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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색 궁전이 있는 도시로 널 데려갈 수 있을 것 같다
겨울과 저녁 사이
밤색 털 달린 어지러운 입맞춤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광활한 사랑의 벨벳으로 모든 걸 가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 같다
배고픈 갈매기가 하늘의 마른 젖꼭지를 심하게 빨아대는 통에
물 위로 흰 이빨 자국이 날아가는 것 같다
이 도시는 똑같은 문장 하나를 영원히 받아쓰는 아이와 같다
판잣집이 젖니처럼 빠지고 붉은 달 위로 던져졌다
피와 검댕으로 얼룩진 술병이 흰 비탈에서 굴러온다
첫 시집의 변치 않는 한 줄을 마지막 시집에 넣어야 할 것 같다
청춘은 글쎄…… 가버린 것 같다
수천 개의 회색 종을 달고서 부드러운 노란 날개 하나
천천히 날아오르는 것 같다
가난한 이의 목구멍에 황금이 손을 넣어 모든 걸 토하게 하는 것 같다
초록빛 묽은 토사물 속에 구르는 별들
하느님은 가짜 교통사고 환자인 것 같다
천사들이 처방해준 약을 한 번도 먹지 않은 것 같다
푸른 캡슐을 쪼개어 알갱이를 다 쏟아버리는 것 같다
안녕, 안녕, 슬레이트 지붕의 부서진 회색 위로 눈이 내린다
내가 보았던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 같다
달에 매달린 은빛 박쥐들의 날개가 찢어 내리는 것 같다
삶은 찰나와 영원 사이에서 요동친다. 실은 찰나는 현실이고 영원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영원은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찰나를 우주적 규모로 무한 확장하는 것은 아닐까? 시간을 무한 공간으로 바꿈으로써 영원은 찰나 속에서 오롯하다. 눈을 감고 상상하라. 우리는 상상 속에서 연속적 시간의 질서에서 벗어나 영원의 한가운데를 헤엄칠 수 있다. 영원은 찰나 속에서 나타난다. 아마도 시인만큼 영원을 잘 느끼는 부류는 없을 것이다. 시인은 상상하는 천재들이니까!
어제 저녁에 먹은 밥을 오늘 저녁에 다시 먹고, 어젯밤에 잔 잠을 오늘 밤에 다시 잔다. 밥과 밥 사이, 잠과 잠 사이에 삶은 있다. 삶은 밥과 잠을 포괄하며, 모든 사이를 삼켜버린다. 그 사이들로 무한하고 불연속적인 시간이 흘러간다. 그것은 “겨울과 저녁 사이”일 수도 있고, 낯익음과 낯섦의 사이일 수도 있고, 이미 가버린 청춘과 앞으로 다가올 중년의 사이일 수도 있다. 사람은 “죽음과 삶의 자장(磁場) 사이”(〈나의 친구〉, 《우리는 매일매일》)의 존재다. 사실을 말하자면, 삶은 무수한 사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이들을 가르고 감싼 피부는 시간이다. 사람은 시간이라는 피부로 감싸인 존재다. 피부는 존재를 감싸는 막(膜)이고, 피부는 곧 첨단 자아다. 다시 말해 사람은 저마다 피부자아(프랑스의 정신분석학가인 디디에 앙지외가 제안한 개념으로, “이것은 발달의 초기 단계에서, 아기의 자아가 신체 표면의 경험을 바탕으로 심리적 내용물들을 담아주는 자아로서 스스로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형상이다”라고 설명한다. 피부자아는 피부가 가진 고유의 수용성 감각을 바탕으로 하는데, 이때 자아는 경계선[심리적 방어기제]을 만들고, 교류들[이드, 초자아, 외부 세계]을 걸러내는 이중의 기능으로 작동한다. 디디에 앙지외 《피부자아》, 인간희극, 2008)로 살아간다. 사람에게 세계와 물리적으로 맞닿아 있는 피부는 표면이 아니라 심층이고, 심층의 자아에 대한 환유물이다.
