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30) 비극적 장엄미 |
고래가 있었다
박미라
붉은 장미*의 기억을 끝으로 바다를 접는 고래.
붉은, 호흡을 꺼내 구름을 탁본한다
자신이 끌고 다닌 하루의 기록을 찾아보지만 탁본 속에는
주어도 서술어도 생략된 비문(非文)만 가득하다
겨우 찾아낸 꽃잎 문양 수의를 혼자 입기 어려워서
꼬리를 들썩이다가 눈동자 속 파도를 꺼내 보다가
바람이 뜯어먹던 발자국을 지나고 백사장이 구워낸 해당화 그늘을 기웃대며
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을 이정표 삼아 아는 길을 가듯 간다
쓰러진 채로 고개 끄덕이는 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자꾸만 돌아보며 바다 쪽으로 길을 잡는다
끼니를 잊은 철학자처럼 느릿느릿 잠 속으로 빠져드는 고래
낯익은 물결을 만났을까 잠깐 웃음이 스친 듯도 한데
몸속에 남아 있던 바다가 쿨럭, 외마디를 내뱉는다
제 몸에서 나오는 뜻밖의 비명에 놀란 잔등이 푸르르 떨린다
물의 기록이 겹겹이 쌓인 몸속 제 그림자의 그늘이 깊어 몸살을 앓던 중이었거나
다만, 쉴 곳을 찾던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뱃전을 따라 낯선 길을 나서려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래 꿈꾸던 어둠 속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가는 제 몸이
신기하다는 듯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머리를 흔들어 보는데
너무 멀어, 바다는 고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어디서 실컷 싸우다 온 사람처럼 목이 콱 잠긴 오후
처음인 것들이 맨 나중을 설명하는 그곳에
고래가 있었다
* 붉은 장미 : 죽음의 순간 고래의 숨구멍으로 치솟는 핏물을 부르는 선원들의 말.
# 시적 주체의 시야에 한 마리 고래가 들어온다. 최후의 순간을 눈앞에 둔 고래의 모습이 화자의 정치한 시선에 포착된다. 해상도 높은 카메라가 꽤 먼 거리에서 고래를 추적한다. 그런데 고래의 마지막 행로는 단순한 죽음의 과정이 아니다. 그 위에 삶의 무늬가 겹친다. 일상의 평면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그대로 주저앉아버리는 일차원의 시들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고래는 서서히 시적 주체 안으로 진입하여 장엄한 생멸의 서사로 확장되고, 비문(非文)으로 가득한 생은 비극적 정조와 만나 발화한다. 처연하게 이어지는 시적 정서는 짙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행로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지속된다. 화자는 상주처럼 고래의 뒤를 따르며 죽음의 전과정을 낱낱이 묘사하면서 한 편의 죽음의 드라마를 완성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마지막 숨을 놓는 순간까지 고래는 주변의 풍경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점점 의식은 흐려지고 “몸의 말”은 희미해진다. 조금씩 죽음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이 슬프고, 비장함마저 느끼게 한다. 마지막으로 잠깐 얼굴에 스치는 “웃음”의 선연한 전율, “몸속에 남아 있던 바다가 쿨럭”하는 순간의 “외마디”를 끝으로 최후의 순간을 조용히 끌어안는 고래의 모습에서 비극적 장엄미는 한껏 고조된다. “맨 나중을 설명하는 그곳”에서 독자들은 고래의 죽음과 정면으로 대면한다. 먹먹하다. 단순한 동물의 죽음이 아니다.
생멸의 현장을 파노라마 기법으로 전경화하여 확보한 삶의 실체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고래와 동행한 시적 주체는 마지막 행에 도달하여 대상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시의 격을 아는 솜씨다. 대상에 함몰되어 징징거리지 않고 아닌 척 태연히 돌아선다. 그러나 독자들은 쉽게 돌아서지 못하고 한동안 시의 자력에 붙들려 서 있다. 이것이 이 시의 힘이요 매혹이다.
주위에 고래를 노래한 작품들은 많지만 스스로의 과도한 힘에 실족한 시들이 대부분이다. 생명과 환경 메시지를 강조하다가 목에 힘을 주고 독자들을 가르치려 한 결과이다. 이 시는 주장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체험의 압력이 강하여 언어가 직설적으로 돌출한 시도 아니다. 끝까지 균형과 장력을 유지하면서 시적 긴장을 포기하지 않은 시다. 한 마리 동물의 죽음을 통해서 존재의 내밀한 질서를 빈틈없이 그려내고 비극적 장엄미를 구현한 시가 「고래가 있었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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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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