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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승희 시인의 詩, `종점들` / 박완호

문근영 2013. 9. 30. 09:56

이승희 시인의 詩, '종점들' / 박완호 

 

 

종점들

 

                                      이 승 희

 

 

 

 

 

이제 그만

여기서 살까

늙은 버드나무 아래

이름표도 없이

당신과 앉아서

북해의 별이 될 먼지들과

여기와 아무데나를 양 손처럼 매달고

웃었다

세상의 폐허 말고

당신의 폐허

그 둘레를 되짚어 가면서 말이죠

폐허의 옷을 지어 입으면

등은 따뜻할까요

머뭇대다가 지나친 정거장들이

오늘 별로 뜨면

이제 어떤 먼 곳도 그립지 않을 테죠

모든 것의 뒤만 볼 수 있는 세상

갑자기 당신이 이해돼 버렸어요

지하계단을 밝은 색으로 칠해볼까요

거기 막 떠난 물방울을 그려 넣기로 해요

켜켜이 폐허의 지층을 닮은 물방울들이

물그릇에 담겨

무엇으로든 막 자라나는 동안

끝에 기대어

당신에 기대어

함께 지워질 수 있다면

                                                                - 포엠포엠2012년 겨울호

 

 

 

 

 

 

 

 

 

끝이면서 시작인, 종점의 풍경들

                              - 이승희 시인의 종점들을 읽고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종점까지 무작정 가본 적이 있는지요?

여기서 그만 내릴까 말까를 수십 번 고민하는 사이 버스는 어느덧 종점까지 와 멎고, 낯선 동네를 한참 돌아다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처음의 그 자리로 돌아오곤 하던, 오래 전의 나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봅니다.

때로는 누군가와 함께, 세상의 끝인 종점까지의 여행을 다녀온 적도 있었지요.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끼는 순간, 쓸쓸하기만 하던 종점이 세상 어떤 곳보다도 따뜻한 곳으로 변해버리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나요?

 

종점은, 모든 것의 끝이면서 동시에 시작이기도 한, 그런 곳입니다. 차들은 이곳까지 와서 시들해진 숨결을 어루만지며 잠이 들고, 다시 건너편의 종점을 향하여 엔진소리를 힘차게 뿜어대며 바퀴를 굴려갑니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종점까지 다다른 삶이란 얼마나 고단하고 쓸쓸한 것일까요. 더군다나 종점의 풍경 속을 자주 걷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프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것이겠지요.

 

시인은, 서로의 폐허를 되짚어가면서 웃는 당신과 나의 모습을 통해 종점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줍니다.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곳, 모든 것의 뒤만 볼 수 있는 세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 당신과 나. 종점에 닿는 일이란, 어떻게 보면 그동안 읽어낼 수 없었던 서로의 속마음을 제대로 나눌 수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오랫동안 꽁꽁 숨기고 있던 폐허를 서로에게 고스란히 열어 보이며, 어서 다녀가시라고, 우리 서로 이렇게 늙어가는 거라고 말없이 건네는 손을 마주잡는 두 사람이 저기 있습니다. 막막하기만 했던 지난날들을 뒤로 하고, 다가오는 날들을 밝은 색으로 칠해가며, 모든 것의 끝이면서 또한 시작인 종점에서 새로운 걸음을 내딛는 이들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봅니다.

 

종점들을 읽으면서 나는, 이승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를 읽는 동안 끊임없이 나를 억누르던 무엇인가를 떨쳐낸 것 같은 홀가분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시집의 앞머리에 쓴, “종점의 풍경들이 나를 걷게 한다/ 폐허 속의 천진들이 나를 걷게 한다/ 폐허를 찾아온 당신이 나를 걷게 한다/ 폐허를 내 보이는 일/ 말없이 건네는 손이 되는 당신에게란 말처럼, 그가 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우울죽음’, 그리고 발자국마다 벼랑인 세계에로부터 스스로를 건져내게 되기를 빌어봅니다.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모든 시작은 저렇게 단단한 끝에서부터 다시 시작되는것임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존재들이니까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바로 모든 것의 끝임과 동시에 시작인 종점이라는 것과 함께.

 

 

 

ㅡ『포엠포엠』(2013.  여름)

ㅡ출처 : http://blog.naver.com/prologue/PrologueList.nhn?blogId=parkwanho&categoryNo=4 (박완호 시인 블로그)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이온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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