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의 본성을 찾아가는 시의 순례 / 최선옥 시인
禪이란 무엇인가. 선적인 것, 禪味 등 다양하게 표현하는 선에 대하여 한마디로 이것이다, 라고 표현하기는 참으로 쉽지 않다. 이처럼 명료하고 명쾌하게 답을 내놓을 수 없는 이유는 선은 좀처럼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난해하다는 것이고 난해하다는 것은 또한 신비하다는 것과도 통한다. 선사들도 정확히 선은 이러한 것이라고 문자로 내놓지 않았으며 단지 깨달음을 통해서만 찾아갈 수 있는 것이기에 많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흔히 알고 있기를 선은 불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원류를 고찰해보면 우리의 관점이 오류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을 특정종교와 관련지을 때 선은 종교적이지만 기실 선은 비종교적이다. 선이 비종교적이라 할 때 그것은 순수한 본래의 선이 특정종교와 관련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노골적으로 선은 형식주의나 신화를 완전히 무시한다. 그러나 그 순수 선의 경계를 확실하게 둘 수 없기에 종교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대부분의 선원생활이 불교에 의거, 예불의식으로 이루어지고 전통적 불교식 종교관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선은 불교와 저만치 거리를 두기도 하고, 때로 가까이 불러오기도 하면서 삶의 참된 의미, 참된 가치들에 대해 중점적으로 말해보고자 한다. 그러나 미리 말해두지만 그 가치는 가득 찬 것 같지만 결국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듯하면서도 가득 찬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선은 논리적이면서도 서구적인 것과는 대조를 이룸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논리 정연한 것을 따지는 대부분에게 애매하고 안개에 시야가 가린 듯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선은 특정인들만의 정신의식의 세계라고 단정 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기실 우리 삶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단정 짓거나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일 뿐.
기독교적인 시관으로 선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토마스 머튼에 의하면 "선은 인생의 체계적인 설명도, 이데올로기도, 세계관도 아니며, 게시와 구원의 신학도 아니고, 어떤 방법도, 고행과 금욕을 통한 완성의 길도 아니며, 대부분 알고 있는 것처럼 신비주의도 아니다. 사실 선은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어떤 전통적이고 간단한 카테고리에도 걸려들지 않는다. 따라서 선을 소위 '범신론'이라거나 '내적 정적주의', 각종 신비주의 등으로 몰아 세워 딱지 붙이려는 우리의 모든 시도는 터무니없는 짓거리일 뿐이다"라며 선에 대한 섣부른 경계 짓기나 판단에 일침을 놓는다. 선이 담고 있는 불교의 형이상학을 알아야 동양의 철학관내지는 선을 이해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불교의 형이상학자체가 우리의 철학이나 신학에 비춰봤을 때 전혀 교리의 성격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도 토마스 머튼의 논리를 증명할 수 있다.
이처럼 선과 불교의 관계를 애초부터 불가분의 관계망에서 접근하는 것은 자칫 모순이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보는 시각도 무리다. 그렇다면 선의 본성과 불교와의 관계망을 아예 염두에 두면서 선을 향하고자 하는 염원을 몇 편의 시로 접근해 보기로 하자. 그러나 그것은 만만치 않다. 근접하고자 하면 할수록 오묘하고 신비해서 쉽게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 때문이다.
누가 묻는다
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
빈 뼈 토막 같은 연근 한마디를 구해 와 싹을 틔었더니
바람이 불 때마다 연잎에서도 향기가 난다며
절 한 귀퉁이를 돌 때
살짝 누군가의 옷깃을 스친 것도 같은데
내 발자국 앞에 눈에 보이지 않는 발자국이 있어
그 자리를 따라가는 것 같은데
지나간 발자국에서도 향기가 날까?
붉은 꽃도 지고 푸른 잎도 지고
흐린 물에는 탁발을 나가는 검은 발목뼈들
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
바람이 불 때마다 살강살강 찰강찰강
물 밖으로 걸어 나가는 젖은 발을 보았느냐고
-김수영,「영취사 홍련을 보았느냐고」전문
선은 한 송이 꽃과 미소사이에서 태어났다. 마하가섭이 석가모니가 손에 들은 한 송이 연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는 일화처럼 선의 정수를 정확히 짚는다는 것, 그것이 깨달음일지도 모른다.
