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27) 세계와의 불화
모자 이야기
남진우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아무도 산토끼를 끄집어낼 수는 없다
내 낡은 모자 속에 담긴 것은
끝없는 사막 위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일 뿐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사람들은
파도 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깊은 밤 내 낡은 모자에 귀를 갖다 대면
기적 소리와 함께 시커먼 화물 열차가 달려 나오기도 한다
내 낡은 모자를 안고 오늘 나는 시장에 갔다
하지만 해 저물도록 아무도 사는 이 없어
나는 구름과 놀다가 기차를 타고 훌쩍
머나먼 사막으로 떠났다
누군지 모르는 그대여
내 낡은 모자를 사다오
달리는 화물 열차 끝에 매달려 오늘도 나는
내 모자를 쓸 그대를 찾아 헤맨다
# 시가 보편성에 의지할 때 일상적 문법과의 냉전을 포기한다. 그곳에는 익숙한 세계가 익숙한 표정으로 서 있다. 안정적인 보법으로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노류장화(路柳墻花)처럼 위무와 위안의 기능을 한다. 시의 대중들이 쉽게 다가가 환호하며 박수를 친다. “그래, 시는 이래야 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은 암호에 지나지 않아.” 그러나 시는 세상과의 냉전을 통해 몰락과 좌절의 끝에서 최초의 표정으로 최초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싸우지 않고 타협과 순응만으로는 세계를 전복할 수도 없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도 없다. 이것이 시의 운명이다.
화자는 모자를 들고 있다. 그러나 마술사처럼 모자 안에서 토끼를 꺼내들고 관객을 놀라게 하지 않고 그럴 의도도 없다. 관객들은 “파도 소리”나 “바람 소리”처럼 편안한 자연의 부드러운 손길을 기대하지만 화자는 여지없이 그 기대를 저버린다. 모자 안의 내용물은 단지 “끝없는 사막 위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일 뿐”이다. 영원한 시간 위에 잠시 내려앉은 한 점 티끌에 지나지 않는 것. 대신 모자 안에서는 “시커먼 화물 열차”가 달려 나온다. “바람 소리”와는 전혀 다른 역동적이고 거친 삶의 육체가 육박한다. 화자의 시선이 단순한 즐거움이나 호기심의 충족에 있지 않고 피와 근육이 살아 꿈틀대는 실체로서의 삶을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관객의 기대에 대한 배반이다. 관객은 달콤한 위안과 편안한 자연의 품을 기대하지만 화자는 그 기대에 등 돌리고 서서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여기서 세계와의 불화가 발생한다.
아무도 화자의 모자를 사지 않는다. 이미 모자는 상품성을 잃은 사물에 지나지 않고, 소용 가치를 잃은 사물은 가차 없이 외면되거나 폐기되는 것이 현실의 냉혹한 논리다. 화자와 세계는 결국 극과 극으로 대치한다. 현실에서 거부된 모자의 주인은 “머나먼 사막”으로 “기차를 타고” 떠난다. “사막”은 현실의 질서가 부정되고 몰각되는 공간이다. 정신의 고양이 이루어지는 형이상학적 자리인 셈이다.
화자는 자신의 낡은 모자의 효용 가치를 알아줄 사람을 대중 속에서 찾고자 한다. 외롭고 고단한 사유의 노정이다. 현실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와의 충돌은 늘 비극적 색깔을 띤다. 그러나 시인이라는 존재는 무용성의 가치에 일찌감치 눈뜬 존재들이다. 그것이 그들의 불행이면서 행복이다. 오늘도 무수히 많은 시인들이 무용성의 놀이에 기꺼이 자기 생의 중요한 부분을 헌납하고 창조의 신열로 뜨겁게 달아올라 밤의 사막을 횡단하고 있다. 그들의 고단한 역정은 언제나 세계를 배반하고, 그 자리에 낯선 세계를 건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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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 '문화저널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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