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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97) -맺고 푸는 힘의 조율

문근영 2013. 12. 17. 19:16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97) -맺고 푸는 힘의 조율

 

 

끙게질
 
이덕규
 
 황소가 한겨울 먹고 놀면 사람이 생쥐 만하게 보인다는데요 무엇이든 그냥 닥치는 대로
 꾹, 밟고 싶어진다는데요 아-흐, 몸이 근지러워
 말뚝에 치대고 들이받고 비비는 놈을 바로 논밭으로 밀어 넣으면 씨근덕 불끈덕 삐뚤빼뚤 갈지자로 갈아대기 일쑤인데요
 이른 봄 아버지는 통나무 썰매 위에 일 마력짜리 발동기만한 돌멩이를 턱 올리고
 먼지 뽀얗게 날리며 들판 몇 바퀴 뺑뺑이 돌리는데요 이른바 끙게질이라고 하는데요
 맷돌 같은 어금니를 뿌드득 뿌득 갈아대며 메기수염 같은 끈끈한 침을 흘리며 등짝엔 시루떡을 쪄 얹은 듯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데요
 반나절쯤 돌리고 마당에 들어서면
 어라, 발굽 아래 기던 사람들이 저보다 더 크게 보여서 눈망울이 화등잔만 해진다는데요
 거짓말처럼 유순해져서 휘어진 논은 휘어지게 곧은 논은 곧게 다그치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가고 서고 하는데요
 쟁기질 써레질로 몸이 천 근 만 근이 되어 머리를 땅에 끌고 돌아오는 날이면 또 캄캄해져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데요
 서리태 듬뿍 섞은 여물 한 구유 정신없이 먹고 나면 그 크다란 눈동자 속엔
 모종하고 비 맞은 수숫대처럼 웃자란 어린 주인이 우뚝 서 있었는데요
 머지않아 세상 갈지자로 마구 갈아엎고 다닐 그 껑충한 황송아지 이마에도 검지만한 뿔이 돋느라고 개굴개굴 되게 가려운 저녁이었는데요
 
 
# 눈앞의 현실은 날것의 재료다. 비린내도 나고 쓴맛도 나고 때로는 떪은 맛도 난다. 시인은 그 날것의 재료를 그대로 시로 옮기지 않는다. 거르고 묵히고 삭혀서 충분히 발효되었을 때 시의 그릇에 담는다. 한 편의 좋은 시는 잘 익은 술이다. 「끙게질」이 바로 그 좋은 예이다. 이덕규 시인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러하듯 삶의 현장에 밀착되어 있으면서도 일정한 거리두기를 통해 생경하고 덜 익은 현실적 발언들을 잘 다스려서 한 편의 시로 빚어낸다. 완급과 강약의 조절을 능란하게 구사하는 그의 시는 목에 핏대 세우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여타의 설익은 시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시인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끙게질」에는 황소와 아버지가 등장한다. 겨울 한철 놀고 먹은 황소의 제멋대로의 힘을 다스리기 위해 아버지는 ‘발동기만한 돌멩이’를 통나무 썰매에 올려놓고 들판을 뺑뺑 돌게 한다. 차고 넘치는 폭력적 힘의 고삐를 잡아 틀어쥐는 행위이며 야성의 힘을 조절하는 제의이다. 반나절의 의식을 통해 소는 생쥐만하게 보던 사람을 저보다 더 큰 사물로 보고 유순해져서 “휘어진 논은 휘어지게 곧은 논은 곧게 다그치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가고 서고”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또 힘든 노역을 마치고 “머리를 땅에 끌고 돌아오는 날”에는 아예 아무 것도 보지 못하다가 “서리태 듬뿍 섞은 여물 한 구유” 먹고 나면 어린 주인이 수숫대처럼 우뚝 서 있는 것이다.
 
“머지않아 세상 갈지자로 마구 갈아엎고 다닐 그 껑충한 황송아지”는 곧 “어린 주인”에 다름 아닌 것. “검지만한 뿔이 돋느라고 개굴개굴 되게 가려운 저녁”은 신성한 제의의 시간이다. 화자가 마지막에 슬며시  “어린 주인”을 등장시킨 것은 다분히 전략적이다. 이 시가 단순히 황소 길들이기 차원의 내용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행사되는 ‘힘’의 의미에 대한 화두를 툭 던져놓고 돌아서는 것이다. 황소의 몸에서 흘러 넘친 힘은 새로운 생명의 에너지로 전환되어 논과 밭을 푸르게 물들일 것이고, 적당히 힘을 뺀 황소는 대지를 갈아엎고 신생의 터전을 일구어 나갈 동력이 된다. 결국 이 시는 그릇된 힘의 과잉이 대상을 파괴하고 현실을 왜곡한다는 의미를 함의한다. 부드럽고 유연한 힘은 신생의 에너지로 작용하지만 경직되고 폭력적인 힘은 현실을 억압하고 구속한다. 노자 할배가『도덕경』에서 그토록 강조한, 강한 것은 죽음으로 가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으로 간다는 사실을 이 시는 진솔하고 담박한 서정으로 잘 형상화하였다. 

 또한 “-데요”를 반복하여 화자는 시종 관찰자의 위치를 견지하면서 최대한 시적 상황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다. 이러한 화자의 태도가 시의 완성도와 공감의 감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데요”의 반복을 통한 운율적 효과와 부드러운 정서의 호흡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 시에 탄력성을 부여하고 설득력을 높이는 장치로 작용한다.
 “검지만한 뿔이 돋느라고 개굴개굴 되게 가려운 저녁”도 빼어난 감각적 수사로 눈길을 끈다. “개굴개굴”이라는 시어를 이처럼 절묘하게 사용한 시를 본 적이 없을 만큼 인상적이다.

 건강한 서정의 근육이 만져지는 시가 이덕규의 시다. 그의 작품은 정련된 사유와 야생의 정서가 잘 버무려져 탄생한다. 대부분 대지에 굳게 발을 딛고 서서 땅의 기운을 전신으로 호흡하며 강약과 완급의 조절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언어의 조율사가 바로 이덕규 시인이다.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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