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고진하 작품론] 자연 사물에서 복원하는 ‘신성한 것’ / 유성호

문근영 2014. 1. 6. 13:54

 

[작품론]자연 사물에서 복원하는 ‘신성한 것’ / 유성호
[48호] 2011년 01월 10일 (월) 유성호 문학평론가

1.

고진하 시인은 1953년 강원도 영월에서 출생하여, 1987년 《세계의 문학》에 〈빈들〉 〈농부 하느님〉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그는 등단 초기부터 지금까지 ‘성(聖)’과 ‘속(俗)’이 지상에서 벌이는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구체적 자연 사물에 대한 관찰과 묘사와 은유로 일관되게 표현해온 대표적 중견 시인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성’과 ‘속’ 어디에도 일방적으로 깃들이지 않고, 그것들의 통합과 균형을 지속적이고 균질적으로 추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지금까지 펴낸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민음사, 1990)과 《프란체스코의 새들》(문학과지성사, 1993), 《우주배꼽》(세계사, 1997), 《얼음수도원》(민음사, 2001), 《수탉》(민음사, 2005) 등 다섯 권의 시집에는, 이러한 통합과 균형에 대한 그의 남다른 의지가 일관된 미학적 심화 과정을 동반하면서 펼쳐져 있다. 그 세계를 단적으로 말하면, 세상에 편재해 있는 ‘신성(神聖)’을 만나고 발견하고 명명함으로써 지상의 사물과 질서들을 화해로운 시선으로 안아들이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연 사물에서 ‘신성한 것(the sacred)’을 복원함으로써 통합과 화해를 추구해 온 고진하 시편의 미학적 속성은, 최근작으로 올수록 더욱 활달하고 자유롭고 다양한 어법을 동반하면서 나타나게 된다. 이 글은 그의 초기시로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시적 사유와 방법이 전개되어 온 과정을 개관하고, 그에 따르는 고진하만의 시사적 의미와 가치를 준별해 보려고 한다.

 


2.

고진하는 자신의 둘도 없는 발생론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직종교로서의 ‘기독교’의 틀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는 개신교 사제이다. 말하자면 그는 획일적이고 정형적인 형식을 요구하는 ‘현실종교’의 울타리 안에 있지 않다. 또한 그가 쓰고 있는 시가 원초적으로 그러한 정형화된 틀을 깨는 것을 요청하는 만큼, 그는 자신의 언어를 통해 새로운 틀과 울타리를 짓는 역설의 사도(使徒)를 자임한다.

 

그런데 그가 짓는 울타리는 너무도 자유롭고 무애한 것이어서, 그가 다시 현실종교로서의 기독교로 귀속될 개연성은 점점 엷어져 간다. 그 ‘울타리’란, 첫 시집에서는 ‘골짜기’나 ‘빈들’로 나타났다가, 이후로는 ‘숲’으로, ‘나무’로 옮겨갔다가, 궁극적으로는 뭇 생명들을 안아들이는 너른 품으로 차츰차츰 번져가게 된다. 그의 첫 시집에는 그 활달하고도 자유롭고 무애한 ‘신성한 것’의 울타리가 구체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늦가을 바람에
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빈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빈들입니다
사람이 없는 빈들입니다
내일이 없는 빈들입니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들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은
―〈빈들〉 전문(《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사람도 시간도 모두 떠난 폐허뿐인 ‘빈들’에서, 충만함으로 편재하는 절대자의 숨결을 그가 읽고 있는 것은, ‘비어 있음’과 ‘가득 채우고 있음’을 한 몸으로 결합하는 그의 역설적 상상력의 결과일 것이다. 이 ‘빈들’은 구약성서 《에스겔》에 나오는 마른 뼈들이 널려 있는 골짜기를 연상시키는데, 화자는 거기에 우리 농촌 특유의 구체적 실감을 부여하면서 그 ‘빈들’을 우리 사회의 사실적 삽화로부터 인간의 보편적 실존의 풍경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의 시는 이렇게 타자의 고통들을 통해, 우주에 가득차 있는 새로운 신성과 마주치는 과정을 통해 시작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폐허가 된 농촌의 현실에서, 타자의 고통에 연대감을 가지면서 시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타자 지향의 연대감을 훌쩍 넘어, 신성이 자연 사물 속에 원형적으로 살아 있음을 노래하는 쪽으로 시를 정향(定向)함으로써, 신성과 깊이 결속하고 어우러지는 방법으로 나아가게 된다.

