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소한 시를 넘어서기 위하여 / 박현수 | ||||||
| 백석의 경우를 예로 들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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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으로 세련된 왜소한 시들 요즘 각종 문예지에 실린 시들을 보면 잘 쓴 시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시들이 미학적으로 너무나 세련되어 있으며 하나의 작품으로서 깔끔하게 완결되어 있어서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필자가 ‘미시파’ 혹은 ‘네오이미지즘’이라 부른 적이 있는 묘사 위주의 서정시들, 그리고 잔혹시(혹은 미래파)라 부른 바 있는 실험성 강한 시들 모두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그런 세련성과 완결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점 때문에 요즘 시들은 너무나 왜소하게 느껴진다. 갖출 것은 모두 갖추었음에도 뭔가 중요한 것이 결핍된 듯한 느낌이 그것이다. 그래서 잘 쓴 시들이 많음에도 좋은 시는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기교적으로 완전한 상태에 도달한 듯한 요즘 시들이 오히려 절망스럽다는 의미이다. 이상(李箱)의 말대로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가 절망을 낳는 악순환이 요즘 시에서 발견된다.
그런 악순환의 느낌은 요즘 시들이 시 작품으로서 넘어서야 할 한계를 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는 데서 온다. 그것이 바로 왜소함이며 동시에 그것은 작품의 사물화이다. 미적 구도의 완벽함, 완결성 등은 작품을 절대적인 독립된 것으로 느끼게 하면서 동시에 조그맣고 아름다운, 그러나 죽은 사물처럼 느끼게 한다. 이것은 작품의 분량이나 소재와는 무관하다. 시가 추구하여야 할 더 높은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을 돌파해 나가지 못하고 어떤 지점에 안주해 있는 느낌이 왜소함의 정체이다. 이런 느낌은 우리로 하여금 시가 획득하여야 할 또 다른 차원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백석의 경우를 들어 풀어나갈 수 있다.
백석은 그다지 많은 시를 남기지 않은 시인임에도 아주 높이 평가되는 시인이다. 그러나 그가 《사슴》이라는 시집만 남긴 시인이었더라면 그는 결코 좋은 시인으로 기억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기이한 모더니스트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즉 토속적인 내용을 모던하게 묘사해낸 이미지즘의 한 왜소한 아류로서 말이다.
갈부던 같은 약수(藥水)터의 산(山)거리엔 나무그릇과 다래나무지팽이가 많다
산 너머 십오리(十五里)서 나무뒝치 차고 싸리신 신고 산비에 촉촉이 젖어서 약물을 받으려 오는 두멧아이들도 있다
아랫마을에서는 애기무당이 작두를 타며 굿을 하는 때가 많다
이 작품은 《사슴》이라는 시집 마지막에 실린, 약수로 유명한 함경도의 ‘삼방’이란 산골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이것은 이전에 발표한 〈산지(山地)〉(《조광》 1935. 11)라는 작품의 일부 구절을 추려내어 만들었다. 이 작품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면, 이런 수정에 담긴 의도를 살펴보면 백석의 시학을 재구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즉 〈산지〉에서 〈삼방〉으로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그의 시학을 읽는 일이 된다는 말이다. 원래 〈산지〉는 총 7연의 작품이다. 이 중 1연, 5연, 7연을 재구성한 것이 〈삼방〉이다.
이런 수정에서 먼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설명의 생략이다. 이 시의 2연과 3연 사이에, 최초 발표작에는 두멧아이들이 약물을 받으러 온 것을 보고 시적 화자가 짐작하는 “아비가 앓는가부다/ 다래 먹고 앓는가부다”라는 한 연이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은 시집에 실리면서 사라졌다. 그것은 그 설명이 〈삼방〉의 2연에 대한 것으로 한정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식의 설명이 붙자면 3연에 대한 설명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마을에는 굿을 많이 할 정도로, 즉 초월적인 힘을 빌러 치료할 일이 많을 정도로 까닭 모를 연고로 앓거나 죽는 사람이 많다는 설명이 그것이다. 작품 수정은 이런 식의 설명을 제거하고 그 대신 제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곳은 다른 곳이 아닌 약수로 유명한 ‘삼방’이라고. 애초에 〈산지〉가 삼방약수터의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하여도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시적 효과에서 이 구체적인 지명이 작품 속에 빠진 풍경을 잘 보완해주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다래나무지팽이’의 주체화이다. 원래 이 구절이 포함된 〈산지〉의 1연은 “갈부던 같은 약수터의 산거리/ 여인숙이 다래나무지팽이와 같이 많다”로 되어 있다. 애초에는 ‘다래나무지팽이’가 여인숙이 많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보조물, 즉 비유기표(기존의 용어로는 ‘보조관념’)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삼방〉으로 오면서 이 비유기표가 주어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게 하면서 설명적인 느낌도 줄고 사물의 물질성이 전면에 나타나는 효과도 지닌다. 약수를 찾아오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약수터의 ‘산거리’에는 여인숙도 많을 것이고 당연히 거기에 투숙할 사람들이 들고 왔거나 사용할 나무그릇과 지팡이도 많을 것이다. 원래의 표현에서 사람이 북적이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여인숙을 등장시키고 거기에 보조적으로 지팡이를 언급할 때, 지팡이가 지닌 사물의 물질성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인숙이 사라지고 “나무그릇과 다래나무지팽이”가 등장하면서 이 시에서 사물, 혹은 풍경의 물질성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여인숙은 구체적인 이미지를 지니지 않고 있는 관념적인 것이기 때문이라는 판단도 여기에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보통 관념적인 것, 비물질적인 것이 비유기의(원관념)가 되고, 그것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데 동원되는 것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지닌 비유기표이다. 이 수정된 시는 그런 비유기의를 지워버리고 비유기표만 남겨둔 셈이다.
