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발 달린 짐승이 되어
최종천
옛날에 그러니까 1970년대에
마장동 뚝방 판잣집에서 먹고 자며
당시 서울시 제일의 우범지역이던 신설동 노벨극장 앞에서
구두닦이를 하고 있을 때 우두머리 형의 애인이었던 ‘누님’은
전라도 쑥부쟁이 촌가시네였다.
여름에는 우리들이 일층으로 내려오고
겨울에는 우리들이 이층으로 올라갔다.
한여름 밤 판잣집이 삐거덕거리며 흔들리면
나보다 먼저 들어온 닦이 선배들은 히죽거리며 웃었다.
다음 날 형이 없는 시간에 저녁을 먹으면서
야, 너희들 왜 히죽거리고 그러냐?
느그덜도 앞으로 살아 봐, 투정을 고봉으로 퍼주던 누나
나는 한참이 지나면서 그 사연을 알게 되었다.
판잣집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는 형과 누나가
네 발 달린 짐승이 되어 사랑을 하는 소리였던 것이다.
사랑이고 뭐고를 떠나 나는 그들의 그런 몸놀림을 긍정했다.
사랑의 몸짓에선 누구든 네 발 달린 짐승으로 퇴화한다.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선 우리 문명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리라.
-출처 : 『시와시』(2011.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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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참된 인생이란 무엇이고
참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바탕이 되어 쓰여진 듯하다
시인이 깨달은 것은 바로
‘사랑의 몸짓에선 누구든 네 발 달린 짐승으로 퇴화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처음부터 현재 여기까지
가파르게 이어져 온 것은 바로
‘네 발 달린 짐승으로 퇴화’한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명이 발전을 했음에도 이 행위는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았고 거룩한 일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화자는 자신이 깨달은 깨달음을 함께 나누기 위해
체험적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다
서로 사랑해서 나누는 雲雨의 정은 보장된 공간이라도 있었지만
1970년대의 판잣집 같은 환경에서는 알아도 모른 채했던 것이다
사회 환경이 그럴 때는 그렇게 배워가고
사회 환경이 다르면 또 다르게 배워가는 것이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화자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고 뭐고를 떠나 나는 그들의 그런 몸놀림을 긍정했다.’는 것이다
이런 자연적인 모습을 학습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런 긍정적인 마인드가 우리 사회의 불순한 폭력성을 막아주는 것이다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불온한 문명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고 노래하고 있다
네 발 달린 짐승으로 퇴화하는 행위는
사랑을 위해서든 생산을 위해서든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사회를 존재케 하는 기능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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