나귀라고 나는 썼지,/ 그랬지/ 두 대의 당나귀와 한 마리 피아노라고// 고쳐 적으련다/ 한 마리의 검은 피아노가 두 대의 당나귀 갈기와/ 말총꼬리를 붙잡고 속도를 내겠지// 그러면 고리타분하기로 소문난 저 지구의 한 쪽 모서리가/ 발굽 닳아서/ 일상이 기우뚱 기울겠지// 그러므로 과도하지 않게 ‘알레그로 마 농 트로포’로 가자고/ 당나귀 귀에 대고 속삭여야겠다/ 사랑은 allegro man non troppo**, 라고 피아노가/ 알아차릴 때까지
*당나귀는 귀가 너무 커서 타악기소리를 싫어한다* : 어떤 시인의 시구에서 읽은 듯. **알레그로 마 농 트로포(allegro man non troppo): ‘빠르게 그러나 과도 하지 않게’ ―김영찬 〈두 대의 피아노와 당나귀〉 전문
김영찬 시인은 무대 앞으로 걸어 나오면서부터 자작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강연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 낭송을 하다말고 다시 일어나며 관중석 탁자를 쭉 밀어 좌중을 놀라게 했다. 평소 즉석 퍼포먼스를 즐기는 김영찬 시인의 그런 모습을 은근히 기대하며 예상했었다.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자유롭게 낭송하는 걸 좋아하는 시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엔 모두 당황하고 놀란 표정들을 지었지만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시인의 기본 정서라는 것이 본래 경직된 상황을 싫어하고 체제에 불온하며 진부한 것을 못 견뎌 이탈을 꿈꾸는 마음들이 아니겠는가. 시인이 낭송한, 청각적 이미지가 돋보이고 역동적인 느낌이 강하다고 생각되는 낭송시도 비교적 발상과 논리적 사유가 자유로운 시로 생각된다. 〈두 대의 당나귀와 한 마리 피아노〉의 모순적인 언술을 통해 “고리타분하기로 소문난 저 지구의 한쪽 모서리가/ 발굽 닳아서/ 일상이 기우뚱 기울겠지”라는 불온성을 드러낸다. 모순어법을 사용하여 원칙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가 잘 전해지는 시다. 그러나 이탈에서 다시 이탈을 시도하지 않으면 그 역시 ‘고리타분한 일상’이 되고 만다. 그러기 전에 다시 변화를 주는 일이 필요하다. 다시 4호선으로 되돌아와서 인천에 살고 있는 조정인 시인을 만나보기로 했다. 마이크 앞에 선 시인은 “이곳까지 두 시간이나 걸려서 힘들게 왔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자신의 상여를 메고 극지를 향해 걸음을 떼었을 묵묵한 행군/ 생과 몰의 연대가 그 얼굴에 동시에 머뭇대는, 광대뼈가 나오고/ 빛깔이 누런 인종, 바다에 유실된 주검들은 지금/ 시간이 내뱉은 방향 어디로든 새 거처를 배치 받았을 것이다// 없는, 함선들이 얼크러져 난장이다 없는, 소금가마니/ 없는, 놋쇠제기와 흰 옷가지가 솟구치다 가라앉는 차마 잠잠한/ 저 바다는 살아서 숨 쉬는 상처, 육질의 신음// 없는 함선, 선미 쪽 흘수선이 말을 더듬는다 내게는 당신이 모르는/ 옛일이 있다 머리칼을 풀고 수세기 해안을 배회하는 바람의 거친 듯 뜨거운/ 눈빛이 두려워 당신 옷소매를 거머쥐었다 천 년 전, 우리는/ 바위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살았다 그물을 깁는 당신께/ 모시잎사귀에 싼 보리떡을 내왔다 소쿠리엔 구운 생선이 두 마리/ 머루랑 다래……, 해풍은 당신 검은 머리칼을 희롱하다 그늘진 소쿠리를/ 들여다보았다 바닷가 외딴집 소소한 내력을 간섭했다/ 저녁 어스름이 기어든 외딴집은 말을 더듬거나 멈칫거리며/ 손을 입에 가져가 흘러내릴 듯 낮게 웃고는 했다// 그해 나라에는 전란이 있었고 물길을 헤쳐 당신은 먼 길을 떠났다/ 작은 짐승이 잠든 것 같은 바위섬을 향해 내게는 아직도/ 불어 끄지 못한 등경이 있다 그날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있다/ 우리는 얼마나 먼 데서 흘러온 시간들일까? 