이와 같은 수정은 그 당시 백석이 추구하였던 시의 방향을 암시해준다. 즉 시는 설명적인 것을 줄이고 사물의 물질성을 전면에 부각해야 한다는 생각이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였던 모더니즘의 시학과 어느 정도 연계되어 있다. 물론 사물의 물질성을 드러내는 표현은 전통적인 한시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러나 한시에서 선경후정이니 하며 사물 자체의 물질성에 전적인 가치를 두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이런 방식은 모더니즘, 그중에서도 이미지즘의 수사학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삼방〉에서 설명이 사라진 것은 풍경 그 자체를 드러내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풍경이 풍경으로 하여금 설명하게 하는 것이 이미지즘이다. 그런데 이처럼 풍경 혹은 사물의 물질성이 전면에 놓이면 인간의 사유나 사상 등이 최대한 억제될 수밖에 없다. 〈삼방〉이란 시가 왜소하게 보이는 것, 즉 미적으로 완벽한 왜소한 사물로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가 소품의 형식을 지닌 것은 별개의 문제다. 좀 더 긴 〈산지〉라는 시도 결국 마찬가지 방법론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풍경과 사물의 물질성에 초점을 맞추는 시적 방법론이 사상과 사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김광균이 이미지즘을 옹호하면서 말한 “형태의 사상성”(김광균 〈나의 시론―서정시의 문제〉 《인문평론》 1940. 5)이라는 표현에서 반증된다. 김광균이 말하는 형태란 시를 쓸 때 행과 연을 나누는 데 고려되어야 할 “효과측량” “의식하고 계산하고 사고하며 자연발생 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산질서”를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형태의 사상성’은 최소한 주제나 의미 내용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미적 형식 및 방법론의 문제이다.
김광균이 ‘형태’에다 ‘사상성’이란 어휘를 덧붙인 것은 미적 형태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이 용어 이면에는 형식 자체의 변화만으로 사상성이 담길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형태에 사상성을 부여하는 이런 용어법은 형식의 문제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지위를 획득함을 의미한다. 이런 시도는 기존의 내용 우위의 경향파 문학이나 감상적인 상징주의의 범람에 대해 형식의 가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창작 과정에 대한 의식, 의식적인 제작성을 바탕으로 하는 형태의 사상성은 그동안 내용에 주어졌던 사상의 가치를 형식 및 방법론에 부여하고자 하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라는 이분법이 그동안 내용 위주이거나 적어도 내용에 더 기울여진 경향을 보여주는 분류법이었다면, 형태의 사상성은 그런 방식에 대한 회의를 적극적으로 보여주며 형식 및 방법론에 무게를 두는, 형식 자체에 내용의 몫까지 포괄시키는 새로운 명명법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형식 혹은 형태가 그 자체로 사상성을 지닐 수 있다는 이 믿음이야말로 우리 시의 방향을 왜소한 지점으로 이끈 패착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은 모더니즘이야말로 우리 근대시의 진정한 기원이라 주장하는 논의에 의해 강력하게 확산되어 갔다. 이는 결국 시의 미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관점으로 이어져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은 시, 자신의 사유나 사상을 형상화하는 시에 대한 거부감을 형성하게 했다. 이런 경향에 잠재하는 미적 자율성에 대한 옹호가 작금의 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친-랑시에르적 담론에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미 다른 곳에서 밝혔듯이 랑시에르의 논의야말로 이런 미적 자율성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탈정치적 논의이기 때문이다.
