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박승자]곡두

문근영 2013. 9. 22. 14:23

곡두

 

 박승자

 

어여쁜 과수댁 울 밑에 분꽃향이 분분한 밤이면

독 뚜껑 뒤집어 무딘 칼을 쓱쓱 갈곤 했다

달은 하얀 박속처럼 제 살을 박박 갉아 먹고

바가지 형상으로 덩그러니 어둠 속에 팽개쳐 있을 때

또아리 풀고 소리 없이 담장 밑을 기어 나가는 구렁이

 

촉수 낮은 알전구 밝혀두고 여름, 매운 무를 썰며

잘 벼린 칼 주위로 시퍼런 불이 모여들었다

여름밤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잘리는 소리

분꽃 모가지가 낭자하게 꺾이고

새침처럼

똑, 똑

도마 위의 칼소리

생피를 쏟아버린 그녀의 낯빛처럼 댓돌 위의

신발 속에 창백한 달빛이 기우뚱 고이고

 

알전구가 꺼지고 희부연 새벽에

시침 떼고 아랫목에 앉아 있는 구렁이 앞에

흰 쌀밥에 무나물을 차려놓고

수저 한 가득 밥을 퍼 먹는 그녀의 치마 속에

숨겨있는 아홉 개의 여우 꼬리를 보았다

 

밤새 어린 계집애가 바람벽을 마주 보고 두 눈 부릅뜨고 있었다



시집 <곡두> 2013/ 애지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자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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