곁에 있으나/ 닿을 수 없는 ―조정인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전문
필자가 조정인 시인에 대해 잘 모르지만 좋아하게 된 계기는 그녀의 두 번째 시집 《장미의 내용》을 읽고서였다. 시가 좋다고 생각될 뿐만 아니라 시 편편이 심혈을 기울여 쓴 흔적이 진하게 묻어나는 시집이라 생각했다. 또한 삶에 있어서도 데면데면 살 것 같지 않은 진지함에 이끌렸다. 이런 점이 독자로서 수용적 오류가 될 수도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이 낭송시를 보더라도 과거를 참 아프게 끌어안고 사는 시인이라 여겨진다. “잠잠한/ 저 바다는 살아서 숨 쉬는 상처, 육질의 신음” 같은 언술은 절창이다. 이는 쉽게 얻어지는 어떤 것들이 아닐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붙들고 앓았든 시를 붙들고 앓았든, 깊게 앓고 난 후에 얻어진 것이리라. 이번에는 자신의 시낭송 순번을 놓친 채 뒤늦게 느린 걸음으로 들어서는 이인철 시인을 불러 세워 자작시 〈순창고추장〉을 낭송하게 했다.
이슬을 닦고 장독뚜껑 열면/ 곰삭고 있는/ 해/ 하나// 저렇게 붉으면/ 저렇게 뜨거우면/ 사랑처럼 단내가 풍풍 나는구나/ 강천산 단풍보다 더 싱싱한 색이 돋는구나// 섬진강 한 굽이의 샘물냄새/ 물씬/ 물씬/ 솟구쳐 오르고/ 양푼에 곰삭은 해 한 수저 떠넣고/ 붉은 밥을 비비면/ 칼칼한 입맛/ 고추씨 같은 별빛과/ 왕대나무숲 붐비는 바람 소리/ 담 넘어 우리를 부르는 어머니의 가는 손/ 들린다// 뜨거웠던 시절에/ 은어 떼처럼 되돌아오는 ―이인철 〈순창고추장〉 전문
고추장 장독을 위에서 들여다보면 영락없는 해의 그림이다. 그 절묘한 비유가 좋을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을 그립게 만드는 디테일한 시적 정황들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그리고 기성세대들은 된장과 고추장이라는 말만 들어도 고향과 어머니를 떠올리게 된다. 단지 전통을 이어오는 모태식품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김치 같은 발효식품과는 달리, 해를 묵고 또 묵어도 변하지 않는 그 맛 때문이 아닐까. 이인철 시인의 낭송시를 들으며 어머니가 계시는 어린 시절의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 든다. 나이만큼 멀어진 탓에 오랜만에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떠올려본 순간이었다. 서정시의 주된 힘이라면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 속에서 잃어버린 어떤 소중한 것을 찾아 나서게 하는 그런 것. 그래서 다시 순수해지는 그런 마음을 느껴보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 열네 번째 순서로 4호선 안산역을 종점으로 할 차례다. 임희구 시인이 자작시 〈김씨〉를 낭송했다.