 

새벽 명상을 하다 문득 天上에선 듯 쟁쟁하게 울려오는
새소리를 들었다 가는귀먹은 늙은 하느님,
쿨쿨 코골며 새벽 단잠을 즐기는 젊은 것들이야 듣건 말건
청정한 새벽 숲속을 울리는
소쩍새, 뻐꾸기, 찌르레기 구슬픈 울음 소리…… 그 사이로
가끔씩 웬, 맑은 은방울 굴리는 새소리도 들렸다
(저 새소리가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 藥이……?)
(……)
아아, 그러나 나는
저 아시시의 聖者처럼 지상의 병든 새들을 불러
드넓은 가슴에 품어안지 못해도
내 얇은 귓바퀴에 소리의 화살이 되어 정겹게 날아드는
황홀한 새소리에 취해
어둡고 음울한 지렁이 울음 소리를 잠시 거둔
이 청정한 새벽 숲속
― 〈프란체스코의 새들〉 중에서(《프란체스코의 새들》)

 

화자가 신성을 만나는 것은 새벽의 명상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뚫고 쟁쟁하고 울려오는 천상의 ‘새소리’를 통해서이다. 청정한 새벽 숲속을 울리는 뭇 새들의 울음소리는 일면 구슬프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 약이 될 수 있는 치유력을 가진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처럼, 화자 자신은 지상의 병든 새들을 불러 품어안지 못한다. 다만 황홀한 새벽의 새소리에 도취한 채 청정한 숲속에서 울음과 치유의 역설적 과정을 명상하는 화자의 품은, 그 울음소리야말로 ‘신성한 것’의 원천이 되는 순간임을 포착해내는 견자(見者)로서의 시선을 넉넉히 보여준다. 이렇게 고진하 초기 시편은 비록 폐허가 되고, 비어 있고, 아픈 세상이지만, ‘신성한 것’을 불러 명명함으로써 치유의 가능성을 바라본 결실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에 나타난 한국 시의 예외적 장관(壯觀)이 아닐 수 없다.

 


3.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신앙 시편들이 종교적 관념이나 교의(dogma)를 확인하는 데 골몰하는 반면, 고진하 시편들은 구체적 생명의 세목들을 이른바 ‘일반 계시’의 차원까지 끌어올리면서, 인간조차 신성한 자연의 망(網) 속에서 자그마한 일부를 이루고 있을 뿐이라는 사유를 일관되게 들려주는 특성을 보인다.

 

그가 보여주는 이러한 생명 지향의 상상력과 거기에 ‘신성한 것’을 내재시키는 방법은, 그의 시편들로 하여금 근원적이고 불가해한 신성을 온전하게 탐구케 하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신성한 것’이 온갖 자연 사물 속에 편재해 있음을 감각적 구체성으로 경험케 한다. 그가 새롭게 만나고 해석하는 성스러움은 다음 시편에 잘 나타나 있다.

 

어제 말갛게 닦아놓은 항아리들을
어머니는 오늘도
닦고 또 닦으신다
지상의 어느 성소인들
저보다 깨끗할까
맑은 물이 뚝뚝 흐르는 행주를 쥔
주름투성이 손을
항아리에 얹고
세례를 베풀듯, 어머니는
어머니의 성소를 닦고 또 닦으신다
― 〈어머니의 성소(聖所)〉 중에서(《우주배꼽》)

 

노모의 손길은 신성이 발현하는 수원(水源)이자 신성이 귀일하는 통로이다. 가령 항아리를 닦고 또 닦으시는 어머니의 반복적인 동작은 그 자체로 성소를 지키는 종교적 제의(ritual)가 된다. 그렇게 말갛게 닦아놓은 항아리들은 지상의 어느 성소보다 깨끗한 ‘어머니의 성소’가 되고, 어머니의 주름진 손은 세례를 베푸는 사제의 손이 된다. 이처럼 시인은 공간적으로 격리되었던 구약의 지성소나 신약 이후의 교회보다 훨씬 넓고 자유롭고 무애한 신성의 거소(居所)를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시집에 오면 그러한 신성이 ‘라일락’의 자태로 나타나는 새삼스런 순간을 노래하고 있다.

