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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월평 시] 고립이 사람을 아름답게 만든다 / 방민호

문근영 2013. 10. 10. 11:13

고립이 사람을 아름답게 만든다 / 방민호

 

 

 

세상을 끈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끈이 많은 사람을 보면 징그러울 때가 있다. 나는 옛날에 심한 고립감에 괴로워하던 때가 있었으나, 지금은 징그러운 사람이 되었다. 내 몸에서는 너무 많은 끈이 나와 그 끈끈한 점액질 끈으로 이 사람도 엮고 저 사람도 엮고 이렇게도 풀고 저렇게도 맺으며 괴물이 따로 없는 존재가 되어 한세상을 부풀어 오를 데로 부풀어 오른 이스트 빵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면 배고프고 괴롭고 슬프고 아무 데도 의지할 데 없는 것 같은 시풍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정답게, 귀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람이 사람을 불러 서로 사귀며 서로 정을 주며 살아가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다 배부른 끈이 되어 아무리 가난해지려 해도 가난해질 수 없는 지경이 되면 그때 시는 벌써 어려워지고 아무리 잘 써도 별 가치 없는 시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름 있는 시인들에게는 더 인색해지고 이름 없는 시인들에게는 한 번이라도 더 눈길을 주고 싶게 되는 것도 편견의 소치만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시라는 것이 참 보통 것은 아니어서 아무리 외롭고 높고 쓸쓸함을 가장하려 해도 그게 뜻대로 되지 않음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아무리 가난하게 보이려 해도 어딘지 모르게 기름기가 누출되고, 아무리 절박하게 보이려 해도 벌써 느슨해졌음을 노출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시다. 그래서 시는 도 닦는 것처럼 쉼 없이 그것만을 생각해야, 그러면서도 그 안에 자신이 머물러 있지 않으려고 모순적인 의지를 발휘해야 정화된 경지를 얻고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물곰탕 집에서도 보고 지하철역에서도 보고

김창균 시인을 나는 옛날부터 알았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이 글은 아는 사람 소개해 주는 난이 아니고 월평 쓰는 곳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대학원 다닐 때 《심상》에서 해변시인학교 행사를 해마다 했다. 강원도 강릉에도 가고 서해안에도 가고 하면서 해마다 행사를 치르는데, 나도 지도교수이신 박동규 선생님을 따라 십 년은 족히 넘게 다녔다고 보면 된다.


그때 시인들이 참 많이 왔다. 와서는 그냥 술들을 마셔댔다. 왜 마시는지, 무엇을 위해 마시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마시는 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고통과 싸우느라 나대로 2박 3일, 3박 4일을 내내 술통에 빠진 것처럼 보냈는데, 그 못지않게 젊은 시인들이 내내 낮을 밤 삼아 음주 강행군을 했다.

 

그 무렵에 김창균 시인을 만났다. 눈썹도 눈도 까맣게 느껴졌는데 지금도 그러신지 알 수 없다. 벌써 십 년 이상 만나 본 적 없는 것 같다. 어느 날 백담사, 속초 가서 속을 푸느라 박현수 시인, 서안나 시인과 같이 물곰탕을 먹으러 갔다. 내게는 그날이 그날이기 때문에 도대체 언제쯤 무엇 때문에 왜 거기로 갔는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잘하는 집이니 가보라는 권유를 따랐던 것 같기도 하다.

거기서 김창균 시인의 시를 만났다. 반가웠다. ‘아, 계속 쓰시고 있구나. 잘 쓰시고 있구나.’ 벽에 걸린 시를 보면서 이 시인이 지속적으로 시를 쓰고 있고, 운치와 멋을 내는 시인으로 그 동네에서 통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는 서울에서, 내가 늘 잘 다니는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플랫폼에 멍하니 서 있는데 안전 스크린 투명한 벽에 쓰여 있는 시가 바로 김창균 시인의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놓았는데, 보내주고 싶어도 전화번호를 알지 못했다. 


《시로 여는 세상》을 보는데 이번에 좋은 시가 거기에 참 많았다. 그런데 여기서 또 김창균 시인의 시를 만나게 되었다. 다음에 보는  〈마당에 징검돌을 놓다〉가 그것이다.
   
물빛 마당.

