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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가 읽은 문제작]詩 -불교적 상상력과 미적 포괄성 / 신진숙

문근영 2014. 1. 9. 07:54

 

[내가 읽은 문제작]詩 / 신진숙
불교적 상상력과 미적 포괄성
[54호] 2012년 01월 10일 (화) 신진숙 문학평론가

   

신진숙
문학평론가

현대시에서 불교적 상상력만을 따로 분리하여 가려낸다는 것이 지금에 와서는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불교적 상상력은 전통 한국시의 근원에 비추어 볼 때, 하나의 무의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교문화, 불교적 생사관(生死觀)이 우리 문화의 근저에 자리하는 까닭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수많은 역사적 문화유전자 중 불교적인 것이 차지하는 비율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현대 시인들이 불교적인 것을 신앙이 아닌 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불교적 소재나 인식을 드러낸다고 해서 그 모두를 불교적 신앙의 일부로 직설적으로 치환한다면 불교적 상상력의 미적 포괄성을 놓치고 만다.

 

그렇다면 미학적 관점으로서 불교적 상상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선 그것은 특정 종교에 국한된 상상력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말해 불교적 상상력은 불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문학 속 불교적 상상력은 우리말의 원형심상들과 결합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불교적 상상력이 불교와 공유하는 ‘그 어떤 것(佛性)’의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것은 종교 이상의 것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래도록 같은 문화를 공유해 온 자들의 무의식에 자리한, 삶에 대한 특정한 인식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불교적 상상력은 종종 현대세계가 와해해 버린 ‘우주와 인간의 연속성’에 대한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가령 많은 시인이 추구하는 생태주의적 인식이 그렇다. 불교적 상상력과 생태적 상상력은 미학적으로 적대적일 수 없다. 생명의 그물로 얽히고설킨 모든 존재자를 표상하는 존재론적 차원의 불교적 상상력은 생명체를 생명관계로써 규명하고자 하는 생태주의와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불교적 상상력을 어떤 종교적 실체가 아닌 삶에 대한 문화적 무의식 혹은 그 태도로 본다. 그것은 불교적 상상력을 하나의 보편적인 존재론으로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즉, 불교적 상상력은 주체와 타자, 사물과 의식, 존재와 비존재를 구별하지 않는다. 있음(色)과 없음(空)을 구분해낼 수 없는 우주적 삶의 내적 강도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불교적 상상력 자체는 어떤 분명한 주의나 이념적 실체와 무관한 하나의 사유방식이다.

 

이처럼 불교와 불교적 상상력을 분리하고 불교적 상상력을 은연중에 문화적인 것으로 볼 뿐만 아니라 미적 상상력으로 포괄하고자 하는 한 이 글은 순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불교적 상상력이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름의 순정한 생각들을 숨기지 못하는 세련되지 못한 어법에서 비롯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대시에서 불교적인 것을 사유하는 것은 우리 삶의 현재를 성찰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가. 아울러 생명의 존재론적 깊이를 이해하는 데에도 어떤 빛을 던져주지 않는가.

 

나는 이러한 이유로 2012년을 시작하기 위한 주제로 불교적 상상력을 제고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사소한 것의 장엄

불교적 상상력은 ‘생명’에 관한 다른 관(觀)이다. 말하자면 다른 렌즈다. 더 엄밀히 말한다면 세계의 시차(視差)들 중 하나다. 불교적 상상력은 세계에 대한 일상적인 시선을 뒤집는다. 가치 있는 것의 체계를 뒤집고, 삶을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으로 양분하지 않는다. 근대 이후의 모든 사유를 지배하는 위계적인 이분법에 정초한 사유 질서로부터 달아난다. 진위(眞僞), 지(知)와 무지(無知), 선악(善惡), 고저(高低)를 구분하는 모든 심판관들로부터 벗어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일탈한다. 