쌀을 씻어 안치는데 어머니가 안 보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어머니가 계실 것이다/ 나는, 김씨! 하고 부른다/ 사람들이 들으면 저런 싸가지 할 것이다/ 화장실에서 어머니가/ 어!/ 하신다/ 나는 빤히 알면서/ 뭐해?/ 하고 묻는다/ 어머니가/ 어, 그냥 앉아 있어 왜?/ 하신다/ 나는/ 그냥 불러봤어/ 하고는/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인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똥을 누려고/ 지금 변기 위에 앉아계시는 어머니는/ 나이가 여든다섯이다/ 나는 어머니보다 마흔한 살이 어리다/ 어려도/ 어머니와 아들 사인데 사십 년 정도는 친구 아닌가/ 밥이 끓는다/ 엄마, 오늘 남대문시장 갈까?/ 왜?/ 그냥// 엄마가 임마 같다 ―임희구 〈김씨〉 전문
시가 낭송되는 동안 좌중에서 쿡쿡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시인의 일상이 재미있게 그려진다. 모자지간에 단둘이 의지하며 오래 살다 보니 때로는 어머니였다가 때로는 친구처럼 편하고 이상적인 관계가 된 듯싶다. 언젠가 임희구 시인이 ‘어머니가 연세가 많아지면서 자신에게 어리광을 부린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시인은 싱글인 채로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효자다. 결혼한 형들이 많아도 어머니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 굳이 자신이 모시고 산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걸레와 찬밥이라는 웹진 동아리를 만들어 수년 동안 매달 독거노인들을 돕고 있다. 한마디로 떠벌리지 않으면서 시를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다. 또한 자신과 이념적 성향이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경우도 본 적이 없다. 임희구 시인이야말로 심성이 착하고, 시와 시인이 일치하는 사람이라 해도 과장이 아닌 사람이다. 우리 문단에 이런 시인이 더욱 많아졌으면 싶다. 임희구 시인의 시낭송을 마지막으로 열네 명 시인의 시낭송을 모두 마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여운을 즐기며 서로 친분을 다지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특별히 서안나 시인이 테킬라를 가지고 와서 분위기를 한층 돋우며, 신원철 시인의 노래와 바이브레이션이 강한 김화순 시인의 노랫소리를 번갈아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다.
정리 / 문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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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시인 강연 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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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시들 사이에 차이는 없다” ―한영옥
주체의 죽음은 인류가 전무후무한 야만의 밤을 겪은 후 지독한 치욕과 무력감에 떨며 내렸던 자기진단, 극약처방이며 숭고한, 자기부정이었다. 하지만 부정된 주체는 완전히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기억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홍준기의 《라캉과 현대철학》에서 위의 글은 데카르트의 이성적 주체의 확신 이후, 한없이 오만해진 근대적 주체를 향하여 그간의 이론들이 질타해 온 바의 ‘주체의 소멸’과 관련한 목소리들을 한꺼번에 떠오르게 한다. 실상은 주체의 죽음이나 소멸이 아닌 주체의 키와 부피를 줄이려는 일단의 작업들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으니 세상 것들 모두 인연의 존재일 뿐 자성이 없다는 불경의 가르침처럼 주체는 스스로 솟는 자율적 실체가 아니었다. 다만 이러저러한 여건 속에서 주어지는 하나의 생성, 혹은 효과, 심지어는 문화관습으로서의 아비투스(habitus)에 불과하다는 서양의 말들을 우리는 20세기 중반 이후 내내 들어왔을 것이다. 이 말들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성을 만능의 도구로 휘두르며 지휘해온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는, 아니 오히려 야만스럽기 그지없었다는 반성과 함께 무한질주해 온 근대적 패러다임에 제동을 제대로 걸어주었음에 틀림없다. 돌이켜 볼 때 타자를 자신 앞에 불러 세워 예속시키며 동일화를 시도하는 단세포적 주체의 욕망이 저지른 만행에 대하여 비판적 칼날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숭고한 자기 부정’이었으며 천만다행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에 연계하여 동일화의 열망을 펼쳐 놓는,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로 유지되는 서정시가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는 것은 큰 문제다. 동일화의 메커니즘으로 유지되는 은유에 대한 비판 역시 이에 준하면서 그간 서정시는 호된 비판의 목소리를 받아내야만 했다. 한 평론가가 단호하게 “사회적 근대성과 상동관계를 이루는 미학적 이데올로기”라고 언명하면서 서정시를 폄하했던 문맥이 귀에 생생하다. 시에서의 동일화 지향성은 해명이 필요하다. 서정시가 단일한 주체의 목소리를 유지하면서 텍스트의 패턴을 유기적으로 엮어가는 것은 장르상의 오랜 특성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주체는 대상을 닦달하여 자신 앞에 불러 세우고 자신과 같아질 것을 명하는 동일자, 파시스트로서의 억압적 자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대상 앞에 자신을 복속시킴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힘겹게 확보하는 그런 낮춤으로서의 주체일 뿐이다.