겨울 연못의 연꽃이 피었다 진 흔적만 남아 지나간 향기를 되짚는 시간, 마치 '탁발을 나가는 검은 발목뼈들' 같은 꺾어진 검은 대궁을 보면서 존재하지 않는 향기와 자취를 찾음은 "경전 밖에서 따로 전하여/말이나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사람의 마음을 똑바로 가리켜/본성을 꿰뚫고 부처를 이룬다"는 달마의 사구게(四句偈)와도 통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냄은 '참본성의 텅 비어 있음', 즉 空을 뜻하지만 이 공이라는 말에 집착함은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함이며 결국 허무의 늪에 떨어질 위험이 있음을 경고한다. 선에서의 공은 없음이 아니라 무한한 생명력을 지닌 실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산사의 종소리가
개울 위에 드러눕는다.
붉은 달이 하늘에서 내려와
화인을 찍는다.
소리 떠난 종메가
그제야 잠이 든다.
-박호영「정아」전문
절제된 시지만 시 속에 깃든 경지는 더욱 깊은 시적 여운과 경건성을 전해준다. 산사의 종소리는 보통 저녁 다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에 들을 수 있다. 모두 스물여덟 번 종을 치는데 이는 속계와 색계, 그리고 무색계를 포함한 28天 모든 세계에 법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라고 한다. 스물여덟번의 종을 치고 그 종소리의 긴 여음마저도 모두 산사를 떠나 어디로 흘러가버린 다음에야 제 할일 다 마친 듯 '종메가/그제야 잠이 든다'는 정신적 깨달음 내지는 자각은 집착이나 미련을 모두 비워낸 공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이는 없지만 가득 찬 경지이며 화자는 이를 고요의 정서를 빌어 더욱 깊이 느끼게 해준다.
어둠이 물의 정수리에서 떠나는 소리
달빛이 뒤돌아서는 소리, 이슬이 연꽃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이슬이 연잎에서 둥글게 말리는 소리, 연잎이 이슬방울을 버리는 소리, 연근이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 잉어가 부레를 크게 하는 소리, 진흙이 뿌리를 빨아들이는 소리, 조금 더워진 물이 수면 쪽으로 올라가는 소리, 뱀장어 꼬리가 연의 뿌리들을 건드리는 소리, 연꽃이 제 머리를 동쪽으로 내미는 소리, 물잠자리가 제 날개가 있는지 알아보려 한 번 날개를 접어보는 소리......
소리, 모든 소리들은 자욱한 비린 물 냄새 속으로
신새벽 희박한 빛 속으로, 신새벽 바닥까지 내려간 기온 속으로,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으로 제 길을 내고 있으리니, 사방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리니
어서 연못으로 나가 보아라
연못 한 가운데 뗏목 하나 보이느냐, 뗏목 한가운데 거기 한 남자가 엎드렸던 하얀 마른 자리 보이느냐, 남자가 벗어놓고 간 눈썹이 보이느냐, 연잎보다 커다란 귀가 보이느냐, 연꽃의 지문, 연꽃의 입술 자국이 보이느냐, 연꽃의 단냄새가 바람 끝에 실리느냐
고개 들어보라
이런 날 새벽이면 하늘에 해와 달이 함께 떠 있거늘 서쪽에서 핏기 없는 보름달이 지고, 동쪽에는 시뻘건 해가 떠오르거늘, 이렇게 하루가 오고,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오고, 모든 한 살이들이 오고가는 것이거늘, 거기 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결가부좌 트는 것이 보이느냐
-이문재,「물의 결가부좌」부분
"어둠이 물의 정수리에서 떠나는 소리, 달빛이 뒤돌아서는 소리, 이슬이 연꽃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이슬이 연잎에서 둥글게 말리는 소리, 연잎이 이슬방울을 버리는 소리, 연근이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 잉어가 부레를 크게 하는 소리, 진흙이 뿌리를 빨아들이는 소리, 조금 더워진 물이 수면 쪽으로 올라가는 소리, 뱀장어 꼬리가 연의 뿌리들을 건드리는 소리, 연꽃이 제 머리를 동쪽으로 내미는 소리, 물잠자리가 제 날개가 있는지 알아보려 한 번 날개를 접어보는 소리......"