마당에 징검돌 몇 개 놓고
발목을 걷으며 걷으며 걷는다
찰랑이는 물결 대신
그 옆에 곁이라는 말도 놓고
돌과 돌 사이의 간격 같은 것도 놓고
아름답지 않았던 한 시절도 놓아 본다
이렇게 돌을 놓고 쭈그리고 앉아
어떤 궁리 같은 것들은 바닥까지 버리며
한발이 닿기 무섭게
다른 발을 떼며
물빛 마당
물빛 마당을
가끔은 깨금발로 겅중겅중 건너뛰며
돌과 돌 사이를 딛는 발끝은
못내 사뿐하다


                 — 김창균 〈마당에 징검돌을 놓다〉(《시로 여는 세상》 봄호)

 

 

《심상》 사람들도 그 사이에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박목월 선생이 창간한 잡지이고 여기에 정신과 재능이 뛰어난 시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1970년대 말에 목월 선생이 타계하고, 1980년대에 순수문학에 참여와 실천을 주장하는 문학 흐름이 강력한 도전을 하는 사이에, 《심상》 동인들은 이렇게도 가고 저렇게도 가는 풍상을 겪었다. 그래도 여러 지면에서 자신의 길을 지켜가는 그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김창균 시인이 그런 사람으로, 그 시는 담담하고 담백하다. 서정적이면서 성찰적이다. 잘 볼 수 없었는데 그 자리에 있었던 시인. 이 시인의 물빛 마당을 나도 보고 싶다. 


어려울 때도 견디며 살아가야 할 일을 생각한다

삶의 빛깔을 말하라 하면 나는 겨울빛이다.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하고 여름산보다 겨울산을 좋아하는 나다. 삶이 화창하고 아름다운 때는 적고 고통스럽고 외롭고 아픈 때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즐거움도 사랑도 종국에는 괴로움과 죽음으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할 때가 많다.


이런 삶을 견디는 방법이 결국은 마음을 닦는 것이다. 꽃이 시들어 있을 때도 살아 있을 뿌리의 마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다가오는 때도 시련이 삶을 물들일 것을 생각하며, 그럼에도 담담하게 그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사람만이 세상 달고 쓴 것에 일일이 시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리라.

 

유종인이라는 시인. 어디서 어떻게 활동해 왔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기가 살아가는 모양을 응시하고 이를 저 가시엉겅퀴 꽃의 뿌리를 생각하며 담담하게 승인하는 태도는 마땅히 주목할 만하지 않나 한다. 이 시의 전문을 먼저 읽어 보자.  

 

발이 차구나,
이 한겨울에
그 한여름 도서관 뒤편 산자락에서 뽑다 놓친 가시엉겅퀴 뿌리를 생각한다
손에는 몇 개의 가시들
살짝 박혔다 계곡물에 씻겨내려 갔지만
여름내 가시몽둥이 같은 보랏빛 꽃대를 밀어올린 엉겅퀴 뿌리는
이 겨울에 눈밭 땅속 살림을 어떻게 견디는지 생각한다
한해살이 두해살이를 넘어
만년 죽음 곁에 우뚝할 청춘을 여투고 쟁이는지 생각한다
사랑이 오면 그것이 꽃만 말고
가시도 내고 시퍼런 가시잎도 내어
나를 찌르고 할퀴며 달려들어 뒹구는 짐승처럼
아직 달달하고 뜨거운 사랑의 피가 몇 종지나 남았느냐고 내게 되묻는 통에
손등과 팔에 흘리며 흘리다 만 피를 입술로 닦아 마시는 날을
가시엉겅퀴 뿌리는 무척이나 훔치고 싶어 언 땅속에서도 갑갑증이 이는가 생각한다
마음을 궁굴리니 줄기며 가지 그보다 먼저 솟는 가시를 이 봄에도 제일 먼저 낼 것인지 생각한다


—유종인 〈가시엉겅퀴 뿌리를 생각함〉(《작가들》 봄호)

 

 

이 시인은 단지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뛰어난 것만은 아니다. 이 시가 보여주는 시행들의 길이며, 표현의 아름다움에 눈이 간다. 첫 번째 연의 마지막 행에 가서 보이는 “여투고 쟁이는지 생각한다”라는 표현에서 ‘여투다’ 하는 것은 어떤 것을 아껴 쓰고 나머지를 모아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쟁이다’ 하는 것은 어떤 것을 차곡차곡 포개어 쌓아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감에서 시적 화자가 느끼는 현실인식의 긴장감 같은 것을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할 수 있다. 가시엉겅퀴가 가진 ‘가시’라는 생리를 어려운 삶을 견뎌내는 원천적인 힘으로 변화시킨 시라고 할 것이다.