 

어떤 의미에서 불교적 상상력은 모순어법에 가깝다. 공통감을 추구하며 동일성의 원리를 표방하는 근대적 질서의 강요로부터 벗어난다. 즉, 모순되는 것, 이질적인 것을 포함하는 역설감을 바탕으로 하며, 따라서 생명의 본질을 비동일성으로 이해한다. 이는 단순히 생명의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또 화두의 신비한 이면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구체적인,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을 이야기한다. 가치 있는 것이 미리 설정되고 이를 중심으로 반(反)가치가 구성되는 근대의 표상체계로부터 벗어나 살아 있는 미분적 실재들로써 이질적인 것들을 모순 없이 공유하는 것. 그것은 우주를 이질적인 것의 얽힘으로 재구성하는 새로운 시적 작업을 요구한다. 즉, 불교적 상상력은 위계화된 의미체계 바깥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유적(類的) 분류체계 안에 포획할 수 없는 생명의 실재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 때문에 불교적 상상력은 근대적 사유체계에 대한 반성이자 반근대적 성찰이 될 수 있다. 가령 그것은 내가 마경덕 시인의 〈풀벌레소리를 수확하는 법〉과 조현석 시인의 〈나무의 새벽〉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바람의 체온이 내려가고
풀잎에 열린 벌레소리가 익었다
방울벌레 풀종다리 철써기 귀뚜라미
잡초가 소리를 수확하는 계절
제초제를 뿌린 곳에는 소리의 씨가 말랐다

 

여름내 소리를 키우느라 허리 굽은 하천가 방가지똥 고마리
오가는 발소리에 흠칫 일손을 멈춘다
땡볕 아래 그늘을 짜고 품에 맞는 어둠을 들인 건
누대를 이어온 그들의 농사법

 

바람에 혀끝이 서늘해질 때
으슥한 둑길에 떨어지는 맑고 처량한 소리
잘 여물었나 이러니 흔들어보고 완숙한 소리만 골라 출하하는 야간작업장
물기가 말라 또르르, 멋 곳까지 굴러가면 상품이다

 

달빛과 주고받는 저 밀거래
제철에 거둔 소리의 값은 얼마일까
만돌린을 켜는 풀종다리, 양금을 두드리는 방울벌레
잡초들이 재배한 완벽한 합주는 어느 악기보다 귓맛이 좋다
그들이 소리를 키운 지는 오래지만
맑고 구슬픈 소리가 잡초의 농사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리가 젖으면 무거워 구르지 못한다고
일손을 놓고 풀잎도 쉰다
그런 날은 둑길에 빗소리만 왁자하다


―마경덕 〈풀벌레소리를 수확하는 법〉(《유심》 2011 11/12)

 

수확은 확실히 결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노동에 대한 보상이자 노동가치의 최종적 승인이다. 따라서 노동이 없는 결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노동은 지나치게 일의적이다. 그것은 언제나 쓸모 있는 것에 대한 개념으로 채워져 있다. 즉, 근대적 노동은 전근대적 질서로부터 벗어나면서 유용함과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하나의 축으로 집중된다. 쓸모없는 것, 비효율적인 것은 과감하게 제거된다. 그것은 모든 가치가 자본의 이익으로 계산되는 근대적 풍경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제 근대적 의미의 노동은 과정이 아니라 수확된 산물의 양적인 것으로 대체된다. 마경덕 시인은 바로 이러한 근대적 노동 개념을 비튼다. 풀들이 하는 노동이 그것이다. 풀들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무것도, 어떤 쓸모 있는 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용(無用)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생명의 관점에서 본다면, 풀들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가장 유용한 존재들로 재인식된다. 따라서 풀들이 행하는 노동은 이름이 있는 것(“방가지똥” “고마리”)이나 없는 것(그저 “잡초”)이나 그 가치를 위계화할 수 없다. 그러므로 풀잎의 노동이 만들어내는 소리(“벌레소리” “빗소리”)를 수확한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노동에 비할 수 없이 사소하고 또 장엄하다. 풀들의 이 역설적인 “농사법”이야말로 불성(佛性) 안에서 우주가 움직이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 아니겠는지.

 

한편 조현석 시인은 이와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나무’가 지닌 불성을 상상한다.

