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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평 시] 자유로워지라, 자유로워지라 / 신진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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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자유는 미적 주체의 조건이다. 그러나 자유란 현실 자체를 완벽하게 극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타율적인 삶, 이를테면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성 자체를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득이 곧 선(善)이라는 자본의 윤리가 모든 곳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칸트가 말했듯, 자유란 그것의 불가능성 속에서 오기 때문이다. 자유에의 명령은 인과의 그물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서’ 태어난다. 삶의 그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의 한계가 곧 자유의 조건이다. 미적 자율성 안에는 언제나 이미 자유의 불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타자’라는 존재 속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칸트와 함께 이야기한다면, 미적 주체에게도 타자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타자의 전 존재가 주체의 불가능성을 증명한다. 타자는 죽은 혹은 태어나지 않은 존재를 포함한다. 그러나 타자는 주체의 진정한 가능성이다. 타자에 의해 부자유는 자유를 의지하는 하나의 조건이다. ‘자유로워지라’는 미적 정명이 윤리적 실천이 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여 시인은 끊임없이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모든 것, 자유와 부자유, 자율적인 것과 타율적인 것,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해 남김없이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상상이라는 증언
시는 삶 자체를 증언하기 위해 우선 일상적인 맥락으로부터 사물을 떼어낸다. 이를테면 하나의 단어 혹은 풍경을 통상적인 문맥으로부터 분리하여 괄호를 친다. 괄호 쳐진 사물 혹은 단어는 그 이전부터 존재해 오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일상적인 맥락 자체를 고수할 수 없다. 이제 그것은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어떤 것으로 새롭게 존재한다. 이는 시인이 주목하는 대상에 대해, 그 자신이 지닌 개인적 관심 자체를 거두어들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에 머물지 않는다. 사물에 괄호를 치는 동시에 이 괄호를 걷어내기 때문이다. 즉, 시적 상상은 사물이나 단어에 괄호를 침으로써 잠시 동안 가능해진 미적 자율성 자체를, 괄호를 걷어냄으로써 삶의 맥락 속에서 다시 사유한다. 시적 상상이 제약 없는 시공간을 향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구체적인 인간의 삶을 증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나무에 올라갔는데 혼자 몰래 올라갔는데 내가 올라가자마자 나무는 구불구불 휘어지기 시작한다.
어떻게 낭떠러지를 만드는 거니?
너는 나무를 유지하고 너는 하늘을 어루만지고 있구나, 하늘을 고정시키는 법을 알고 싶었다.
이를테면 눈을 감고 뼈로 돌아오는 법
나는 자꾸 손을 뻗게 된다. 나무 위에서 나무를 상상하게 된다. 다시금 조용해 보이는 곳을 선택한 것인데 한숨을 내쉬고 오후를 보내려 한 것인데
오후는 가지 않고 어쩌면
이수명의 시 〈나무에 올라갔는데〉는 이러한 시적 상상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시에서 ‘나무’는 이제까지의 나무가 아니다. 이를테면 나무는 “낭떠러지”다. 간신히 나무임을 유지하고 있는 나무. 따라서 나무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는 지워진다. 푸르고 영원하며 무한한 자연의 표상이자 인간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나무는 없다. 나무는 기존의 의미체계로부터 이탈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는 사물을 그것이 존재해 오던 상투적 맥락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발생한다. 인류가 나무에 대해 습관적으로 가지는 재현 체계가 괄호 쳐진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상상을 중지시킨다. 시인은 나무에 대한 은유를 멈춤으로써 나무의 불안을 만나고자 한다. 물론 나무의 불안이란 인류의 불안이다. 나무가 사라진 이후의 인간.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타자들의 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점에서 이 시는 나무의 삶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것과 연결된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나무가 꿈꾸었던 하늘 또한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인간이 꿈꾸어 온 모든 것의 소멸을 의미한다. 나무가 서 있는 맥락은 나무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무를 통해 연결된 모든 세계의 종말을 뜻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시는 일상세계를 괄호 침으로써 의미와 지시대상을 분리시키고 이를 통해 다시 삶의 맥락들을 쇄신한다. 사물과 언어의 재배치를 통해 시인은 인간의 자유와 부자유를 남김없이 인식하고자 한다. 또 다른 시를 보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내 쪽으로 뛰어왔다 도망치고 있는 것 같아서 같이 뛰었다
사람들은 정신이 없고 정신이 없는 사람들은 평소보다
뛰어오는 사람들을