이런 소리를 들어보았던가. 잡음이나 소음에 익숙해진 거친 귀를 씻고 어느 날 순한 귀, 착해지는 귀로 돌아온다면 이런 소리가 들릴까. 그러나 기실 이런 소리는 귀로 듣는다기보다는 마음으로 듣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소리 없이 뗏목을 밀'던 그 사내, 그 소리 들으려고,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고 눈썹 같은 신발 두 짝 벗어두고 '연꽃의 지문'을 확인하며 '연꽃의 입술'에서 뿜는 '단냄새'에 취해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었을까, '연잎보다 커다란 귀'를 갖게 되었을까. 아직껏 이런 소리들을 새겨듣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마음의 귀는 언제쯤 열릴까. 이는 깨침이라는 것, 안다는 것이 단지 문자에서 얻어 진다기 보다는 자기각성을 통한 사유와 사고에서 비롯되어짐을 말함이 아닌가.
위의 예시들에서 보듯 선은 물론 불교에서의 명상은 문자화하거나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깨어있고자 한다. 깨어있다는 것은 정신 차린다는 것과 통하며 주의를 기울임과도 통한다. 문자화 한 것이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얕음과 함께 자칫 왜곡되고 현혹됨에 가깝다고 보는 시각이다. 보이는 것 너머의 의식을 깨우고자 함, 즉 어떤 것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각성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궁극의 진리와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길은 반드시 문자화 된 것, 즉 경전을 읽고 통찰해야만 각성에 이른다는 것을 뒤집는다. 그것은 깨어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 선은 보이지 않을뿐더러 더구나 문자화되는 것을 거부하지만 확실성을 갖고자 하는 특징을 가진다. 여기서 말하는 확실성은 어떤 논리로 증명되는 확실성이 아니며 또한 맹목적 신앙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종교적 확실성도 아니다. 다만 자기 자신의 직접체험으로 생겨나는 순수한 직관에 의해 얻어지는 확실성이라 할 수 있다. 이 순수한 직관은 자연을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성내지는 의미와 연계시켜 생활에서의 각성내지는 진리에 도달함이라 하겠다.
성근 비 그치자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은
그의 육탈된 내부에서
온갖 웅숭깊은 서원들 267개 골편들로 찍어서
寫經했는지 貫珠인듯 동그라미 친 저것
며느리발톱만한 잎들에 순백의 빗방울들 내다걸었다
아니다
몇 백 말은 될까
대목장 때맞춰 으슥히 은닉했던 장물들
줄줄이 끄집어 내놓듯
마구 헤친 저 신품목 화엄들을 되질해 팔고 있다.
도굴꾼들로 봄은
아직도 산과 골짜기 멀리 뒤지며 오가는데......
몇 벌씩 베껴 썼는지
그 뒤 서판으로 받쳐 쓴 홑벌 하늘이
해져서 너덜너덜 너무 얇다
-홍신선,「장곡사 골짜기에서」전문
예시의 시적표정은 쓸쓸하다. 시적대상의 삶은 고통이나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거나 병들어 늙어가거나 소외되거나 허망하다. 시적대상의 삶의 모습은 윤기 도는 넉넉한 모습이 아니라 부족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약한 형상이다. 이들을 통해 심중에 담은 감정들을 표현해내는 화자는 허무한 것을 허무한 것으로만 끝나거나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기보다는 이런 일련의 감정들을 삶에 대한 부분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의 과정은 종종 모든 것을 비워냄으로써 다시 채우는 마음의 經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화자의 선적 세계관에서 기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적 세계관이라 하여 종교를 우위에 두는 종교적 이념의 설파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단지 시적표현의 방법으로 동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화자의 오랜 시적화두인 연작시 「마음經」을 이루는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시의 특징을 단적으로 요약한다면 화자가 시적대상에 마음의 결을 잇댄 風景이라 할 수 있다. 화자는 이 마음의 풍경을 다시 心經으로 복사해 현현해낸다고 할 수있는데 산 것과 죽은 것이 한통속으로 어우러져 분리되고 이질화되기보다는 삶에서 죽음을, 죽음에서 삶의 의미를 도출해낸다. 타인, 혹은 자연을 통해 화자의 감정을 전달, 삶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삶이 종국엔 죽음과 연관되어 있어 죽음과 삶이 하나 됨을 지향, 단절을 극복하고 있는 셈이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굴곡 많은 시대를 살면서 세상의 아픔을 화자자신의 마음을 빌려 울면서 생명력의 시로, 탄탄한 시적 긴장의 시로 현시해낸 위 시는 그만의 오랜 시력과 시적 정신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화자가 구체적으로 보고 느끼고 또한 감정을 주고받는, 삶과 죽음 등 일상을 다룬 시는 고요하지만 거대한 파장을 싣고 오는 시적 감흥과 전율을 제공한다.
