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이원] 영웅

문근영 2013. 9. 13. 10:29

 

 

 

영웅

 

이원

 

 

오늘도 나는 낡은 오토바이에 철가방을 싣고

무서운 속도로 짜장면을 배달하지

왼쪽으로 기운 것은 오토바이가 아니라 나의 생이야

기운 것이 아니라 내 생이 왼쪽을 딛고 가는 거야

몸이 기운 쪽이 내 중심이야

기울지 않으면 중심도 없어

나는 오토바이를 허공 속으로 몰고 들어가기도 해

길을 구부렸다 폈다

길을 풀어줬다 끌어당겼다 하기도 해

오토바이는 내 길의 자궁이야

길은 자궁에 연결되어 있는 탯줄이야

그러니 탯줄을 놓치는 순간은 절대 없어

 

내 배후인 철가방은 안팎이 똑같은 은색이야

나는 삼류도 못 되는 정치판 같은 트릭은 쓰지 않아

겉과 속이 같은 단무지와 양파와 춘장을

철가방에 넣고 나는 달려

불에 오그라든 자국이 그대로 보이는

플라스틱 그릇에 담은 짜장면을

랩으로 밀봉하고 달려

검은 짜장이 덮고 있는 흰 면발이

불어 터지지 않을 시간 안에 달려

오토바이가 기울어도 짜장면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내 생의 중력이야

아니 중력을 이탈한 내 생이야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은 모두 이곳이 아니야

이곳 너머야 이 시간 이후야

나는 표지판은 믿지 않아

달리는 속도의 시간은 지금 여기가 전부야

기우는 오토바이를 따라

길도 기울고 세상도 기울고

내 몸도 기울어

기울어진 내 몸만 믿는 나는

그래 절름발이야

삐딱한 내게 생이란 말은 너무 진지하지

내 한쪽 다리는 너무 길거나 너무 짧지

그래서 재미있지

삐딱해서 생이지 절름발이여서 간절하지

길이 없어 질주하지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나도 가끔은 뒤를 돌아봐

착각은 하지 마 지나온 길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야

나도 이유 없이 비장해지고 싶을 때가 있어

생이 비장해 보이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온몸이 데는 생의 열망으로 타오르겠어

그러나 내가 비장해지는 순간

두 개의 닳고 닳은 오토바이 바퀴는 길에게

파도를 만들어주지

길의 뼈들은 일제히 솟구쳐오르지

길이 사라진 곳에서 나는

파도를 타고 삐딱한 내 생을 관통하지

 

 

 

-출처 : 시집『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문학과지성사, 2007)

-사진 : 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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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을 이탈한 내 생의 원료이자 에너지의 구현

-이원 시인의 시「영웅」을 읽고

 

 인간이 부재할 때 사물들의 풍부함이 보장되는 세계를 사는 시인의 간절함을 이야기하려 할 때, 위 시와 같은 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오토바이의 속도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열고, 열린 길의 파도가 오토바이에 실린 몸을 ‘삐딱’하게 만드는 곡예의 시간, 흔들리는 오토바이를 따라 “길도 기울고 시간도 기울고 세상도 기”우는, 원근법이 사라진 초현실의 공간. ‘나’를 향한 생의 직접적 엄습과 강타가 밀물처럼 닥치기에 “이고 너머 이 시간 이후”로 나아가는 시공간의 접점 지대는 생의 열망이 타오르고, 열망의 위험만큼 비장해지는 격렬한 자기 인식의 집산지다.

 

 그러나 열망과 비장의 열도에 비해, 도로는, 도로 위의 오토바이는 놀라울 만치 조용하고 차갑다. 길이 열리는 순간만을 포착해야 하는 집중력이 과거도 미래도 없는 현재만을 요구하므로, 열망을 차가워야 하고 비장은 조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몸이 기울어도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힘이 유지된다. 그 힘이 “내 생의 중력”이다. 아니, 지면 위를 살짝 떠오른 채 질주하는 “중력을 이탈한 내 생(「영웅」)의 원료이자 에너지다. 이러한 힘의 구현으로 도로를 달리는 자장면 배달부와 낡은 오토바이는 진정한 ‘영웅’이라 할 수 있다.

 

 한밤 어두운 도로를 박차 오르는 ‘돌고래’가 이(것)들이 아니면 무엇일까? 더 정확히 말해, 이(것)들은 물리적, 현실적 중력으로부터의 이탈이 삶의 원동력이자 강력한 인력으로 작용하는 시인의 표상이다.

 

 타고난 시인치고, 시인으로서의 삶의 영위가 현실 세계로부터의 탈주와 동의어가 아닌 경우는 없다. 몸이 위태롭게 기울어야 중심을 찾을 수 있는 역설은 시인을 시인이게끔 만드는 존재 형식이다.

 

 그러나 오해는 말자. 중력을 벗어나서 생의 중심을 이루는 일은 자기 전부를 거는 위험한 작업이며, 적합하고 알맞은 균형의 소유는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기울어진 내 몸만 믿는 나는/그래 절름발이”라고, “삐딱해서 생”이고 “절름발이여서 간절하”다고. 이러한 간절함에는 섣불리 짐작할 수 없는 고통이 새겨져 있다.

 

 온몸이 데는 열망과 죽음을 감수하는 비장을 한데 둘 수밖에 없는 사정은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의 정도를 간접적으로 대변한다.

 

 하지만 그러한 간절함의 비원을 승화하는 방법 역시 이 시에는 암시되어 있다. 간절함과 열망과 비장이 하나로 용해되고 오토바이의 무서운 속도가 현실의 한계를 뚫고 나가려는 순간, 그리고 몸을 기울임으로써 길을 열 수 있는 중심을 찾아내는 유연성이 발휘되는 찰나, “길의 뼈들은 일제히 솟구쳐오르”고, “길이 사라진 곳에서 나는/파도를 타고 삐딱한 내 생을 관통”한다.

 

 삶의 극복은 삶을 정면으로 사는 데 있다. 그렇다면 시인의 자기 정체는 시를 온전히 사는[生] 데 있지 않은가? 시인에게 생의 중력은 바로 시다! 시인은 시로써 자신의 중력을 견지한다. 이 장면이 암시하는 전언을 이렇게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강계숙 님이 쓰고 詩하늘에서 엮음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가우/박창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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