 

하늘과 닿은 나뭇잎에 불그스레하게 파 먹힌 죽음 문득 내비쳤지 아주 오래전부터 드나들던 이슬과 햇빛, 스쳤던 바람의 흔적들 잎맥으로 모두 스몄지 잠깐 눈 감았다 떴다 싶은 순간 소신공양하듯 활활 타오르던 해질녘 찰나
황혼 직전 타오르던 불의 문장들은 하늘 어디에도 새겨지지 않았을까 잠들기 전의 반성은 수많은 별들을 끄집어낸다 하지 세상을 밝히던 불춤의 의문부호들은 왜 성급하게 사라졌을까 잠깐 졸다가 깨어나고 잠깐 깨다가 다시 졸고 마는 시간, 그 속에 품고 갈 인생의 흔적은 있기나 했을까

 

언제 뜨거웠던 적 있을까 싶게 달뜨게 했던 시간 모두 흩어지게 하고 반쯤 타다 반쯤 그을리고만 나무 한 그루 하늘과 땅 구분 모호한 동쪽 향해 돌아앉으니 밀려오는 억겁의 미망(迷妄)들 엊저녁 노을 사라지듯 기나긴 그림자도 미명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스스로 깨어나는 새벽의 등신불(等身佛)
 

―조현석 〈나무의 새벽〉(《유심》 2011 11/12)

 

‘나무’에 대한 상상이 불교적 심상들과 결합함으로써 독특한 풍경이 만들어진다. 나무는 모든 시간이 스며들어 있다. “이슬과 햇빛, 스쳤던 바람의 흔적들” 모두 “잎맥”이 된다. 그러나 나무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소유하지 않는다. 황혼이 되면 스스로를 불태워 버린다. “소신공양”하듯 생의 지평으로부터 공(空)의 지평으로 스스로를 옮겨 놓는다. 그럼에도 그것은 명확한 진실도 대변하지 않는다. 어떤 실체도 없는 “의문부호들”만을 남길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 불태워진 자리에 무엇인가 돋아난다. “미망”은 “미명” 속에서 새롭게 무엇인가를 돋게 한다. 하여 시인은 나무를 “등신불”에 비유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움으로써 우리에게 깨달음을 던져주는 존재. 이런 방식으로 시인은 현상 자체로서의 나무의 생태를 넘어 이념적인 나무의 형상으로 나아간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깨달음을 나무의 형상과 결합함으로써 구체적 진실을 꾸려낸다. 가장 평범하고 사소한 존재들 속에서 인간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존재의 진정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의 사물과 불교적 상상력이 만나는 지점에서 돋는 사소하지만 장엄한 생명의 의미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억겁과 찰나의 포개진 시간‘들’

 

한편 불교적 상상력은 독특한 시간관을 지지한다. 찰나의 인연이라도 그것은 억겁의 인연이 아니면 맺어질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시간의 의미는 생명의 관계론으로 재해석된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 닿는 순간 혹은 인연(因緣) 혹은 접촉면이 시간의 형식과 질을 결정한다. 따라서 불교적 상상력이 지지하는 시간은 근대적 시간관과 비교할 때 매우 불명료하다. 알다시피 그것은 근대적 시간 개념과 대립한다. 기계처럼 부분과 전체가 어긋남 없이 완벽하게 맞추어진 ‘시계(時計)’의 공간화된 시간과 구분된다. 시계는 보이지 않는 시간을 균질적이고 균등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시간을 보이는 것으로 표상한다. 그것은 근대인의 시간관이자 서구의 인간중심주의적 시간관의 요체이다. 모든 시간을 인간이 만든 시간 기준으로 재편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적 의미의 시간은 무한히 ‘포개진’ 시간이다. 그것은 마치 고삐가 풀린 시간처럼 동일화하거나 조직화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것은 영원히 앞으로 향하는 시간인 동시에 영원히 되돌아오는 시간이다. 직선적인 서구의 시간관과 달리 시간은 인연의 흐름을 따라 영겁회귀한다. 억겁의 시간은 찰나가 도달해야 할 마지막 시간도 목적도 아니다. 억겁은 찰나적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시간의 무한성은 유한한 생명체 안에서만 사유된다. 어떤 삶은 빠르고, 어떤 삶은 느리다. 어떤 시간은 반복되고 어떤 시간은 진화한다. 찰나란 무수한 존재의 시간이 응축된 어떤 것이다.

 

이 모든 것 때문에 시간은 궁극적으로 다질적(多質的)이다. 근대적 시간이 인간을 중심으로 구상된 것인 반면, 불교적 상상력 속에서 재구성되는 시간은 모든 생명체에 내재되어 있는 시간‘들’로 재구성된다. 그러므로 미학적 관점으로서 불교적 상상력은 사소한 미물 혹은 생명까지도 사유한다. 위선환 시인의 〈물비늘〉과 한이나 시인의 〈부처 눈사람〉을 이러한 관점으로 읽어 볼 것이다.