후기구조주의 혹은 해체주의 이론들이 파헤쳐 내려간 대로 이제 주체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인식체계를 담지하는 그런 이성의 주인이 아니다. 각 여건의 장마다 새롭게 배치되어 복수화되는 그런 불안정한 위치점일 뿐이다. 파 내려가 보면 사실상 주체는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잉여와 반복에 이끌리며 어딘가를 가로지르며 질주하는 작동된 기계와 같다. 기존의 서정시가 넘쳐흐르는 잉여와 반복을 덜어내고 최선의 마스크를 씌워 질서화시킨 주체를 무대 위에 세우는 데 비하여 일군의 젊은 시인들은 이 마스크 자체를 거부하며 내면의 실제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이들 텍스트 속에서의 주체는 흘러가며 어떤 지점마다 낯설게 변환되며 복수화된다. 그러자니 하나의 목소리만으로 시편이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극사실적으로 인간의 내면을 탐사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그간의 상징적, 문화적 체계로부터 양육당한 우리에게 있어 정작 벗겨진 우리 자신이 그토록 낯설어 보이는 것이리라. 한 편의 시에서 누가 이렇게 혼란스럽게 발언하는가. 그때그때마다 말하는 각기 다른 주체의 목소리가 다성적으로 퍼지는 것이라 답할 수 있겠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동안의 서정시와 변별되며 일군의 시들은 특히 기성세대들에게 있어 소통 부재의 언어더미로 인식되곤 하였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들은 이제 세대 간의 칸막이를 치우고 서로의 발화 방식에 귀 기울이며 다만 한 편의 시가 길어 올리려는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강도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데서 펼쳐진 것이다. 이제 그간의 서정시들이 보여준 세계와 새로운 극사실적(?) 시들이 보여주는 세계는 다 함께 우리의 유한한 존재성을 승화시키려는 데서 비롯된 것임을 환기하고 싶다.
시대를 불문하고 진정한 시의 위대성은 시를 이끌어 가는 주체가 언제나 타자를 끌어안으며 타자를 통해 자기를 정립하는 그 겸손함을 결행해왔다는 데 있다. 너를 끌어안는 나의 몸짓이 가장 순수하게 형상화되는 공간이 바로 이곳이었음을 시 이래의 시들은 끊임없이 증명해오지 않았는가. ‘주체의 소멸’을 내세우며 요란하게 반성하기 이전부터 정작 시는 그 스스로 낮은 것으로서의 주체를 이미 그 안에 위치시켜 왔다. 결국 시 장르는 근대성의 타자로 근대 이전부터 지금까지 존속하는 불멸의 존재임을 깨닫는다면 발화의 차이를 문제 삼기보다는 각 발화의 방식에 따른 저간의 사정에 귀 기울이는 일이 요긴하다. 그리하여 이 모두가 이룰 수 없는 것을 향한 지고지순한 몸부림일 뿐이라는 끄덕거림이 서로 간에 필요하지 않을까.
한영옥 1950년 서울 출생. 성신여대 국문과,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안개편지》 《비천한 빠름이여》 《아늑한 얼굴》 《다시 하얗게》 외. 저서 《한국 여성시의 이해와 감상》(공저), 《한국현대시의 의식 탐구》 《한국현대시의 場》 외. 한국예술비평가협회상, 천상병시상, 최계락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 수상. 현재 성신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