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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 시] 경이로운 실패들 / 신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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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세계는 정교하고 섬세하며 거역할 수 없는 편안함이 있다. 고도로 발달된 기술은 현대인이 느끼는 성공감(成功感)의 원인이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윤택하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관계의 영역 역시 무한히 확장되어 가고 있다. 공동체적 근거지를 상실했음에도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지구를 하나의 마을로 느끼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 모든 것 속에는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진보적 역사주의와 감성들이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유토피아는 부정되었으나 그 잔해 위에서 미래에 대한 비전들이 출몰한다. 미래가 희망적이라고 광고한다. 미래에 대한 비관적 메시지는 우리가 갖게 될 상업적 성공에 의해 쉽게 은폐된다. 따라서 실패할 가능성 자체를 성찰할 기회를 잃게 된다.
그러나 마셜 버만이 말했듯, 현대성의 경험은 그 어떤 것도 지속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다. 현재 영위하는 삶의 토대는 곧 허물어질 삶의 배후이다. 거대한 자본주의의 성공 이면에는 그보다 방대한 폐허와 허무, 야만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우리는 알고 있다. 환멸 없이는 성공할 수 없으며, 우리가 누린 그 성공의 환희가 이제 막 공허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우주선은 아름답지만 코맥스 200
곧 쓰레기가 될 이 비닐장갑은
날마다 죽은 연습이라면 어떤가
나는 느낄 수가 없다
어느덧 일회용품은 그 물질성을 넘어 하나의 상징적 보편성에 도달한 것 같다. 가령 ‘일회용’이라는 단어는 문명의 핵심들을 함축한다. 즉 “비닐장갑”은 편리하고 합리적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위생적인 인간 중심적인 삶 전체를 포괄한다. 현대적 삶은 일회용품처럼 새롭고 투명하고 깨끗하고 빛난다. 불편하고 불합리하며 불결한 야만은 극복되었다. 거의 모든 면에서 성공적인 삶이다. 그러나 일회용의 세계는 생명의 무한함을 모방하지만, 진정한 생명이 만들어내는 차이의 진화는 모방할 수 없다. 생명의 주기를 동일성의 반복으로, 차이를 텅 빈 새로움으로 변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회용품의 세계는 생명의 반복과 다르게 어떤 것도 더해지지 않는 뺄셈의 반복이다. 그 결과 모든 영역에서 ‘시간’이 제거된다. 타자를 감각하면서 관계의 영역을 확보하고 단 한 번만 출현함으로써 차원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길고 느린 통로들이 소멸한다. 인류는 이제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는’ 세계에 도달할 것이다. “정적과 암흑의 놀이터”. 차이의 진화가 불가능한 무한히 같은 것만이 되풀이되는 “적막과 허무”의 세계.
현대인의 우울한 감성은 이 세계의 불모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기실 이 불모성이란 인간이 표면적으로나마 완전히 자연을 극복하고 대지의 한계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시인이 암시하고 있듯, 일회용품의 세계는 “우주선”과 같다. 삶의 토대인 대지가 필요하지 않으며, 무한히 생산하지만 감산(減算)되는 세계. 현대인은 잉여를 추구하고, 자본을 축적할 뿐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촉성하는 우주적 소멸, 그 축제적 탕진에 대해서는 순진무구하다. 흙에 발을 대고 살아감으로써 느꼈을 원시적인 안정감과 잔혹한 공포, 그 감각의 생생함과 육체적 통증이 제거된 안전한 삶을 영위할 뿐이다.
사양할 수 없는 퇴폐를 맞는다
비유가 집요해질 때
해석의 간격
그 이야기에는
툰드라, 생소하게 솟아난 초록들
하얀 잎사귀들이
말의 맛마다 식별할 수 있는 요설(饒舌)이 있다
등줄기로 서늘하게 비치는 무더위,
오래 전 멸종한 독이
실패한 것에 대해 자본주의 세계는 매우 가혹하다. 언제부터인가 실패란 곧 멸종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디 실패란 성찰하는 삶의 조건이었으니. 우연한 실패들은 반복되는 삶에 의도치 않은 혼돈을 부여하고, 이것은 시간을 중지시키며 나아가 사유하게 한다. 실패의 과정을 통해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세속적인 믿음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패란 성공만큼이나 단일하다. 풍요와 빈곤 사이에는 어떤 혼돈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패가 부여하는 경이로운 역설들이 제거된다. 이이체 시인이 본 숲의 “혼돈”은 그 점에서 하나의 정신이다. 질서정연하고 경건한 세계로부터 결락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인의 정신. 그러므로 시인은 “퇴폐”를 사양할 수 없다. 조악하고 속되고 무질서한 세계로 진입한다.
이이체 시인은 특이하게도 이 혼돈을 “툰드라” 숲이라 부른다. 즉, 동물이기도 하고 식물이기도 한 초록, 고요하고 생생한 숲의 생명력이야말로 혼돈을 자양분으로 해서만 자라날 수 있다. 몸과 마음 사이에 발생한 “해석의 간격”, 즉 기호와 의미가 분리되는 의미론적 실패야말로 그래서 중요하다. 실패, 불일치, 소요, 그것은 시라는 언어의 “향”이 돋아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땅, 땅, 땅, 파도가 절벽을 때린다.
옛날 칼 만드는 대장장이는 녹은 쇳물을 꺾어 펴며 사만 번쯤 망치질을 했다. 쇠위에 수억 년 퇴적무늬를 만들었다. 저 바다 어디에 폐를 몸 밖으로 꺼내놓고 숨을 밀고 당기며 바람을 풀무질하던 사람들의 혼이 출렁이고 있다.
