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두
박승자
어여쁜 과수댁 울 밑에 분꽃향이 분분한 밤이면
독 뚜껑 뒤집어 무딘 칼을 쓱쓱 갈곤 했다
달은 하얀 박속처럼 제 살을 박박 갉아 먹고
바가지 형상으로 덩그러니 어둠 속에 팽개쳐 있을 때
또아리 풀고 소리 없이 담장 밑을 기어 나가는 구렁이
촉수 낮은 알전구 밝혀두고 여름, 매운 무를 썰며
잘 벼린 칼 주위로 시퍼런 불이 모여들었다
여름밤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잘리는 소리
분꽃 모가지가 낭자하게 꺾이고
새침처럼
똑, 똑
도마 위의 칼소리
생피를 쏟아버린 그녀의 낯빛처럼 댓돌 위의
신발 속에 창백한 달빛이 기우뚱 고이고
알전구가 꺼지고 희부연 새벽에
시침 떼고 아랫목에 앉아 있는 구렁이 앞에
흰 쌀밥에 무나물을 차려놓고
수저 한 가득 밥을 퍼 먹는 그녀의 치마 속에
숨겨있는 아홉 개의 여우 꼬리를 보았다
밤새 어린 계집애가 바람벽을 마주 보고 두 눈 부릅뜨고 있었다
시집 <곡두> 2013/ 애지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자미 원글보기
메모 :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김만수] 고라니 (0) | 2013.09.22 |
|---|---|
| [스크랩] [조정권] 根性 (0) | 2013.09.22 |
| [스크랩] [구광렬] 생선 (0) | 2013.09.21 |
| [스크랩] [민병도] 극락암 (0) | 2013.09.21 |
| [스크랩] [구광렬] 유리의 바다 (0) | 2013.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