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마종기] 북해의 억새

문근영 2013. 9. 10. 14:35

북해의 억새

 

마종기

 

 

정확히는 해안이 아니었어.

북해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능선,

그 언덕에 핀 지천의 은빛 억새꽃이

며칠째 메아리의 날개를 내게 팔았지.

저녁 바람을 만나는 억새의 황홀을 정말 아니?

 

그래도 가을 한 자락이 황혼 쪽에 남았다고

암술과 수술을 구별하기 힘든 억새꽃이

뺨 위의 멍 자국만 남은 내게 다가와

만발한 집착은 버려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나는 왜 오래 장소에만 집착하며 살아왔는지,

내가 사는 곳에는 사철 열등감만 차 있고

눈이 올 듯 늘 어둡고 흐려야만 안심을 했지.

그래서 순천에서 만난 억새는 놀라움이었어.

북해에 살던 그 풀들도 친척이 된다는 말,

얼마나 내 묵은 심사를 편하게 해주었던지.

 

나는 이제 아무 데나 엎드려 잠들 수 있다.

하루 종일 자유롭게 길 떠나는 씨를 안은 꽃,

꽃이라 부르기엔 눈치 보이던, 북해의

외딴 억새도 고향의 화사한 피의 형제라니!

저녁이면 음정이 같은 메아리가 된다니!

 

변하지 않는 시야에 서 있는 귀향의 끝,

평범하게 말없이 살자고 약속했던 그대여,

끝없는 추락까지 그리워하며 잠들던 그대여,

나도 안다, 우리는 아직 여행을 끝내지 않았다.

내가 찾던 평생의 길고 수척한 행복을 우연히

넓게 퍼진 수억의 낙화 속에서 찾았을 뿐이다.

 

 

 

—출처 : 시집『하늘의 맨살』(문학과지성사, 2010)

--------------------------------------------------------------------------------------

 

외지를 오래 떠돌았다면

그곳이 좋아 고향의 흔적을 잊고 있었다면

늘 가까이 있었던

마음을 끄는 모습에 젖어 있었으리라

북해의 억새라면 환경적으로

늘 화사한 처지에서 꽃피지는 않았을 테지

3연의 표현을 보면 드러난다

‘나는 왜 오래 장소에만 집착하며 살아왔는지,

내가 사는 곳에는 사철 열등감만 차 있고

눈이 올 듯 늘 어둡고 흐려야만 안심을 했지.

그래서 순천에서 만난 억새는 놀라움이었어.

북해에 살던 그 풀들도 친척이 된다는 말,

얼마나 내 묵은 심사를 편하게 해주었던지.‘

 

억새가 흐드러진 곳에서는

은빛 심사가 마음을 편하게 한다

화자가 만난 순천만의 억새는

화자에게 평안을 선사한 것 같다

‘나는 이제 아무 데나 엎드려 잠들 수 있다.’

하지 않는가

‘저녁 바람을 만나는 억새의 황홀을 정말 아니?’와

‘저녁이면 음정이 같은 메아리가 된다니!’는

동질감 속에서 외치는 순수 감정이다

더구나 이 표현들이 이 시의 백미를

돋보이게 하는데 동의 아니 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찾던 평생의 길고 수척한 행복’은

다름 아닌 억새의 특징을 가장 두드러지게 한 표현이 아닌가

질긴 생명은 세세년년 이어져

귀향의 끝자락에서 아름다운 낙화로

여행을 마무리 한다

나의 졸시 한 편 곁들여 올린다

 

 

억새 풍장에 들다

-가우 박창기

 

바람의 결 따라 끝없이 가서

바람에 허옇게 말리는 부처를 본다

지극히 야윈 한 가닥 억새로 서서

바람에 입적하는 큰 깨달음을 보이신다

아수라의 유혹에 굳이 몸 던지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풀 길 없는 신비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저린데

가난한 바람의 집에서

한잠 뉘여 보지도 못하고 고행에 드신다

시간을 주름잡아 한 겹 한 겹 옷 벗으시고

마침내 손사래마저 놓으시고

빈 몸이 더 아름다운

해탈의 언덕을 넘으신다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가우/박창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