무엇을 겪었지? 무엇을 겪었냐는 물음을 평소보다 솔직하게 죽음이 싫고 실제로 본 것만을 털어놓아서 평소보다 사람들이 순수하였다
담백하고 순수한 것만 자꾸 겪었다 길에서
사람들이 꾸밈없고 순수하지요? 저랑 같이 사람들을 관찰할래요? 사람들의 행동들을 기록할래요? 쿨가이가 물었고 나는 쿨가이의 머리통이 터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잔인하고 끔찍한 일도 잔인하고 끔찍하게
성경처럼
사람들은 담담한 문체를 좋아하고 나는 자기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전혀 순수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머리통이 있을 자리에 머리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승일의 시 〈인신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다. 이 시는 사물이 아니라 풍경 자체를 괄호 친다. 대도시 어디에서나 존재할 법한 일상적인 거리 풍경을 본래의 맥락에서 떼어냄으로써 낯설고 기괴한 풍경으로 만든다. 이 풍경의 핵심은 동질성에 대한 의문이다. 이제까지 인류가 추구했던 다른 삶은 역설적으로 동일한 삶에 대한 모방으로 변질되었다. 근대 이후 거의 영역에서 찬미되었던 ‘차이’들이 차이를 욕망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가령 도시인의 삶은 복잡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유사하다. 현대인이 마치 하나의 전체처럼 살아 움직인다는 점에서 그 어떤 시대보다 공동체적이다. 자본주의는 소멸된 공동체의 잔영, 즉 차이보다는 동질성을 통해 소속감을 강화하는 공동체적 질서를 전유한다.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이미 하나의 종교이다. 자본주의는 신도들에게 같은 두려움, 같은 욕망을 주유하고 또 같은 구원과 처방전을 제공한다. 누군가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가면 함께 덩달아 뛰어가면 그만이다. 비평할 필요가 없다는 이점이 있다.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이득도 있다. 그만큼 자본주의는 “성경”처럼 은유적이다. 어떤 것도 잔혹하게는 묘사하지 않는 우회적 노련함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이러한 거짓 소속감이 현대인에게는 유일한 안정감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를 물신들과 함께 거리에 전시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상품의 지위로 전락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많은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인간과 사물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다. 머리통이 없는 인신(人神)의 세계가 펼쳐진다. 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괄호를 쳤던 풍경을 현실 속에 다시 풀어 놓는다. 그리고 비평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시인은 이 가혹한 풍경으로부터 자신을 제외시킬 수는 없다. 분명 세계를 떠난다는 상상은 존재를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시적 상상의 조건은 어떤 의미에서 구원의 불가능성에 있다. 구원 가능한 삶은 자본주의의 거짓 동질성만큼이나 거짓 안정감을 줄 뿐이다. 따라서 현대 젊은 시인들의 시의 주요 정서인 낭만적 지향성은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가령 김중일의 시 〈나의 작은 미행 일지〉가 그러하다. 과연 이 미행이 끝나긴 할까,
시침이 분침을 분침이 초침을 미행하듯,
나의 작은 미행의 기록들,
박수소리에 깜짝 놀라 내가 세상 속에 처음 눈떴을 때,
미행이란 몸의 은닉을 필요로 한다. 자신을 숨기지 않으면 미행은 성립되지 않는다. 시인이 그렇게 하는 것은, 미행하는 대상이 감각할 수는 있지만 부재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추구하는 대상은 만질 수 있을 것처럼 가깝지만 투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따라서 시인의 미행은 고독하다. 그가 걸어가는 길은 이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길이다. 동행 또한 있을 수 없다. 모든 길의 끝은 적막이다. 그렇다면 미행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부재하는 존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낭만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낭만적 인식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불가능한 미행을 계속한다는 것은 현존하는 삶의 질서에 대한 거부의지로 읽을 수 있다. 즉, 그것은 불가능을 의지한다는 것인데, 이는 미적 자율성의 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미적 자율성은 모든 인과의 필연성에 얽매인 부자유를 조건으로, 자유로워지라는 불가능한 명령을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끝까지 새벽을 따돌리며 저녁을 미행했다.” 시인은 이 불가능한 미행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멈출 생각 또한 하지 않는다. 시인은 시 쓰기를 “작은 미행의 기록들”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시가 어떤 완성된 실체에 대한 기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가 될 수 없다. 미행하는 과정, 그 길의 ‘흔적’만이 언어이다. 어떤 형상도 완전하지 않다. 사라진다.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잠깐 동안 남겨지는 “얼얼한 손바닥” 같은 것만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미행하는 몸은 “바람”이다. 바람은 지상의 온갖 속박 속에 머물지만 자유를 의지하는 미적 주체의 본질적인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람은 아주 오래된 낭만적인 농담들과 김중일 시인이 연결된 지점이기도 하다.
