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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마뱀으로 살아가렴 / 정희경

문근영 2013. 12. 18. 00:58

 

 

 

 

 

도마뱀으로 살아가렴 / 정희경

 

 

귓바퀴에 묻어 두었던 은어들이

새벽녘 호숫가에 번지던 물안개가

솟아오르는 태양에 자취를 감추듯

소속감을 상실한 채 떠돌아다닌다

진실의 무게를 가벼움에 두고

허공에 흩어지는 구름의 흔적처럼

사랑쯤 아무렇지 않게 뚝 떼어놓고 달아나는

도마뱀으로 살아가렴

 

어둡고 칙칙한 곳에 배를 깔고 누워

눈만 굴리고 있을,

아픔의 감각도 상실한 채

약속의 무게를 잃어버린 넌

도마뱀으로 살아가렴

 

남들이 밟지 않은 좁은 통로를

꼬리도 없이 눈치 빠르게 빠져 다니며

세상에서 눈 돌린 어두운 곳에서

바위의 무게를 등에 느끼며

고독의 무게를 가슴에 담고

도마뱀으로 살아가렴

 

- 시집 『작은 내 영혼아』(인디넷,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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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마뱀은 다급한 상황에 봉착하면 스스로 꼬리를 자르고 도망갈 수 있다. 잘린 꼬리는 잠시 토닥토닥 적을 현혹하는데, 도마뱀으로서는 중요한 생존전략인 셈이다. 그리고 잘린 자리엔 곧 새 꼬리가 재생된다. 결국 도마뱀의 꼬리는 몸의 일부이지만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카드인 것이다.

 

 사람의 두뇌에도 도마뱀의 뇌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 뇌의 가장 깊숙한 부분인 '간뇌'가 그곳이다. 위협이나 성적인 자극을 받으면 이 부분이 흥분한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지적인 사람은 간뇌가 시키는 대로 다 움직이지는 않는다. 사람의 두뇌에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대뇌가 있어, 이 '생각하는 근육'이라는 대뇌가 간뇌를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본능을 다스리고 이성적으로 행동케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간뇌를 제대로 통제하고 길들이려면 대뇌의 훈련이 필요하다. 대뇌 근육은 끊임없이 쓰고 다듬지 않으면 이내 흐물흐물해져 버린다. 생각 줄을 놓으면 대뇌의 힘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리되면 사람의 두뇌도 도마뱀의 그것처럼 본능이 시키는 대로 휘둘리게 된다.

 

 그런데 도마뱀으로 살아가라는 권고는 어떤 의미일까? '진실의 무게를 가벼움에 두고' '사랑쯤 아무렇지 않게 뚝 떼어놓고 달아나는' 도마뱀의 영혼으로 산다는 건 참혹의 날들을 견디며 사는 것 보다는 낫겠다는 인식 때문일까. '아픔의 감각도 상실한 채' '약속의 무게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상처의 아픔을 덜 느낀다는 계산에서일까.

 

 '바위의 무게를 등에 느끼며 고독의 무게를 가슴에 담고' 납작한 패배의식으로 살아갈 수는 도무지 없는 것 아닐까. 일본의 한 건물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는 도마뱀 한 쌍의 기막힌 사연을 떠올려보면 도마뱀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그리 생각없고 가볍지만은 않을 듯 하니 말이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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