시적대상의 실상에 대해서, 몸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그 세상을 살아가는 화자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그려놓은 마음의 지도, 마음經을 읽고 그것을 독자는 베껴내고 간파하고 또한 음미한다. 그것을 위해 그는 오늘도 절창의 경전을 寫經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화자 앞에 놓인 삶에서 말이다. 이는 위에서 말한 삶에서의 직접체험이 바탕이 되는 확실성 때문이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
전나무들은 부처님의 허리처럼 곧추서 있고
월정사 석탑과 상원사 동종 사이
하늘을 찌르다 비스듬히 휘어진 탑 끝과
천년 묵은 놋쇠자궁의 동종 사이
방한암 선사의 결가부좌 비슷한 한길과
경 읽다 다 닳은 팔꿈치의 굽이길 사이
한순간 개명開明하듯 눈 내려 환하다.
사이사이 산들은 모조지로 접은 종이학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 예전에는 마음을 모아
밤새도록 정갈히 접고 만들었던 종이학.
지금은 종이학 접어 빌어줄 그리운 사람도,
사람도 아주, 아주 소식줄 끊겨
만드는 법도 까마득히 잊은 무명無明같이
칠흑의 흰 바탕뿐인 마음눈이 내린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
유리병 안에 천 마리 학이 갇혔구나.
그저 하얗게 저무는 경전의 말씀.
하실 말씀이 더 없으신 눈이 기막히게 내린다.
내린 눈보다 내가 더 조용히 깊고 하얗게 젖는다.
-강우식,「종이학」전문
시「종이학」은 '환한 이미지'로 가득하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유리병 안에 천 마리 학이 갇혔'다는고, 또한 그것을 '하얗게 저무는 경전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은 허무 속에 감춘 묵중한 희망이 '종이학'이라는 시적 시각이다. 눈을 종이학이라고 비유한 화자의 시선에서 발견된 희망은 아마도 생의 이런저런 허무를 거치면서 쌓은 단단한 희망이 아닐까.
광활한 자연과 유한한 자아를 대비,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드러내고 절망한다기보다는 자연에게서 오는 시적 의미라든지 화자의 심상을 시적으로 끌어들여 보다 고차원적으로 끌어올리고자함을 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시적 성공을 결정짓는 중요요소 중 하나가 이미지라는 것은 익히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지를 단순히 감각적으로 색채화한 풍경만을 말한다기보다는 시적 깊이에 어울리는 의미를 접목해야 그 감동의 폭도 그만큼 넓어지리라 본다. 그런 면에서 시 '종이학'은 단순한 이미지의 시라기보다는 끝없는 화두 같은 물음과 의미의 깊이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화자의 상상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에서 온다는 점에서 선은 순수한 직관에 의한 확실성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 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 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 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가슴에 부리를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의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문태준, 「맨발」전문
선은 인간 숙명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연민이나 자비에서 찾는다. 이는 대승불교와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통찰의 과정은 역설을 통해 가고 있는데 이런 역설적 전환은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듯하지만 결국은 현상계에 머물면서 그곳이 곧 열반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聖과 俗은 결국 한통속이라는 생각, 삶과 죽음의 굴레에 갇혀 고통 받는 인간들이나 부처나 같다는 동일시의 관점이다. 삶의 고통 속에서 깨닫는 속세의 현상이 곧 진리라는 것이다.