혀 끝에 남은 말들이 하나씩 공중에 올라
나의 귀가
어떤 생들이 겪는
우리 자신의 밝기를 스스로 증명할 수 없는
우리는 우리를 되비추는 종족으로서
지구에 뚫린 하나의 구멍 위에
하재연은 스스로의 삶의 근원을 자기 안에서 찾으려 한다. 세상은 언제나 춥고 낯설다. 밤하늘에 “다만” 빛나고 있는 폴라리스와 같이 그것은 세상의 모든 남겨진 말들이다. “스스로 증명할 수 없는” 그러므로 어떤 것도 “증가시킬 수도 없”는 비자본주의적인 말들. 그것은 결코 어떤 이득도 취할 수 없는 무익성에 스스로를 정초한다. 계산될 수 없기를 희망한다. 시인은, 발음되지만 번역할 언어를 지니지 않은 교환할 수도 교화할 수도 없는 말들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0개의 시간 속에 튕겨져 나온 그림자들”에게 이상하게도 이 추위는 낯설지 않다. 느낌은 언제나 “복수(複數)”이다. 이질적인 것의 공통감각이 존재한다. 보이지 않지만, 세상 어디에서도 감지되는 모순된 감각.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만일 이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언어는 그 존재 바탕을 잃고 말 것이라는 점이다. 세상의 모든 말이 표면만을 지녔다고 상상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말해질 수 없는 말이 없다면, 삶은 전체주의적 기계와 같다. 언어가 언어일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이해받지 못한 의미의 “검은 구멍”, 무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아름다움은 이 이질적인 것의 결합, 낯섦과 익숙함, 의미와 무의미의 조우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낭만적 거부 의지는 이러한 무의미 자체를 자신의 운명으로 이해한다는 데 있다. 시적 아름다움은 그렇게 출발한다.
미적 자율성은 보이지 않는 타자에 대한 윤리 속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책무가 없다면, 아름다움은 아름다움만을 목적으로 할 뿐이다. 나와 만날 수 없는, 부재하는 존재에 대한 상상을 통해 시는 타자에 대한 책무를 자신의 것으로 떠안는다.
윗입술 아랫입술
어둠이 오면 밝아지는 너
번복 없이 꽃잎들은 피고
나보다 더 아프고 병든 사람이 다가오지 못하게 의자를 지킨다
떠났다 돌아오면 뭔가 달라져 있을 줄 알았어
한동안 시와 정치에 대한 수많은 논쟁이 있었고, 그것은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들은 결국 하나의 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조우는 창조적인 것이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김이듬의 〈파수〉는 이러한 고민들과 함께 읽을 때 더 의미 있다. 이 시에서 말하는 “파수”란 기본적으로 무엇(내부)을 어떤 것(외부)으로부터 지킨다는 소유의 논리인데, 그것은 시 쓰기가 취하는 정치적인 탈소유와 반대편에 서 있다. 물론 모든 시 역시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쓰인다. 지켜내야 할 어떤 내부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로부터 지켜야 할 소유의 대상은 아니다. 시가 지키려고 하는 것은 소유에 대한 포기이다. 이 시에서는 죽은 자들이 지키려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죽은 자들은 사후(死後)에도 어떤 능력 때문에 이승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거절한다. 그들은 이승의 어떤 것도 가지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만날 수 없는 존재(“너”라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둠이 오면 밝아지”고 “주변이 잠잠해지는 순간에 깨어나”며 “시련이나 고통을 환대하는” 너라는 평범한, 그래서 죽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타자)’에 대한 책무. 말하자면 시적 윤리란 “쓸데없고 주체할 수도 없는 능력 때문에/ 겸연쩍고 무안하고 폐가 될까 봐 네 방을 노크할 수 없는” 죽은 자의 마음과 비슷하다. 시인은 말한다.
모든 소유의 근본적인 문제는 나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파수의 의미는 전복적이다. 소유의 논리 속에서 무엇인가를 지키려 하는 것은 시적 파수가 될 수 없다. 윤리란 죽음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는 죽은 자의 것, 보이지 않는 자의 것, 타자의 것이다. 또다시 시에 대해 새롭게 사유해야 할 때이다. 시는 미적 자율성과 인과율 사이에서 어떤 창조적 길 트기를 시작할 수 있는가. 더 고요하게 바닥으로 가라앉아 시라는 모순을 들여다보고 싶다. 그리고 언어의 고독한 깊이를 가늠해 보리라. 시인들과 함께, ‘자유로워지라, 자유로워지라’는 시적 정명을 듣기 위해.
신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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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