 

돋을볕에 기대어 뾰족뾰족 연둣빛 잎들을 토해 내는
너의 자태가 수줍어 보인다.

무수히 돋는 잎새마다 킁, 킁, 코를 대보다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가졌다는
천수관음보살을 떠올렸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이 있어
천 개의 눈과 손마다
향낭(香囊)을
움켜쥐고 나와
천지를 그윽하게 물들이는
너의 공양을 따를 수 있으랴.
―〈라일락〉 전문(《얼음수도원》)

 

무수히 돋아나는 라일락 잎새들을 보면서 ‘천수관음보살’의 지극한 공양을 떠올리고 있는 시인의 상상은 지극히 통(通)종교적인 것이다. 그 공양의 결과는 물론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천지를 그윽하게 물들이는” 보다 넓은 것으로 나타난다. 순간 신성과 세속이 통하고,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눈/ 손/ 향낭’을 가진 라일락이 자신의 안쪽에 웅크리고 있던 신성을 발현한다.

 

이러한 시인의 사유와 시선은 한 떨기의 생명에서조차 ‘신성’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그의 시법(詩法)을 고스란히 심화한 것이다.

 

결국 고진하 시편에 등장하는 꽃이나 나무, 화석, 숲, 호수, 새는 이렇게 시인의 세련된 언어 감각에 의해 새로운 ‘신성’을 부여받는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그어져 있는 온갖 관념의 표지(標識)들을 부수고, 새롭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그 표지들을 넘나드는 고진하 시편의 상상력은 근작으로 올수록 더욱 근본화된다.

 


4.

최근작으로 올수록 고진하 시인은 온갖 자연 사물들이 신성의 현현이며 신성이 깃들이는 거처라는 믿음을 더욱 강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그는 그들과 함께 그들을 통해 그들 안에서 그들과 하나가 되어 세상과 화해하고 일치하려고 한다. 이는 굳이 종말론적 관점을 취한 결과가 아니라, 우리 삶 가운데 망각하기 쉬운 신성의 편재성에 대한 새삼스런 경험을 구체적 자연 표상으로 들려주려는 것이다. 그때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서 파동치는 ‘고요’와 ‘침묵’을 듣게 된다. 그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가 바로 이 소음과 번잡의 시대에서 당당하게 벗어날 수 있는 매혹적 원천이 된다.

 

일찍이 바슐라르(G. Bachelard)는 “우리가 향수를 느끼지 않고, 열렬하게 우리의 원초적 세계에서 살 수 있다면, 다시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얼마나 굳건할 것인가.”(《몽상의 시학》)라고 말한 바 있는데, 고진하가 꿈꾸고 형상화하는 순간이 바로 이러한 원초적 세계가 탈환되는 시적 순간일 것이다. 그 원초적 세계가 앞에서 들었던 새소리의 연장선이기라도 한 듯이, 다음 시편에서 울려 나온다.

 

새소리는 재잘재잘 들리는데
새들은 보이지 않는구나
마른 잎새들 간신히 매달고 있는 가시덤불
주자(奏者)의 얼굴은 감추고 생음악만 내보내는 가시덤불
가까이 다가서니 생음악은 뚝 그치고
귀가 민망해 돌아서니 다시 연주를 내보내는 가시덤불
(……)
너의 바탕도
노래, 고요의 어미의 아들이라고
너와 나는 한통속이라고 속삭이는 가시덤불
은밀한 자아 쓱쓱 지워버리고
생음악을 연주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가시덤불
오 부드러운 소리의 둥지, 하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침묵의 가시로 무장한 가시덤불
오직, 경청(傾聽)만 허용하는 가시덤불!
― 〈노래하는 가시덤불〉 중에서(《수탉》)

 

‘새소리’와 ‘새’의 관계는, ‘생음악’과 얼굴을 감춘 ‘주자(奏者)’로 은유된다. 그런데 그 주자는 다름아닌 “마른 잎새들 간신히 매달고 있는 가시덤불”이다. 그 가시덤불이야말로 가까이 다가서면 음악을 멈추고 돌아서면 다시 음악을 흘려 내보내는 은둔과 신성의 연주자이다.