'개조개'에서 부처의 '맨발'을 발견하는 시적 관점도 곧 생활 속에서의 깨우침이 아니겠는가. 다음의 시들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매일 새벽길을 쓸던 범종소리 흔적도 없이 하얗다
석천암 오르는 소나무 숲 눈길
처녀몸을 열고 들어간다
뽀드득뽀드득, 교성이 탱탱하다
인동덩굴 파란 눈 말똥말똥
사철나무 빨간 눈 크게 뜨고 두리번두리번
산발치서부터 나를 따라오는 하얀불꽃새
그 발자국에 고인 포도주빛 숨소리 포근하다
석천암은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새하얀 고요의 숨소리뿐
범종도 목어도 석탑도 입 하얗게 떼고
부처라는 거 경전이라는 거 원래 없는 거라고
고개를 저으며 하얀 고요 속에 든다
가랑이를 벌리고 또로록 쪼로록 또로록
바위 오줌 소리
네가 부처의 어머니?
나를 따라 포롱포롱 날아온 하얀불꽃새
날개짓에서 방울방울 울려오는
파란 풍경소리 따라 도비산 정상에 올라
부처의 몸을 양파껍질 벗기듯 벗겨본다
손바닥엔 구름의 터럭 하나 비치지 않고
눈물 몇 방울!
눈물이 부처인가
-김순일,「눈물이 부처인가」전문
"내 가슴의 벽에 '내가 쓴 그림은 시가 아니다.' 삐뚤빼뚤 쓴 액자 하나 걸어놓고 나의 시에 무디고 무딘 날이 서도록 벼리고 벼리지만 풀무질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서산장터에 나가 틉틉한 막걸리에 거칠은 푸성귀 얹어 마시고 한 이레 그렇게 마시고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개심사 해우소에 앉아 끙! 외마디로 풀고 돌아오기도 한다. 가끔은 두 손을 잡고 반가워하는 대웅보전 부처님을 서산장터에 모시고 나와 성과 속을 바꿔 입고 히히대기도 하면서 불경不敬과 불경佛經을 들락날락 내 시의 무딘 날을 벼리는 풀무질을 하지만 싹수가 노란 내 시가 극락에 들기에는 너무 많이 빗겨 와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한 화자의 말처럼 김순일 시인은 시적대상 그 자체의 특성을 노래하기보다는 그것을 차용해 와 삶의 주변에서 획득한 몸의 말법으로 바꾸어 놓는다.
농경사회의 언저리에서 태어난 삶과 화자주변의 자연경관 혹은 종교적인 특성을 차용해 그것을 다시 몸을 통해 전혀 별개의 의미로 바꾸어 놓는데 이런 특성으로 인하여 화자의 말법은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기보다는 화자자신의 내면을 형상화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런 화자의 시적 특성으로 인하여 시는 시적대상과의 적의나 적개심을 드러내기보다는 해학적이고 익살스런 특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시 속 해학과 익살의 특징은 시적화자와 시적대상과의 원만한 합일이며 서로 반응하며 경계를 지워가는 시적태도다. 이는 화자의 상생의 사고관이며 대상과의 화해를 이끌어내는 시적 세계관이기도 하다. 결국 성과 속은 다르지 않음을 시는 몸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화자가 드러내는 선미는 삶 자체이자 미화되지 않은 속세인 것이다.
이는 "본마음을 알고 제 성품을 보면 이것이 곧 대장부요,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요, 바로 부처이니라."는 오조 흥인의 말과도 통한다.
여보게 친구
산에 오르면 절이 있고
절에 가면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절에 가면 인간이 만든 불상만
자네를 내려다보고 있지않던가
부처는 절에 없다네
부처는 세상에 내려가야만 천지에 널려있다네
내 주위 가난한 이웃이 부처고
병들어 누워있는 자가 부처라네
그 많은 부처를 보지도 못하고
어찌 사람이 만든 불상에만
허리가 아프도록 절만하는가
천당과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가
살아있는 지금이
천당이고 지옥이라네
내 마음이 천당이고 지옥이라네
내가 살면서 즐겁고 행복하면
여기가 천당이고
살면서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하면
거기가 지옥이라네
자네 마음이 부처고
자네가 관세음보살이라네
여보게 친구
죽어서 천당 가려하지 말고
사는 동안 천당에서 같이 살지 않으려나
자네가 부처라는 걸 잊지 마시게
그리고 부처답게 살길바라네
부처답게...
