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길상호] 밥그릇 식구

문근영 2013. 9. 13. 10:30

밥그릇 식구

 

길상호

 

 

처마 밑에 놓인 밥그릇

아침엔 까치가 기웃대더니

콩새도 콩콩 깨금발로 다가와

재빨리 한 입,

빗방울이 먹다 간 한쪽은

텅텅 불어 못 먹을 것 같은데

햇살이 더운 혓바닥으로 쓰윽,

저마다 배를 불린다

정작 그릇 주인인 고양이는

잠을 자다 뒤늦게 나와

구석에 남은 몇 알로

공복을 누르지 못해 야아옹,

뒷마당으로 사라지고

고양이가 흘리고 간 한 알

개미들이 기다랗게 줄을 선다

텃밭에서 돌아온 할아버지

텅 빈 밥그릇을 보고 허허,

또 한 그릇 덜어낸 사료 포대처럼

조금 더 허리가 휜다

 

 

 

ㅡ출처 : 시집 『눈의 심장을 받았네』(실천문학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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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 앞에서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미물이나 구태여 구별할 것 없다

냄새가 우선 찾게 하겠는데

냄새를 맡은 이상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거다

배고픔을 참을 능력은 창조 때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 같다

 

밥그릇은 원래

고양이의 것이다

이것을

까지,

콩새,

빗방울,

햇살,

고양이,

개미 차례로 보시를 받는다

 

고양이 밥을 챙겨주시던 할아버지의 ‘허허’는

의미심장하다

먹이를 주어야 한다는 건 자명하지만

자주 비워지면 먹이 값 대기도 힘들어진다

허리 휜다는 얘기가 나올 법하다

그래도 밥그릇 하나에 식구가 무려 여섯이다

보시공양인데 얼마나 좋은가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가우/박창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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