 

물고기를 안아서 길렀다 비늘은 등을 덮었고 눈자위가 흰 놈이다

 

한밤에도 뜨고 자는 눈 가장자리에서 눈썹털이 자라는 백 년이 지나갔고

 

다음 해부터 헤아려서 백 년을 더 기다린 다음에는 그 다음 해가 와서

 

제일 깊은 바다의 깊은 바닥에 자리한 물고기의 집에도 비늘이 돋는 때에는

 

물고기가 사는 집이 깊고, 길게 숨죽이고 들여다보아도 긴 물도랑이므로

 

물도랑으로 흐르는 물이 꿈틀거리고 뒤챌 때마다 비늘들이 번뜩이는 것인데

 

물이 비늘이 돋는 소리는 백 년이 몇 번 지나가는 소리보다 조용해서

 

또 백 년이 지나가도록 귀를 갖다 대어도 사람은 듣지 못하는 것 아닌지

 

물비늘 몇 개 집어 들고 만지작거리며 다시 한 해를 보내는,

 

―위선환 〈물비늘〉(《유심》 2011 11/12)

 

억겁은 인간의 셈법으로 계산할 수 없다. 그것은 너무도 고요하고 느려서 인간의 시력으로는 어떤 징후도 알아낼 수 없다. 말하자면 인간은 억겁의 시간을 경험할 수 없다. 또 억겁은 서구적 영원성의 시간 개념과도 결코 같지 않다. 서구적 개념의 영원성은 언제나 이미 경험하고 있는 이 현재적인 순간으로만 이해된다. 시간의 영원성은 결국 현재의 영원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동양적 의미의 무한한 리듬 속에서 반복되는 억겁은 사유될 수 없다. 따라서 현재가 인간의 시간 리듬이라면 억겁은 우주의 시간 리듬이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현재의 이전이자 이후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바탕. 시인이 발견한 이 풍경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시작된다. “물비늘”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거대한 물의 흐름과 리듬은 그 자체로 물이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임을 보여준다. 물은 생명이 없는, 그러므로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어떤 물질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생명이다. 따라서 인간이 마음대로 재단하거나 조정할 수 없다. 그것은 억겁의 시간이 증명해 줄 것이다. 시간의 여러 겹이 이 시를 구성하는 중핵임을 알 수 있다.

 

저 골짝 국청사 천불전에서 십년
면벽수도 끝에 해탈을 이루신 게야
밤새 잣눈 내리는 소리,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마음을 듣다가
슬그머니 법당을 빠져나와
절마당 기와불사 탁자 위에 가부좌를 트신 게야
저리 가만히 미소를 짓고 계신 게야
몇 시간째일까 움쩍달싹 않고 볕에
소신공양 몸 허물고 있는 부처 눈사람
눈 코 입 귀
마침내는 온몸의 100조 개 세포마저
망상과 번뇌를 밖으로 밀어내는,

 

그래 나도 부처 눈사람 옆에 앉는 게야
세상 큰 근심 작은 근심 귓가를 스쳐가는 바람이려니,
절대고요에 담기는 게야
서서히 내 몸이 녹아 없어지고 있는
적멸에 든

 

깊은 골짝


―한이나 〈부처 눈사람〉(《유심》 2011 11/12)

 

한편, 한이나 시인은 “눈사람”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소멸되어가는 생명의 과정을 적멸에 드는 부처의 형상으로 재형상화한다. 생명은 시간의 진행 과정 속에서 있음으로부터 없음으로 이동한다. 모든 존재는 불가역적 시간 속에서 부재의 순간으로 옮겨간다. 불교적 상상력은 이러한 근대적 시간의 허무주의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그 의미를 부여받는다. 진정한 깨달음의 시간은 “적멸”이 소멸이 아님을 증명하는 순간 입증된다. 외부는 한 존재의 “면벽수도” 속에서 “말”이 아닌 “마음”으로 수렴되고, “마침내는 온몸의 100조 개 세포마저/ 망상과 번뇌를 밖으로 밀어내는” 시간을 겪은 후 “눈사람”은 “부처”가 된다. 그러나 시인이 풍경은 생각보다 소박하다. 꾸밈이 없다. 시인이 시적 화자를 적멸에 도달하는 자가 아닌 그것에 근접하는 자리에 자신을 세워둔 까닭이다. 시인은 “절대고요”의 깨달음에 도달한 자가 아닌 도달할 수 없는 자가 지닌 염원과 추구를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깊은 골짝에 잠시 왔다 가는 존재일 뿐 어떤 참깨달음도 진정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겸손함이 드러난다. 이에 시인은 그저 시간이 진리로 탈은폐되는 “소리”를 듣는 맑은 귀 하나만을 원할 뿐이다.