-법정,「여보게, 부처를 찾는가」전문
'네가 부처다'라는 명구는 유독 법정에게서만 듣는 말씀은 아니다. 네 마음이 부처고, 부처는 삶 가까이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말씀은 고승들의 선문답으로 오래전부터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법정에게서 더 큰 의미를 찾고자 하는 연유는 현시대를 같이했다는 점과 몸소 실천을 보여주었다는 점 때문이다. 법정, 그도 인간적인 한계,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떠난 후 그의 맑은 정신 한 오라기를 부여잡고 이리 슬퍼하고 감격스러워 하는 것은 아마도 그가 세상에 풀어놓은 그 많은 말에 책임이 따르고자하는, 언행일치의 삶을 살고자 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럴듯한 외관만 갖춘 말들이 성행하는 세상에서 몸소 실천함을 도리로 삼고자 했던 이,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이가 법정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한다. 절이 산 속 깊은 곳에만 있지 말고 세상 한복판으로 나와야 한다고. 이는 부처는 깊은 산중 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고, 세상 속에 있다는 법정의 말씀과도 상통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제 이승의 짐을 훌훌 벗고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 긴 기억의 강을 건너 저 먼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이. 그는 유난히도 무덥던 어느 여름날 화자가 절집에서 잠깐 마주친 노승과 참 많이도 닮았다. 그가 들려준 소리 없는 말, 침묵으로 전해준 귀한 말을 여기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절집에서 부처를 보면
콧날 오뚝한지, 펑퍼짐한지,
얼굴 갸름한지, 둥글넓적한지
상을 보는 버릇 생겼습니다
빤히 올려다보는 시선 못마땅한지
끙, 돌아앉는 부처에게 당신도 절하는 뒤태로
사람들 평하시지 않느냐 물으면
부처는 갸름한 눈 꼬리 흘기며
혀 끌끌 차곤 했습니다
그 여름의 절집,
세상등지고 앉은 대적광전의 이마 얽은 부처에게
초년고생 심하셨나보다, 했습니다
쏟아진 뜨거운 눈초리 민망해
뒤꼭지 쓸어내리며 급히 신 돌려 신을 때
노스님 풀을 뽑다말고
엉거주춤 일어서고 있었습니다
됨됨이를 겉모습으로 평가하지 마라
누더기를 걸쳐도, 곰보도 다 부처니라
마음의 잡풀 솎는 스님에게 등 급히 내주고
이만큼 와 돌아본 거기,
잘 생긴 네 마음 있으면 어디 보여줘 봐
고함을 흔들어대는 대숲이
대적광전도, 스님도 슬쩍 뒤로 숨기고 있었습니다
-최선옥,「그 여름의 절집」
마음이라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없다. 마음은 마음에 대해 말을 해야 할 때마다 당혹감을 느낀다. 그러나 마음이야말로 선을 여는 중요한 열쇠라고 선사들은 말한다. 선사들이 말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한 채 선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모순이다. 선의 궁극적 목표가 참본성을 보고 부처되는 것에 있다고 하여도 결국 그것을 이루기 위한 근본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참본성이 본래 맑으니 다만 이 마음을 쓰라, 곧 성불할 것이다."고 한 혜능의 말처럼 마음은 가장 귀하고 중요한 깨달음의 기본인 셈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고 오류를 범하며 잠깐 열렸다 닫힌 마음이 전부인줄 착각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닌가. 닫힌 마음은 달리 말하면 닫힌 눈이요, 깊이 보지 못하는 시각이다. 그래서 얕은 그것은 제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됨됨이를 겉모습으로 평가'하며 참본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화자는 속세에 머물며 성불과 선에서 이만치의 거리를 둔다. 그러나 성불이라 하여 종교적 안목으로 접근함은 곤란하다. 종교를 초월한 선적인 깨달음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상으로 시적 접근으로 선이란 무엇인지, 그 본성을 찾아가는 길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선이란 오묘하고, 굳이 알려고 애쓰는 자체가 모순이며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모든 문제는 마음이며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라는 미숙한 글로 매듭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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