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융의 세계 |
|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85) |
숟가락 무게를 달다
배정숙
우리의 심장은 둥글고 소박하지만 한 생이 통째로 매달려도 끄떡하지 않는 힘도 가졌으며 본심과 달리 매운맛이나 쓴맛을 보여줄 때도 있습니다
우리와의 관계에서 우연이란 없으며 우리의 노예가 되는 사람에겐 명징한 족쇄가 되고 주인이 될 때 꽃이 됩니다 그러나 가장 객관적인 이력을 좋아합니다
태어나 우리를 잡는 법을 배울 때 맹종도 따라 배우게 되는데 드물게는 저를 거부하는 자가 시위의 도구로 삼기도 합니다 인간은 우리 앞에서 숙연하고 겸손하게 눈금을 읽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저를 놓고 신기루 같은 착시현상에 무너지기도 하고 좀생이처럼 타협하는 세상 이야기를 저녁 상머리에서 주워듣곤 하여 제 귀는 아주 밝답니다
하지만 제가 제일 듣기 좋은 말은 우리를 하나 더 놓는다고 하는 것인데 이 말이 우리의 피돌기를 따듯하게 합니다 보리죽뿐인 소반 위에 할머니꺼 삼촌꺼 먼촌 고모뻘까지 우리가 놓이던 그때가 그리운 이유입니다
우리는 밥그릇과 화친하는 관계인데요 사람들은 밥그릇을 가지고 싸움을 하지만 우리들 앞에서는 흉악한 이도 높은 분도 둥글게 입을 엽니다
이승을 떠난 삶의 오랜 진술도 저를 닮은 부드러운 곡선입니다
# 배정숙 시인은 갓 등단한 신인이지만 사유의 완력과 유연한 상상의 보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텍스트를 발굴하기보다는 기존의 텍스트만을 습관적으로 되풀이하는 평론가들에게는 쉽게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만만치 않은 시의 에너지와 흡입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섬세한 감식안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허명에 좌우되어 작품을 보지 않습니다. 지명도 있는 시인들의 작품이라고 무조건 다 좋을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이 시의 화자는 숟가락입니다. 숟가락은 평생을 써도 ‘끄떡하지 않는 힘’을 가졌고, 인생처럼 삶의 과정에서 ‘매운맛이나 쓴맛’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2연에서는 숟가락과 인간의 관계를 말합니다. 숟가락의 노예가 된 자와 주인이 된 자로 구분하여 ‘족쇄’와 ‘꽃’이라는 중층의 의미를 도출합니다. 숟가락에 대한 접근 방식은 곧 인생에 대한 태도를 암유적으로 드러낸 것이지요. 생의 도구는 ‘족쇄’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는 ‘꽃’이 되기도 합니다. 니체가 말한 낙타와 사자의 존재 양식으로 비교할 수도 있습니다.
3연에서 말하는 ‘맹종’과 ‘거부’의 삶이 이와 상통합니다. 여기서 ‘거부’는 숟가락을 ‘시위의 도구’로 사용할 때 나타나는 삶의 방식으로 곧 단식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화자는 ‘숙연하고 겸손하게 눈금을 읽어야 하는 부분’을 말합니다. 생에 대한 외경을 역설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생명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넌지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좀생이처럼 타협하는 세상 이야기를 저녁 상머리에서 주워듣곤 하여 제 귀는 아주 밝답니다’에 이르면 시인의 언어 감각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귀 밝은 숟가락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것은 ‘우리를 하나 더 놓는다’입니다. 그 때 숟가락은 ‘피돌기’로 따듯해지고, 그윽한 원융의 세계가 구현되는 것이지요. 각박한 현실에 온기가 흐르게 하는 아름다운 말이 그리운 이유입니다.
밥그릇 싸움을 일삼는 세상 사람들도 숟가락 앞에서는 모두 입을 열고, ‘이승을 떠난 삶의 오랜 진술도 저를 닮은 부드러운 곡선’임을 깨닫게 됩니다. ‘부드러운 곡선’이야말로 화자가 추구하는 삶의 궁극적 실체이며 모든 것을 끌어안고 용서와 관용으로 나아가는 포월의 길입니다.
「숟가락 무게를 달다」는 숟가락이라는 익숙한 사물을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존재의 근원을 곰곰 되짚어보게 하는 따듯한 시입니다. 존재의 심층에서 발견한 순금의 광맥이 봄의 초입에서 조용히 빛을 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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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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