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의 기억
허만하
인간이 땅을 짚던 두 손을 떼고 두 발로 지구를 밟고 수직으로 일어서는데 20만 년의 시간이 걸렸다지만, 송아지는 태어난 후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혼자서 일어난다. 한 마리 송아지가 비틀거리며 처음으로 일어선다는 것은 송아지 내장 안에 깃든 전생의 풀밭이 바다보다 깊은 잠에서 출렁이며 깨어난다는 뜻이다. 풀밭을 건너던 만 년 전의 바람이 만 년 후의 풀밭에서 다시 해맑은 물빛으로 깨어난다는 뜻이다.
광활한 풀밭 한가운데서 아직 이마빼기 양수가 마르지 않은 송아지가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일어서는 것은 쭈뼛쭈뼛한 초록색 풀잎들이 풀밭 바깥을 향하여 바람을 한발 앞서 부드럽게 물결친다는 뜻이다. 풀밭 끝 서쪽 하늘에서 가늘게 떨던 장대한 노을을 떠받아 축축한 주홍색 액체가 묻어 있는 뿔을 앞세워 완전히 새로운 미래의 공간을 겨누어 첫 걸음 내디뎠던 어미소의 순결한 전율을 되새김질한다는 뜻이다.
-출처 : 『시와표현』(2011.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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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알게 모르게 등장하는 어휘가 ‘바람’이다
이 시에서도 뿔의 기억을 돕는 어휘가 역시 ‘바람’이다
해맑은 풀밭이 등장하고 어미소를 닮은 행동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바람과 풀밭이 뿔의 기억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인류의 진화론을 보면
인간이 걷게 되는데 20만 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송아지는 태어나 스스로 일어서는데 고작 1시간 걸렸다 한다
그것도 기억의 뿌리를 되살려
‘한 마리 송아지가 비틀거리며 처음으로 일어선다는 것은
송아지 내장 안에 깃든 전생의 풀밭이
바다보다 깊은 잠에서 출렁이며 깨어난다는 뜻이다‘고 한다
소나 송아지나 그들이 사는 곳이 풀밭이고 먹이가 풀이고
만 년 전에 했던 일들이 만 년 후에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는 그것이다
송아지는 기억을 되살려 일어서려는 의지를 바람보다
먼저 부드럽게 물결쳐 일어선다는 것이다
어미소의 뿔에 대한 기억이 그렇게 하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뿔이 자라난다는 건 기억의 회생이다
송아지가 중심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기저에는
뿔에 대한 기억이 확실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생의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어미소의 순결한 전율이 송아지에게도 일어나서
유전은 숨길 수 없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유전의 되새김질은 바로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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