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김하늘] 블랙커프스홀

문근영 2013. 9. 2. 11:44

블랙커프스홀─ Pour Malena/ 김하늘
   

 



망가져야 해
 
거울에 반사된 내 알몸이 식상해 그럴 때면 애인의 물건을 훔치곤 하지 대리운전 번호가 찍힌 라이터나 면도기 또는 자위를 하고 난 뒤의 휴지뭉치 그게 아니어도 좋아 잘 입지 않는 드로즈 팬티나 페라리 블랙 냄새가 미미하게 묻어나는 커프스 한 짝 비교적 작고 사소할수록 좋아 눈치 채지 못 할 정도의 가벼운 것들
 
훔쳐온 가위는 유용했지 내 흑발 머리를 들쭉날쭉하게 만들었어 생머리 여자들은 주로 간교하거나 신경질적이지 올곧은 몸을 돌보거나 지키지 난 그런 여자들에게서 매너리즘을 느껴
 
지겨워지겨워지겨워(데이트가) 지겨워지겨워지겨워(브래지어가) 지겨워지겨워지겨워(흔들리는 젖가슴이) 지겨워지겨워지겨워(지겨워)
 
더 망가져야 해
 
훔쳐온 식칼에 내 이름을 쓰고 싶어, 기억이 안 나, 사람들이 나를 말레나라고 불러, 그제야, 내 이름을 나는 영영 몰라, 섹스는 질려, 자궁으로 식칼을 밀어 넣는 편이 낫지, 거기엔 환멸이 없어, 뻔하지 않은 상처와 흉터는 아름다워
 
오늘밤,
난 드로즈 팬티를 입고 장미 덩굴을 밟아
살갗을 터트리는 그 수많은 가시들,
발바닥에 엉기는 피가 속살거리며 되묻곤 해
넌 아직도 죽지 못했니?
병신,
오,Merde!
 
나날이거부하는것들이많아졌고그거부에내가있고네가있어(도대체얼마나더저질이어야하는거지?)거울은깨졌고사실난점점사라지는연습중이야죽을날짜를고민하는여자는까다롭지도않아깨진거울의파편에침이나뱉자개같이똥이나빨아!(항문이주는구원도퍽낭만적이지않아?)
 
내일은 또 어떤 방식으로 미쳐볼까
담배는 어디다 뒀는지

 

 

 

- 『현대시』(11월호)

-  우리카페 <시하늘> 2012.11.19 게시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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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커프스홀은 뭘까?

사람이름 같은 말레나는? 시의 내용을 봐서는 19금 영화의 여자 이름 같기도.......

화자는 띠동갑쯤 되는 젊음의 한 중간을 지나고 있으리라 짐작해 보게 되는 나이이다.

나이와 함께! 낯선 단어, 강렬한 시어, 자극적인 단어들을

이해의 폭 안에 넣어본다.   
20대 중반 무렵  내, 강한 시어들과 함께.

 

고요하거나 튀어오르거나

중간이 어려운 사람들!

20대가 그렇고

호불호가 분명한 사람이 그렇고

동향인들의 기질이 그렇고

또 어떤 누군가 그럴테지


밀접한 사이가 늘 필요하지 않지만, 가끔 풀코스가 동할 때가 있다.  왜 이 시어들의 뉘앙스가 이해되는 걸까? 환락과 쾌락과 타락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타락을 자책하기 보다는 타락에 쉽게 빠지는 인간의 실체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거다"

오히려 격려를 하고 있을까?

레이스와 커프스의 청순함과 고고함에 숨어 있는

사랑 없는 분비물처럼

내가 벗어나지 못하는

저질적인 속성을

인정할 때 오는

묘한 평화.

머리를 스스로 숏컷하는 것은 용감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밑바닥을 들여다보도록

선택받은 여인만이 열 수 있는 문이다.

많은 성자들은 현실에 대한 매너리즘으로 시작하여서

이상과 현실의 조화로 나아간다.
 
뜨거운 나라의 데이트를,

노브래지어에 티셔츠를 입는, 더 나아가서 나체의 자연스러운 풍을,

사회문화의 색안경에 지목되지 않는 "원자아"를!

각 개인 속의 20대는 미치도록 원한다.

 

술을 마심은 자아를 잊기 위해

섹스에 빠지는 것은 짜릿한 순간만이라도 자아의 실체를 잠시 놓기 위해

힘을 자랑하는 것도 자아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순간에 무너질까봐!이다


내가 아는 나와

원래의 나

남이 보는 나의 혼돈

 

방황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을 때 균형감각보다 극을 택하는 이들, 자기 학대, 비행, 자기 분열, 자아 상실, 자기 해체는

자아 해방이나 자기 초월과 구별되어야 한다.

거짓된 자아를 붙들고 사는 이보다

전자에 해당했던 이가 해방의 기회에 가깝다.

'자궁'에 어울리지 않는 '식칼'은 이런 극단의 비유에 가까우리라 짐작해본다.

 

고결함이라는 자아를 가진 당당한 자

거부를 주고 받는 패배자

'항문이 주는 구원'

'구원'과 '항문'이라.......

 

죽음과 배설물과 '구원'을 연결한 이 시가 왜 와 닿을까?

 

그리고 드로즈 팬티는 뭘까?

 

 

더 미쳐야 할까?


 

- 김선아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비매/김선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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