 

완전한 미완에 대하여

 

불교적 상상력은 고유의 생사관을 포함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생명은 완성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수 없다. 근대적 언어체계의 기준으로 볼 때 완성이란 말은 언제나 그렇듯 수많은 불완전성을 자신의 그늘 속에 부린다. 완전함의 기준이 선재(先在)하는 것이다. 때문에 불완전성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그러나 불교적 상상력은 완성에 대한 어떤 절대적 사유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말을 모든 존재를 신적인 것의 미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완전함은 존재 바깥에 초월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은 생명 안에 내재한다. 즉,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언제나 이미 완전한 것을 포함한다. 어떠한 미물도 그 자체로 불성(佛性)을 지닌 존재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생명의 관점에서 완결과 미완은 구분될 수 없다. 일테면 카오스의 혼돈은 코스모스의 질서로 전이될 잠재적인 차원을 배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교적 상상력은 죽음을 삶의 반대 혹은 삶의 완결로 이해하지 않는다. 선형적(線形的)인 시간관 혹은 결정론적 운명관으로부터도 거리를 둔다. 모든 것은 미완(未完)인 채로 언제나 이미 완전하다. 가령 정현종 시인의 〈준비〉를 이와 같은 관점으로 읽는다면 어떨까.

 

우리는 준비 없이 온다―
욕망은 준비 없이 움직이므로.

 

시작이 그러했듯이

 

평생의 일들은 한 번도

 

제대로 준비된 적이 없다.

 

물론 또한

 

경황 없이 떠날 것이다.


―정현종 〈준비〉(《유심》 2011 11/12)

 

불교적 상상력에 국한하여 이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인이 오래도록 추구해온 진실이 어떤 실체에 얽매이지 않는 까닭이다. 생의 의미를 하나의 상상력으로 한정하는 순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차이들을 잃게 될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불교적 상상력을 불교‘주의’적 상상력이 아닌 미학적 포괄성으로 재인식하는 자리에서는 정현종 시인의 〈준비〉가 던져주는 의미가 남다르다. “준비 없이” 와서 “경황 없이” 떠날 것이라는 담담한 어조 속에 삶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담겨 있다. 그리고 생사 앞에서의 이 담담함은 어떤 장황한 진실이나 열의에 찬 주장보다 울림이 크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시인의 말대로 모든 것을 버릴 준비도 욕망을 내려놓은 채비도 하지 못한 채 왔다 가는 존재들일지 모른다. 하여 불완전한 이 삶이 인간의 궁극적인 모습일진대 완전한 것을 품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부질없다. 깨달음은 언제나 삶 그 자체보다 더디다. 그러므로 정현종 시인의 시는 불교적 상상력으로 국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근간은 불교적 상상력과 조응한다. 이 시는 인간의 불완전을 꼬집으면서도 그것이 인간임을 긍정한다. 불완전함이 곧 완전함이다. 불완전과 완전은 인간의 머리에서만 구분될 뿐이다. 불교적 상상력은 생명을 어떤 기획이나 계획이 없는 미완인 상태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완결될 수 없으므로 완전하다. 불교적 상상력이 종교 여부를 떠나 미학적 포괄성으로 제고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불교적 상상력을 이야기하면서도 많은 것들을 가지치기했으며, 불완전하게 묘사했다. 또한 편협하게도 나는 불교적 상상력이 펼칠 수 있는 미학적 지평에 대해서만 사유했다. 불교의 이치를 설명해야 할 자리에서 종교적 심상과 결부된 채 탈영토화되는 불교적 상상력을 논했다. 그럼에도 나는 두려움 없이 생각한다. 불교적 상상력이 보편적인 미의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풍요로운 사유와 미적 실천이 요구된다고. 

 

신진숙 | 문학평론가. 2005년 《유심》으로 등단. 저서로 《윤리적인 유혹, 아름다움의 윤리》가 있음. 현재 경희대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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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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