바람을 마시고 이슬을 머금고 살아가는 삶

옛날에 서림 시인이 연구실에서 풍란을 키운 적이 있다. 이 분은 동양시학을 주제로 가람과 지훈의 시를 논의하면서 청도 ‘이서국’을 주제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시인이다. 나는 학연으로 이 분을 대학원 시절부터 가깝게 뵌 적이 있었는데, 그 무렵 박사학위 논문을 쓰시면서 연구실 창가에 풍란을 키우고 계셨다. 풍란도 종류가 여러 가지겠지만, 그때 내가 본 풍란은 뿌리를 가는 실로 숯에 붙들어 매준 아주 작고 가냘픈 꽃이었다. 꽃이라기보다는 풀처럼 보인다고 해야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냥 풀이라고 부르기에는 조용한 기품이 있어 보였다.


나는 그 풍란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관심도 없었다. 양분을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 물은 언제 어떻게 먹고 사는지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냥 지나치며 보기만 했다. 서림 시인께서 물을 주었겠지만 어떻게 주는지 본 적도 없고 ‘먹이’는 몸 전체를 들여다봐도 어디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식물들 중에는 정말 아무 양분도 주지 않아도 습기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도 뭔가 생명의 원천은 필요하겠지만, 그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섭취하는 까닭에 오로지 바람과 바람에 묻은 습기만을 머금고 살아가는 것 같다. 마음이 동물의 생리를 닮았을 때, 생존하고 고립에서 탈피하려고 동물들처럼 싸울 때 이 고매한 식물들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 생명을 기르는 마음에 관해서도 관심 둘 겨를이 없다.

 

이번에 풍란을 아름답게 노래한 시 한 편이 있어 가만히 음미해 본다. 정원숙이라는 시인은 이 풍란에서 삶의 의미와 태도를 되새기는 전통적 시작법을 따르는데, 그 성취가 예사롭지 않다.

 

바람이 불어도 나는 가볍게 흔들리지 않고
바람이 불어도 나는 무겁게 촉을 세운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나는 두렵게 생을 두드리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나는 서럽게 생을 연다.

어떤 이는 바람을 두려워하고
어떤 이는 바람을 거스르며 자신의 길을 간다.
바람이 내 속에 가득 차오르는 날이면
나의 등경엔 촛불이 밝혀지고

바람이 내 속을 살랑살랑 비우는 날이면
등줄기마다 푸른 실핏줄이 돋는다.

바람이 날마다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쓰러지지 않을 만큼 슬픔을 끌어안는 것이다.

내가 날마다 바람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떤 슬픔도 나를 쓰러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천국을 쫓기 위해 어지럽고
나는 세상을 벗어나기 위해 고요한 투쟁을 계속한다.

바람은 다시 불고
나는 전심으로 바람의 촉을 붙든 채

내 정신을 비점(沸點)까지 끌어올린다.


—정원숙 〈풍란〉(《시산맥》 봄호)

 

 

한 나무가 말없이 겨울을 견딘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하지 않고 마음 쓰지 않는 게 아니듯이 살아 있는 모든 식물성 종족들이 어찌 자기 생명의 논리를 가지지 않음이 있겠는가. 이 시의 화자는 풍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를 썼다.

 

이 시에 나타나는 ‘나’는 풍란이 생각하는 ‘나’다. 그러나 시인은 시적 화자가 바로 ‘나’라고 해도 아무런 저촉을 받지 않을 수 있도록 섬세한 표현들을 이어나갔다. 외향적인 삶 대신에 내향적인 성찰의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와 태도를 풍란이 자신의 생을 걸고 이어나가는 생각과 마음에 실어 아주 절제된 시행 속에 적실하게 표현했다. 바람을 타고 살아가면서 바람에 시달리지 않고 바람을 머금고 바람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충만하게 흡수해 들이면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마음도 있고, 바람을 타고 바람을 안고 바람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볍게 하고 비워 그 텅 빈 마음이 ‘끓어오를’ 때까지 견디면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있다. 정원숙 시인의 〈풍란〉은 이 고독한 내적 투쟁의 깊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환대라는 말이 주는 깊은 울림에 관하여

 

