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13) - 격절과 악몽의 시선 |
그믐
김경후
나를 꽝! 닫고 나가는 너의 소리에
잠을 깬다
깨어날수록 난 어두워진다
기우뚱댄다
거미줄 흔들리는 소리
눈을 감고 삼킨다
오래 머물렀던 너의 이름에서
개펄 냄새가 난다
그것은 온통 버둥거린 자국들
부러져 박힌 비늘과 지느러미들
나를 꽝! 닫고 나가는 소리에
내게 묻혀 있던 악몽의 알들이 깨어난다
깨어날수록 난 잠든다
컴컴해진다
닫힌 내 안에
꽉 막힌 내 목구멍에 이제 그곳에 빛나는 건
부서진 나를 짚고 다니던 부서진 너의 하얀 지팡이
내 안엔 악몽의 깃털들만 날리는 열두 개의 자정뿐
# 격절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한 존재가 떠났다. 그리고 시가 태어났다. 악몽의 자식이다. 그런데 아프다. 그의 지팡이를 신화적 상징물로 거론하지 않더라도 확연하게 드러나는 시의 밑그림 때문에 가슴이 먹먹하여 한동안 시를 놓지 못한다. 「그믐」의 힘이다. 지금 화자는 그믐을 견디며 그믐을 건너고 있다. 막강한 밤의 폭력, 너무 많은 밤이 문제이다. 화자는 “열두 개”의 자정을 사는 존재이다. 열두 개의 자정을 살아보셨는가?
“나”는 “너”로 인하여 닫힌다. 한 순간에 과거는 밀봉되고, “나”는 잠을 깨어 일어나지만 의식이 명료해질수록 더 어두워지고 비틀거리는 비극적 상황에 직면한다. 아무 예고 없이 한 순간에 과거에 갇혀 버둥거리지만 “너”는 부재한다. 어디에서도 구원의 빛은 보이지 않고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그 순간 파르르 떠는 거미줄 흔들리는 소리를 삼키며 견딘다. 탯줄 끊어진 생명처럼 극도의 절망에 몸을 떤다. “너”는 내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안가였던 것. 그러나 지금은 “개펄 냄새”가 나는 곳. “온통 버둥거린 자국들”과 “부러져 박힌 비늘”로 기억되는 상처의 진원지인 것. 그리고 줄지어 “내게 묻혀 있던 악몽의 알들”을 만나게 된다. 악몽이 부화할수록 “나”는 다만 컴컴해지고 어두워지는 사물이 된다. 심장의 온기가 사라지고 손끝 발끝이 지독한 절망과 좌절로 차갑게 식어가는 존재가 되어 서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몇 조각의 추억과 “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기쁨과 슬픔의 잔영을 반추하는 일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마지막으로 남은 애증의 얼룩을 지우며 열두 개의 자정을 넘어서는 것이다.
“나”는 이제 닫힌 집이고, 빛도 온기도 없는 공간에서 수인처럼 버둥거리며 살아갈 것이다. 오직 “나”를 버티게 하는 동력은 “꽉 막힌 목구멍”에서 빛나는 “지팡이”이다. 지금은 부러져 무용한 환상의 사물에 지나지 않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유효한 빛이요 욕망의 대상인 것이다. 그 욕망이 거듭 거듭 좌절된다 할지라도, “악몽의 깃털 가득한” 또 다른 현실과 마주친다 할지라도 화자는 악몽의 건너편에서 빛나는 지팡이에 대한 뜨겁고, 차가운 시선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열두 개의 자정”을 상처투성이의 육신으로 건너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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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 '문화저널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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