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89) - 성찰의 힘
붉다
이승희
정육점에 간다
머리 풀고
슬리퍼 끌고
속옷과 겉옷이 가끔씩 뒤바뀐 걸음으로
초원이 아닌 골목을 거슬러
강물이 아닌 슈퍼를 지나
정육점에 간다
저항을 포기한 지 오래
붉은
살코기들이
바닥을 향해 매달린
피 흐르지 않는 살을
피 흐르지 않는 삶이
두리번거린다
고기 속으로 칼을 푹 찔러 넣던 날들 있었나
날카로운 이빨로
제 살이라도 물어뜯어야 살 것 같은 날들 있었나
예쁘기도 하지
도살의 흔적
싱싱하기도 한
저 허구적인 불빛
붉다
붉어서 눈물 나는
# 그의 시는 붉고 많이 젖어 있다. 그만큼 흡입력이 강하다. 어느 시를 읽어도 진솔한 서정의 촉기를 느낄 수 있다. 이 시 역시 예외가 아니다. 화자는 가장 편한 차림으로 동네 정육점을 찾아간다. 그러나 화자가 가고 있는 곳은 원초적 생명이 숨 쉬는 자연의 공간이 아니라 도살과 인위의 문명이 자리한 곳이다. ‘초원’과 ‘강물’ 대신 ‘골목’과 ‘슈퍼’를 지나야 이를 수 있는 곳, 자연과 생명이 문명의 칼날에 절단되어 진열된 장소이다.
정육점에 있는 것은 ‘저항을 포기한’ ‘살코기’일 뿐이다. 저항을 모르고 굴종만이 체질화되어 노예의 도덕과 가치를 숭배하는 사물이다. 곧 낙타 형 삶의 실체이다. 화자는 그곳에서 살코기와 동일한 자아의 초상을 본다. ‘피 흐르지 않는 삶’은 모험도 모르고 용기도 없는 존재의 구체적 형상이다.
3연에서 자기 성찰의 모습이 나타난다. ‘피 흐르지 않는 살’을 통해 화자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화자에게는 ‘칼’도 ‘날카로운 이빨’도 없다. 붉은 색이 상징하는 열정과 용기도 지니지 못했다. 오직 낙타와 같은 비루한 일상을 터벅터벅 걸어왔을 뿐이다. 기존의 도덕과 질서에 순응하고, 나날의 안위만을 도모하며 살아온 것이다. 용기와 강한 힘으로 무장하고 파괴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디오니소스 형 삶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삶을 냉철하게 성찰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욕망하는 화자는 반어적 표현을 통해 현실의 모습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도살의 흔적’을 예쁘다고 말하고, 정육점의 ‘허구적 불빛’을 싱싱하다고 표현한다. 이는 현실에 대한 조소이며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과 반성의 수사이다.
마지막 연 ‘붉다 / 붉어서 눈물 나는’이 그러한 정황을 뒷받침한다. 결여는 욕망의 동인이다. 아픈 각성과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화자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지향하고, 이때 ‘눈물’은 강력한 반전의 무기로 작용한다. 섬세하고 따뜻한 서정의 호흡이 장기인 이승희 시인이 진솔한 고백적 어투로 삶의 부정적 단면을 잘 드러낸 작품이「붉다」이다. ‘저녁을 굶은 달’과 동행하는 이승희 시인은 앞으로 모성적 연민의 정서를 바탕으로 서정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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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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