사랑은 사람에게 아픔을 준다. 그러나 사랑은 아픔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까닭에 우리는 번번이 사랑으로 되돌아간다. 이 사랑마저 버리면 사람도 다른 무정물처럼 삶의 깊이와 고뇌를 잊어버리고 침묵하게 되므로. 법정 스님이 열반에 들어 “우레와 같은 침묵”으로 되돌아갔을 때 그것은 우리가 모든 들끓는 것을 잊고 고요한 세계에 합류하게 됨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한곳에 있지 못하고 삶을 살아가는 내내 그리움에 휩싸여 먼 곳을 떠돈다. 완전히 합치하는 사랑을 즐겁게 나누며 살아가는 삶은 아름답고 풍요로워 행복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의 결핍 때문에, 지금 여기 함께 있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괴로워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아름답게, 나아가 어느 때는 성스럽게 만들어 주기까지 한다. 이 궁핍 속에서 우리는 속이 텅 빈 ‘공복의 기쁨’을 향유하고, 정녕 가난한 자들에게나 찾아올 삶의 보람을 되새긴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여기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고 그것이 있었던 기억 때문에 더 풍요로워지고 지금 내 곁에 아무도,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참된 소중함을 얻는다. 이민아 시인의 〈이 환대의 기억이 잊힐 즈음〉은 지극히 아름답다. 삶의 문제, 사랑의 고뇌를 그것을 감싸고 있는 우주의 보이지 않는 끈들에 연결하여 밤하늘에 퍼져 나가는 연기처럼 소리 없는 확산을 이루고 있는 마음의 세계이다.


이 시의 전문을 먼저 읽어 본다.

통도사 서운암 도자기 가마에 불을 넣는 밤
보름달이 뜨면, 한 사내는 불을 쓰다듬고
불을 쓰다듬던 바람은 잠자코 일렁이다
미처 쓸지 못한 유리 가루 같은 저 달무릴 삼키지
간절히 무릎 꿇은 것들의 성체를 삼키고 나면
그리운 것들은 한데 타서 한 부족의 문신처럼
재가 된 제 몸이 길의 흔적이 되지
이승에서 이 환대의 기억이 묻힐 즈음
저마다 불 앞에서 젖은 손을 펴 서운했던 사연을 쓰지

계절이 지구 밖으로 펼쳐질, 그쯤 나도 가끔
가마 앞에 앉아 내게서 잊히지 않은 그대
벽화의 채색처럼 무척, 더디게, 풍화되는 보름달이 뜨면
수천 번 무릎을 꿇고 나無를 던지지, 나를 던지지
손바닥만 한 가마 불창 속으로 창살나무를, 창살을 꽂아 넣지
 누가 저 사발들을 불로 만든다고 했나
 누가 저 가마 속 흙의 운명을 장작의 일이라고 했나
우리 인연이 받던 찻잔과, 나눠 간직한 전별의 사연은
무수한 창살을 온 가슴으로 받아도, 피로 붉게 물들어도
때로는 잊을 수 없는 것, 그 증명 앞에 무릎 꿇는 것

불을 넣다 무릎 꿇고 황혼 같은 먼 벽을 보는 밤이
고해의 밤이, 생이 끝나기 전까지 때때로 내게 오겠지
천체를 조율하던 지구의 메아리가
어둠이 껴안은 숲의 겨드랑이에 머물다 되돌아오는 밤
   수줍어 물들던 그대 볼이 생각나고
   그대와 걸었던 이별의 성곽이 생각나고
소나무 장작처럼 말라가는 그리움의 시취가 사뭇 오래
살갗 터진 가마의 늑골에서 안개처럼 배어나오는
밤, 같은 새벽, 같은 밤, 깊이 쓰다듬던 그대 손등 같아
나도 모르게 한 움큼 야윈 재를 들어
새벽이 오도록 지구의 틈을, 결별의 틈을 덮는 밤


—이민아 〈이 환대의 기억이 잊힐 즈음〉(《신생》 봄호)

 

 

이 시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없는 것을 짜내어 구성한 것이 아니라 지극한 마음의 고뇌를 견디고 높이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마음의 상황 속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인은 이것을 단순히 토로하거나 고백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시행의 구성이나 어휘 선택 면에서 나무랄 데 없이 섬세한 기질과 정교한 ‘계산력’을 발휘해 놓았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이 시가 주는 리듬을, 그 리듬을 타고 고요히 흐르는 이별의 정한을, 이별 속에서도 서로를 환대해 준 사람들 사이에서만 주고받을 수 있는 마음의 교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옛날에 사람들은 환대해 주는 것, 환대 속에서 서로를 양육해 주는 것을 기쁨으로 알았다. 현대가 되자 환대의 풍속들, 윤리들은 공동체론의 한구석으로 밀려나고 근대는 마땅히 그러해야 하거니 하고 싸우며, 이기며, 누르며 살아간다.

 

그러나 환대는, 환대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궁핍한 이들에게 가장 값진 기쁨일 것이기 때문이며, 외따로 떨어져 먼 곳을 떠도는 가난한 이들에게 환대야말로, 서로를 환대한 기쁨의 기억이야말로 이 세계를 견디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가장 소중한 기억일 것이기 때문이다. 

 

 

ㅡ출처 :『유심(2013. 5)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이온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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