 

화자는 방죽 아래 투명하게 언 강물 속에서 지느러미조차 멈춘 “고요의 어미”들이 악보의 쉼표처럼 떠 있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가시덤불도 “고요의 어미의 아들”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노래한다. 그런데 부드러운 소리의 둥지인 가시덤불은, 인간이 가까이만 오면 침묵의 가시로 무장하면서 더 이상 다가오지 말고 그저 자신의 노래를 경청하기만 하라고 요청하는 게 아닌가. 다가갈 수는 없지만 들을 수는 있는 ‘침묵의 소리’로서의 신성이 거기 선명하게 있다.

 

시인은 그렇게 “자신이 고요의 자식이라는 믿음 속”(최승호)에서 겸허와 비움의 언어를 내보인다. 이미 그는 “우리가 산만함에서 벗어나 고요와 평화를 누리려면 우리 존재의 중심인 그분을 우리 안에 모셔 들여야 한다. 아니, 그분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시니 그분의 현존을 자각하면 된다. 우리 안에 현존하는 그분의 본성은 고요이며 평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영혼의 정원사》 문학에디션 뿔, 2009)라고 말한 바 있는데, 가시덤불이 노래하는 순간이야말로 “논(論)의 그물에 걸릴 분이 아니”(〈어떤 인터뷰〉 《수탉》)신 신성이 고요하고 평화롭게 임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가시덤불이 노래하는 장면에 이어 나타나는 것은 달팽이가 춤추는 장면이다. 우주적 노래와 율동을 한꺼번에 잡아채는 시인의 시선이 깊고 섬세하다. 그 느릿한 우주적 율동으로 한번 가 보자.

 

오동나무 숲으로 산책을 가려고
집을 막 나서는데
잠깐! 아내가 불러 세웠다.
부엌에서 나온 아내는
미나리를 씻다가 발견했다며
달팽이가 붙어 있는 미나리 순을 내밀었다.
산책 가는 길에
숲에 풀어 놓아주라고!
푸른 미나리 순에 붙어 꼼지락대는
아기 손톱보다 작은 달팽이를
모셔 들고
숲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붐비는 차도에는
차량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지만,
나는 달팽이를 나르는
생명의 수레.
길을 걷다가 내 손에 들린 달팽이를 보니
뿔더듬이를 허공에 쳐들고
느릿느릿 춤을 추고 있었다.
(원, 세상에, 이렇게
느린 춤이 있다니!)
숲길로 접어들며 나는
보랏빛 향 그윽한 오동나무 숲 그늘에
가만히 달팽이를 놓아주었다.
달팽이는 여전히 춤을 추며
깊고 푸른 숲 그늘로
느릿느릿 기어 들어갔다.
― 〈춤추는 달팽이〉 전문(《수탉》)

 

산책길에 나설 즈음 아내가 건네면서 놓아주라고 한 것은 미나리에 달라붙어 있던 ‘달팽이’다. 여린 미나리 순을 들고 산책길에 들어선 화자는 “아기 손톱보다 작은 달팽이”를 모셔 들고 자신이야말로 “달팽이를 나르는/ 생명의 수레”라고 생각하며 숲에 들어선다. 그런데 언뜻 달팽이를 바라보니 뿔더듬이를 허공에 쳐들고 느릿느릿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 느린 춤을 추는 달팽이를 화자는 보랏빛 향 그윽한 오동나무 숲 그늘에 가만히 놓아준다. 생명의 수레에서 내린 달팽이는 그 느릿한 춤을 추면서 깊고 푸른 숲 그늘로 들어간다. 이 시편은 신성의 현현과 사라짐의 과정을 ‘달팽이’의 춤과 숲으로 들어가는 풍경으로 은유한 것이다. 결국 이 시편은 “끝없이 밀려드는 거친 파도와 뙤약볕에 씻기며/ 검은 퇴적암에 음각(陰刻)된/ 일억 년 조물주의 고독”(〈일억 년의 고독〉 《수탉》)을 뭇 사물로부터 발견하고 시를 쓰는 자신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잇는 말뚝”(〈말뚝〉 《수탉》)임을 보여주는 고진하 시인의 일관된 언어의 향연이 아닐 수 없다.

5.

