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圓形)과 원형(原型)
─『진경산수(眞景山水)』(서정시학, 2011)
성선경
팔십 년대 한 그림전시회에서 “어떤 사건이 지나간 숲” 이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숲은 온통 베어지고 그루터기만 남은 숲을 그린 작품이었다. 잎과 가지와 줄기는 모두 사라지고 나이테를 드러낸 그루터기만 남은 숲이었다. 나이테를 드러낸 그루터기들이 산모롱이를 돌아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림을 보고 ‘숲, 그 이후’라는 시(詩)를 썼다.
어떤 사건이 있었다
세상이 온통 어수선해졌다
찌그러지고 쭈그러진 기억들이
부서진 가재도구처럼 뒹굴고 있었다
발자국들만 윙윙거리며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 그 슬픈 사나이 예수처럼 눈물을 흘리며
산모롱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동그랗게 놀안 나이테들이 질겁하고 있었다
갈잎, 톱밥, 무너지는 산
어떤 사건이 지나갔다
다만 그뿐이었다.
―「숲, 그 이후」 전문
그 질겁할 상황에서도 그림 속의 그루터기들은 나이테를 동그랗게 말고 웅크리고 있었다.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이테는 나무의 기억이다. 나무가 살아오면서 받은 햇살과 바람과 비의 기억을 DNA처럼 기억하고 있다. 씨앗과 흙과 날씨와 온도의 기억들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
원형(原型)이란 문학과 사상 전반에 보편적인 개념이나 상황으로 여겨질 만큼 자주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근본적인 상징·성격·유형을 가리키는 문학평론 용어이다. 문학평론가들은 ‘집단 무의식’이론을 체계화한 심리학자 ‘카를 융’의 저서에서 이 용어를 차용했다. 융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다양한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유전 암호가 되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논리 이전의 사고에 기원을 둔 이 원초적인 심상(心象) 유형과 상황은 독자와 저자에게 놀랄 만큼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동그란 나이테는 나무의 기억 원형이다. 이 원형은 나무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의 모든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이는 사람살이의 기억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다양한 경험들은 유전 암호가 되어 기억되고 반복되어 나타난다. 시의 원형도 나무의 나이테와 같은 것이다. 나는 이러한 원형이 시로 나타난다고 본다.
자식이라는 게
젖을 때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새끼라는 게 제 발로 걸어
집을 나가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시도 때도 없이
―아버지 돈
그래서 돈만 부쳐주면 다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글쎄
어느 날 훌쩍 아내가 집을 나서며
―저기 미역국 끓여 놓았어요
―나 아들에게 갔다 오겠어요
나는 괜히 눈물이 났다
이제는 내 아내까지 넘보다니
―이노무 자슥.
―「진경산수(眞景山水) 2」 전문
진경산수(眞景山水)는 조선 시대 후기에 화원(畵員) 사회에서 일어난 새로운 화풍이다.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화법 같은 외래적인 영향에서 이탈하여 명실상부한 한국의 회화를 지향한 첫 예로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진경산수는 종래 화가들의 화첩(畵帖)에 의한 상상적인 산수도를 벗어나 한국 땅의 풍치의 사생(寫生)에서 나온 산수화법을 의미한다. 어떤 특정한 실경(實景)을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구도에 구애됨이 없이 눈앞에 전개되는 무한대의 자연을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그 한 단면을 잘라 화면에 옮기는 방법이다.
이른바 진경(眞景)을 사생하는 방법을 시도한 대표적인 화가는 정선으로서 그는 직접 각지를 여행하며 그림의 소재를 채취하였는데 특히 금강산의 두드러진 산골(山骨)에 매혹돼 수직의 준을 창시하였다. 중국화에서 볼 수 없는 한국적인 송림(松林)도 자기 나름대로의 필치로 대담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안견은 관념의 공간 몽유도원을 실감나게 그렸고, 정선은 금강산의 실경을 그렸으며, 김홍도는 조선의 풍속을 그렸고, 신윤복은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그렸다.
할머니 오랜만에 닭 한 마리 잡는데 무슨 큰 황소나 한 마리 잡듯 분주한데 늦잠에서 갓 깬 나는 무슨 일인지 모르고 겁먹은 황소 눈알같이 두리번거리는데 키가 작은 할머니는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우물로 봄날 병아리같이 바빠 힐끗 잠시 나를 본 듯 얘야 모산할배 오시래라 광산할배 오시래라 모산할매도 오시래라 합산아지매도 오시래라 온 동네 노인들을 부르시는데 나도 동생들도 멋모르고 신이 나서 모산할배요 아침 자시로 우리집에 오시래요 아침 이른 골목을 뛰어다니는데 그새 할머니는 씨암탉 한 마리로 서말찌 가마솥 가득 닭국을 끓여서 척척 오시는 분마다 한 그릇씩 대접하시는데 어르신들께선 그 국물만 멀건 닭국 한 그릇 후딱 해치우시곤 그 참 대접 잘 받았다고들 수인사를 하시며 곰방대 한 대씩 물고 나오시는데 온 동네 어르신 다 나눠 먹고도 그 닭국은 한 그릇이 남았었는데 할머니는 어디서 구했을까 그렇게 큰 닭 한 마리
고향 집의 감나무
까치밥이 빨갛게 익어 갈 무렵이면
지금도 내 머리 속엔 씨암탉 한 마리
구구 구구 구구구 돌아다니는데
이리 온 이리 온 종종걸음에
아주 키가 작았던 할머니.
―「씨암탉 한 마리」 전문
나는 사람살이의 원형을 그리고자 했다. 이것이야말로 진경(眞景)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진경(眞景)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진경은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다. 조선 성리학(性理學)에서는 자연을 도(道)가 구현된 완전한 세계로 보고, 자연을 사랑하는 것은 도(道)와 가까워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사람살이의 모습도 자연의 하나이며 이것이야말로 진경이 아니겠는가.
─『시에』 (2012. 봄)
성선경
경남 창녕 출생.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모란으로 가는 길』, 『몽유도원을 사다』, 『서른 살의 박봉씨』, 『널뛰는 직녀에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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