백석은 초기에 이미지즘적 기법에 깊이 침윤되어 있었다. 초기 시는 풍경과 사물의 물질성을 강조하는 데 바쳐진다. 토속성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그의 시도 이런 인식의 연장선 위에서 창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령 〈가즈랑집〉 〈여우난곬족〉 같은 시에 등장하여 독해를 끊임없이 방해하는 수많은 낯선 사투리도 어릴 적의 풍속을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재현하기 위해, 즉 풍경의 물질성을 가장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방해의 전략’의 하나이다. 이것은 형식주의에서 말하는 ‘고의적으로 방해받는 형식(deliberately impeded form)’이나 아이스테인손의 ‘방해의 미학’과 같은 것이다. 언어의 투명한 전달력을 방해하는 사투리를 ‘낯설게 하기’의 전략 속에 적극적으로 가져온 것은 백석의 창의성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물론 사투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시가 이를 통해 복원하고자 하는 과거적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을 수 있지만, 《사슴》 시의 전체적인 성격으로 볼 때 이것은 방법론적 차원에 더 초점이 놓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더니즘 이론의 기수인 김기림이 백석의 이 시집을 높이 평가한 것도 이런 성격에 주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갖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겁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돈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된 슬픈 역사가 있다
마지막 연의 문장이 다소 어색하기는 하나(‘모닥불은―슬픈 역사가 있다’는 일종의 비문), 이 시에 등장하는 “슬픈 역사”라는 표현은 이 시를 예사롭지 않게 읽게 한다. 그것은 모닥불이 지닌 절대화합의 정신과 맞물려 시적 차원을 상승시키는 효과를 지닌다. 이 때문에 이 시는 사물의 물질성을 부각시키는 다른 시와는 다른 차원에 놓이는 것이다. 이 시가 예외적인 것은 사물의 물질성을 약화시키는 설명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설명은 주관의 적극적인 개입이며, 그것은 또한 자신의 사유의 적극적인 발현이다. 이 시는 사물의 물질성에 억눌리지 않은, 즉 미적 세련성에 소화되지 않은 주관적 사유의 흔적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시가 폐쇄적인 체계를 지닌다는, 그래서 시에서는 대화성을 찾을 수 없다는 바흐친의 생각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에는 풍경의 물질성을 드러내려는 미적 자율성의 목소리와 자신의 사유를 발현시키려는 사상성의 목소리가 긴장을 이루고 있다.
이 시집 이후 백석의 시는 미적 세련성을 안은 채 설명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미적 세련성은 하나의 기법인 이상, 획득한 순간 문학의 좋은 자양분이 된다. 따라서 미적 세련성은 초월이나 억제의 대상이 아니라 포월(包越)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즉 껴안고 넘어서야 할 대상인 것이다(미적 자율성의 포월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로 정지용을 들 수 있다. 이 점에서 백석과 정지용은 유사하며 동급에 놓인다.). 이런 포월을 통해 백석이 도달한 시가 바로 〈북방에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다. 이들 작품 속에는 시인의 넓고 깊은 사유가 잘 담겨 있다. 전자는 시원적(始原的) 상상력을 통하여 민족의 역사를 압축하여 보여주는 폭넓은 스케일을 통해, 후자는 운명을 마주하고 그것과 대결하는 의지적인 자세를 통해 문학작품이 궁극적으로 도달하여야 할 숭고를 형성하고 있다. 이 작품들이 《사슴》의 시들을 구원하였으며, 백석을 구원하였다.
사물의 표면성, 피상적인 물질성에 집착하고 삶(이는 곧 사유이며 사상이다)과 유리된 미적 완결성에 갇힌 백석의 초기 시는 그 자체로 세련된 작품성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문학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미적 세련성만이 절대적인 기준이라면 근대 초기에 이런 기준에서 높은 차원에 도달한 이장희의 시나 이미지즘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김광균의 시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방법론적으로 완결된 이들의 시는 무엇인가 미흡한 감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이들을 현대의 주요 시인으로 꼽는 데 주저하게 한다. 시가 왜소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방법론이 자신의 사유를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미적 세련성을 사상을 억압하는 데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시는 미적 세련성에서는 최고조의 단계에 올라와 있다. 시의 기준이 미적 세련성이라면 지금 우리는 시의 전성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네오이미지즘시나 잔혹시(혹 미래파라 하는) 등이 이런 세련성의 최고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시에서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기갈 같은 것을 느낀다. 그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시의 왜소함을 넘어설 폭넓은 육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시가 도달한 지점은 바로 이런 곤경이다. 이제 미적 세련성을 포월하며 다음 차원을 개척해야만 하는 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미적 완결성이 주는 안정감을 떠나는 데서 생기는 두려움을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시, 혹은 문학에 대한 전혀 새로운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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