살갗에 매달린 땀방울이 쇠속으로 스며들면 대장장이가 두드리는 건 철만이 아니었다. 고분 속 야철신의 우주를 통과한 운석의 섬광과 구만리 장천 멀고 먼 몸들을 유전하는 물방울의 기억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모든 것은 스쳐 사라지지만 스치는 표면에서 살아나는 숨결들이 있다. 가장 오래된 숨결이 저무는 바다 앞에서 지금 태어나고 있으니 해안을 향해 밀려, 밀려, 밀려오는 파도소리. 망치와 모루 사이에서 동백 꽃 멍울 터져나오는 소리.
땅, 땅, 땅. 땅을 두드리고 두드려라, 불똥이 살 속을 파고들면 내 몸 속으로도 천지가 흐르려니, 들러붙은 하늘과 땅이 가려운 딱지 속에서 새살로 돋아나려니
원자들이 와글거리는 소리가 서해의 근육을 꿈틀거리게 한다.
이 시는 단어와 이미지 사이에 절개선이나 봉합선이 없다. 실제로 이 시는 다양한 층위의 이미지들을 엮어 놓았지만, 시의 구조가 인위적인 축어 자체를 거부하도록 정교하게 짜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시가 관계론적 세계에 정초되어 있다는 사실과도 잘 부합한다. 여기서 말하는 관계론적 질서란 자연과 인간 사이에 단절이 없는 순환하는 유기체적 삶의 형식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로 본다면 시인은 상반되고 이질적인 것들에 대해 자연이 보여주는 무한한 포괄성을 미메시스(mimesis) 하고 있는 셈이다. 성과 속, 영원과 순간, 신화와 노동, 돌과 꽃, 소요와 적막, 무위(無爲)와 유위(有爲) 사이에는 분할 이전에 강력한 결합의 원시성이 강조된다. 때문에 채석강에서 절벽을 때리는 파도, 대장장이가 쇳물에 망치질을 하는 노동, 야철신의 신화, 동백꽃이 멍울 터뜨리는 고요한 행위가 하나의 통제할 수 없는 원시적 근원에서 만난다. 생은 하나의 기원에서 비롯한 다양한 현상들로 재현된다.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은 우주의 거대한 흐름에서 본다면, 어떤 차이도 없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떻게 여전히 시를 쓸 수 있을까. 일회용품의 삶으로부터 생명의 근육을 상상하고 또 부활시키리라는 무모함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서정은 언제, 어떻게 실패한 삶으로부터 경이로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가.
“저 나무 좀 봐”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나무였다 무수히 뻗어 나온 가지와 잎들이 일대를 완전한 어둠으로 뒤덮고 있었다 어디서 솟아난 것일까 저렇게 큰 나무는 본 적이 없다 그 애의 팔이 자꾸 내 몸에 닿는 것이 신경 쓰인다
“이곳은 누가 선이라도 그어 놓은 것처럼 오늘은 그 애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나온 것인데,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그 애는 말했는데, 그 애는 아무런 말도 해주질 않고
그 애는 어째서 나를 이 깊은 산 속으로 데려왔을까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알 수 없는 모든 것이
나쁘지 않다
나의 마음은 기묘하게 뒤틀려 가고 있었으나 점차 모든 것이 명료하였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곳에는 우리 두 사람뿐이구나
그러한 생각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나무 아래 완전한 어둠 속에 있었다 그 애의 팔이 내 몸을 감싸 안은 채였다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명료하게 미지근한 그 애의 체온이 내게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황인찬 시인의 시 〈서정〉은 사실 특이하게도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저 나무 좀 봐”라거나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라고 말하지만, 기실 “그 애”는 어떤 말도 해 주지 않는다. 설명도 은유도 과장도 없다. 그 흔한 수사도 사용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무엇을 설명하고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이 시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심지어 이 시의 서사는 그야말로 무의미해 보일 뿐만 아니라 어떤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데 실패한 것처럼 보이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시인의 의도는 아마도, 어떤 감정적 전이나 주장도 제거된 상태에서, 의미란 무엇인지 묻기 위해서이리라. 진정한 의미의 전달이란, 말하고 싶은 ‘몸’과 들으려는 ‘몸’이 있을 때에만 성립된다. 의미란 몸과 몸이 맞닿아 느껴지는 체온처럼, 직접적이고 감각적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행위마저 “미지근”하다고 말한다. 적극적인 의미의 해석과 메시지의 구성은 오만하다. 의미를 열어놓는 과정은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가 진정으로 하나의 철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시인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언어를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점은 다른 어떤 것보다 “명료하게” 존재한다. 이는 황인찬 시인이 세밀하지만 의미의 억제가 없는 감성의 흐름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실 시는 어떤 현실적 도움만 못할 수도 있다. 시는 삶을 혁명하지도 못한다. 시의 실패란 문학의 한계와 같다. 그러나 시는 포기되지 않는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시에 대한 요구를 넘어 시가 존재하는 근원적인 토대를 말해주지 않는가. 시는 자본주의 사회가 주목하지 않는 실패들을 성찰한다. 실패한 삶을 성찰의 에너지로 전환시킨다. 이것이 일회용의 세계와 그 환멸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창의적이고 아름다우며 고통을 이해하는 시들이 태어나는 비밀스런 까닭이 아닐까. 의도적인 실패에 대한 추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경이로움이다.
신진숙 |
ㅡ출처 :『유심』(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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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