〈이 모든 것〉에는 내가 보았던 세계의 모습들이 열거된다. “배고픈 갈매기가 하늘의 마른 젖꼭지를 심하게 빨아대는 통에/물 위로 흰 이빨 자국이 날아가는 것” 같은 바다와, “판잣집이 젖니처럼 빠지고 붉은 달 위로 던져”지고 “피와 검댕으로 얼룩진 술병이 흰 비탈에서 굴러”오고 “슬레이트 지붕의 부서진 회색 위로 눈이 내”리는 가난과 불평등이 엄연한 도시가 있다. 이 장소들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있고, 그 삶의 안쪽 깊은 곳까지 작동하는 폭력적인 자본이 있다. “가난한 이의 목구멍에 황금이 손을 넣어 모든 걸 토하게 하는 것 같다”는 구절은 진부하지만, 그 의미는 또렷하다.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자본의 억압과 반도덕성이라는 의미를 드러내 보이려는 것 같다. 이것들은 생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인 것 같다.
약간 주저하면서 조심스럽게 “청춘은 글쎄… … 가버린 것 같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때 청춘은 시간에 앞선 시간이고 현재의 현재이며, 존재의 역동이고 기쁨의 솟구침이다. 즉 우리가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지복(至福)을 뭉뚱그려 집약한 다른 이름이다. 그게 순식간에 가버렸다. 청춘은 그것을 잃고 그 의미를 반추할 때 비로소 생동한다. 청춘은 과거가 된 뒤 비로소 행복의 부스러기들을 위한 소비재가 되고 만다. 우리는 이제 기껏해야 삭막하게 “N개의 기억”(〈N개의 기억이 고요해진다〉)을 갖고 산다. 시간이 흐른 뒤 기억은 조작된다. 우리가 믿고 싶은 방향대로 기억은 제멋대로 각색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에 기반하는 삶이란 것도 얼마든지 왜곡이 가능하다. 여러 가지 생각과 관념을 풀어놓은 많은 문장이 “~ 것 같다”로 끝나는데, 그것은 시적 자아가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분명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애매모호한 채 의심 위로 미끄러진다. 결국은 “내가 보았던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 같다”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때 거짓말이란 진실의 왜곡이 아니라 있어야 할 꿈을 머금지 못한 현실의 모든 것이 뒤집어쓰고 있는 공허를 말한다. 이 세계의 많은 부분은 거짓말에 의해 지탱된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거짓말을 한다. 우리는 거짓말로 자신의 배를 불리고 거짓말로 서로를 부양한다. 거짓말은 항상 더 나쁜, 더 칙칙하고 어두운 삶의 전조(前兆)다. 거짓말이라는 누추한 그물 속에 포획된 일상들. 거짓말로 이루어진 세계. 이것에 진절머리를 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것을 참고 견디며 바라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느님은 가짜 교통사고 환자”가 아닐까, 라는 의심에서 시인의 유머가 흘러나온다. 가짜 교통사고 환자들은 피해보상금을 타먹기 위해 병원에 입원한다. 그들은 병원에서 하릴없이 빈둥거린다. 이 가짜 환자를 모든 것을 주재하는 하느님에 견주다니! 이 세계에 편재해 있는 가난과 불평등, 자본주의의 탐욕들이 하느님이 가짜 교통사고 환자 같이 빈둥거리고 있다는 증거다. 이 누추한 삶과 거짓말의 세계를 덮으며 눈이 내린다. 눈은 “달에 매달린 은빛 박쥐들의 날개가 찢어내리는” 은유를 얻으며 생동한다. 하느님은 가짜 환자로 빈둥거리고 눈은 내려와 이 거짓말의 세상을 덮는다. 모든 것이 거짓말 같지만, 눈 내리는 어느 겨울의 잿빛 풍경, 이것은 생생한 현실이다.

진은영(1970~)은 대전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 <문학과 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훔쳐가는 노래》 등의 시집을 냈다. 니체 철학을 공부하고 그것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 재능 있는 시인은 1980년대라는 불의 연대를 통과하며 “문학과 정치, 영혼과 노동, 해방에 대하여”(〈멸치의 아이러니에 대하여〉) 사유하면서 청춘의 시기를 보낸 사람이다. “세상의 절반은 노래/나머지는 안 들리는 노래”(〈세상의 절반〉)라고 할 때 시인은 안 들리는 노래를 듣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존재다. 한 시인에겐 그 내부에 여러 시인이 공존한다. 시인은 “나에게는 다섯 명의 시인이 있지”(〈앤솔러지〉, 《우리는 매일매일》)라고 말한다. 그중에서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를,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을, “엘뤼아르보다 박노해”를, “연필보다 망치”를,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을 더 좋아하고, 혁명과 철학이 좋았다고 말하는(〈그 머나먼〉) 한 명을 만난다.사진제공 : 창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