우리가 경험한 근대주의는 모든 문화적 가능성과 다양성을 동질화하려는 강력한 서구 중심주의의 태내에서 나온 개념이다. 이러한 근대주의의 자기 표현인 개발 논리가 우리에게 되돌려준 재앙의 깊이와 넓이는 매우 혹독한 것이었다. 이러한 반성적 시선과 관심은 단순한 환경 운동의 차원을 넘어서 근원적인 생명을 사유하고 상상하는 흐름으로 번져갔다. 한편에서는 뭇 생명들의 상호 연관성을 중시하는 미학으로 나타나기도 하였고, 종교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나타나기도 하였다. 고진하 시편은 뭇 사물로부터 신성을 복원하는 전혀 새로운 생태적 사유와 방법의 시편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사례일 것이다. 이러한 미학이 깊게 밴 근작 한 편을 읽어보자.

 

문득 대관령 골짜기 허름한 목조건물의 수도원에 모여 있던
딱따구리들, 생각난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무엇을 구하기 위해 텅 빈 허공을 쪼고 또 쪼았던가
며칠째 속을 비운, 그 공복(空腹)의 가슴을 난타하며 구한 것은
하늘 양식? 푸른 하늘에 쫑긋 귀 세우고 하늘의 푸른 응답을 고대하던


딱따구리들, 그 망치질하던 욕망의 머리통이 텅 비고 그 날선 분별의 부리가 무디어졌을 때
그들이 얻은 것은 고요? 혹은 침묵? 이보다 더 좋은 하늘 양식이 또 있겠냐며
하산하는 날갯짓이 가벼웠던가 아니던가

딱따구리 소리 멈춘 뒤 아래층 나무기둥으로 가보니
내 엄지손가락 들어갈 만한 구멍이 세 개나 뻥 뚫려 있다 먹고 먹힘의 깊은 내연(內緣), 그 묘묘한 심연에서
샛노란 어린 부리들이 받아먹을 양식이 나오고, 고요나 침묵 같은 소리 없는 음악이 쏟아지다니.
그렇다면…… 오늘 이 푸른 은거의 시간을 쪼아 내가 토해낼 음악은?

 

집으로 올라가는 목조계단을 오르는데, 이번엔 또 개울 건너 낙엽송 군락에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친다.
―〈딱따구리〉 중에서(《유심》 2008년 봄호)

 

다듬이질이나 망치질 소리 같은, 천지가 들썩이도록 나무를 난타하고 있는 ‘오색딱따구리’의 소리는, 화자로 하여금 대관령 골짜기 허름한 목조건물의 수도원에 모여 있던 일군의 딱따구리들을 연상케 한다. 그들은 차가운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텅 빈 허공을 쪼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며칠째 공복(空腹)의 가슴을 난타하며 그네들이 구한 것은 ‘하늘 양식’이거나 ‘하늘의 푸른 응답’이거나 궁극의 ‘고요’나 ‘침묵’이었을 것이다.

 

화자는 그 ‘고요’와 ‘침묵’이 지금, 딱따구리의 “고요나 침묵 같은 소리 없는 음악”으로 전이되어 자신에게 다가옴을 느끼고 노래한다. 그리고 자신도 이 푸른 은거의 시간을 쪼아 어떤 음악을 토해낼 것인가를 사유한다. 아마도 그 음악의 형식은 침묵이고, 내용은 고요일 것이다.

 

이렇게 ‘빈들’로부터 시작된 고진하 시편은 ‘새소리’와 ‘어머니’에게서 신성을 발견하고, 궁극적으로는 ‘라일락’ ‘가시덤불’ ‘달팽이’ ‘딱따구리’ 같은 세목들에서 ‘신성한 것’을 경험하고 사유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한국 현대시 전체를 통틀어 이러한 시세계를 지속하고 확장해가는 시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고진하 시편은, 자연을 파괴한 후 다시 자연의 희귀성을 내세우면서 상품화 과정을 반복하는 이 잔인한 녹색 소비의 시대에, 돌올한 항체로 존재하고 남을 것이다. 스스로 ‘빈들’과 누구보다도 고독한 소롯길을 택해 걸으면서, 자연 사물에서 ‘신성한 것’을 복원하는 고진하에게, 더 깊은 비평적 해석과 명명이 뒤따르고, 그만의 시사적 의미와 가치가 적극적으로 부여되어야 하는 근본적 까닭이 여기에 있다.  

 

 

유성호
문학평론가. 연세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저서로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침묵의 파문》 《움직이는 기억의 풍경들》 등이 있음.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

 

 

 

―『유심』(2011. 1/2)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