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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태주 - 대숲 아래서 / 막동리 소묘 / 하늘의 서쪽 / 멀리까지 보이는 날

문근영 2013. 10. 2. 13:23

(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대숲 아래서


나태주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 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대숲 아래서』. 예문관.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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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동리 소묘


나태주

 

 

1


아스라이 청보리 푸른 숨소리 스민 청자(靑瓷)의 하늘,

눈물 고인 눈으로 바라보지 마셔요.

눈물 고인 눈으로 바라보지 마셔요.

보리밭 이랑 이랑마다 솟는 종다리.

 


2


얼굴 붉힌 비둘기 발목같이 발목같이

하늘로 뽑아 올린 복숭아나무 새순들.

하늘로 팔을 벌린 봄 과원의 말씀들.

그같이 잠든 여자, 고운 눈썹 잠든 여자.

 


3


내버려 두라, 햇볕 드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때가 되면 사과나무에 사과꽃 피고

누이의 앵두나무에 누이의 앵두가 익듯

네 가슴의  포도는 단물이 들 대로 들을 것이다.

 


4


모음으로 짜개지는 옥빛 하늘의 틈서리로

우우우우, 사랑의 내력 보 터져오는 솔바람 소리.

제가 지껄인 소리 제가 들으려고

오오오오, 입을 벌리는 실개천 개울물 소리.

 


5


겨우내 비워둔 나의 수란에

밤새워 조곤조곤 봄비 속살거리고

사운사운 살을 씻는 댓잎의 노래.

비워도 비워도 넘치네. 자꾸 술이 넘치네.

 


6


물안개에 슬리는 차운 산허리

뻐꾸기 울음 소리 감돌아 가고

가난하고 가난하고 또 가난하여라,

아침마다 골짝 물소리에 씻는 나의 귀.

 


7


감나무 나무 속잎 나고

버드나무 실가지에 연둣빛 칠해지는 거,

아, 물찬 포강배미 햇살이 허물 벗는 거,

보리밭에 바람이 맨살로 드러눕는 거.

 


8


그 계집애, 가물가물 아지랑이 허리를 가진.

눈썹이 포로소롬 풋보리 같은.

그 계집애, 새봄맞이 비를 맞은 마늘촉 같은.

안개 지핀 대숲에 달덩이 같은.

 


9


유채꽃밭 노오란 꽃 핀 것만 봐도 눈물 고였다.

너무나 순정적인 너무나 맹목적인

아, 열여섯 살짜리 달빛의 이슬의

안쓰러운 발목이여. 모가지여. 가슴이여.

 


10


덤으로 사는 목숨 그림자로 앉아서

반야심경을 펴 든 날 맑게 눈튼 날

수풀 속을 헤쳐온 바람이 책장을 넘겨 주데.

꾀꼬리 울음소리가 대신해서 경을 읽데

 

 

 

(『막동리 소묘』. 일지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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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서쪽


나태주

 


하늘이 개짐을 풀어헤쳤나


비린내 두어 마지기

질펀하게 깔고 앉아

속눈썹 깜짝여 곁눈질이나 하고 있는

하늘의 서쪽


은근짜로 아주

은근짜로


새끼 밴 검정염소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절름발이 소금장수 다리 절며 돌아오던

구불퉁한 논둑길이 사라지고


이젠 네가 사라져야 하고

내가 사라져줘야 할 차례다,

지금은 하늘과 땅이

살을 섞으며 진저리칠 때

 

 


(『풀잎 속 작은 길』. 고려원. 199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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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까지 보이는 날


나태주

 


숨을 들이쉰다
초록의 들판 끝 미루나무
한 그루가 끌려들어온다

숨을 더욱 깊이 들이쉰다
미루나무 잎새에 반짝이는
햇빛이 들어오고 사르락 사르락
작은 바다 물결 소리까지
끌려들어온다


숨을 내어 쉰다
뻐꾸기 울음소리
꾀꼬리 울음소리가
쓸려 나아간다


숨을 더욱 멀리 내어쉰다
마을 하나 비 맞아 우거진
봉숭아꽃나무 수풀까지
쓸려 나아가고 조그만 산 하나
다가와 우뚝 선다


산 위에 두둥실 떠 있는
흰구름, 저 녀석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몸 안에서
뛰어 놀던 바로 그 숨결이다.

 

 

 

(『슬픔에 손목 잡혀』. 시와시학사. 2000)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출처 : 삼각산의 바람과 노래
글쓴이 : 흐르는 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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