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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광렬] 주전자에 물을 끓이다

문근영 2013. 8. 24. 12:35

주전자에 물을 끓이다/ 구광렬

 

 

가을 저녁, 차를 마시지도 않을 거면서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새어나오는 김, 얼음만큼이나 다른
물의 또 다른 모습:
나도 끓으면 저렇게 가벼워지려나
그래 한 때 나 끓은 적 있다
비틀즈와 존 덴버를 흥얼대며
지하철 1호선을 오르던 시절,
광화문 뒷골목을
오색낙엽이 막걸리에 젖던 캠퍼스로 여기며
담배 연기 대신
최루탄가스를 폐 깊숙이 찔러 넣고
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를
교가처럼 부르던 시절:
하지만 난 뜨거웠으나 가볍지 못했다
난생 처음 여인의 입술을 통해
내 이름 석 자 불려 지던 날에도
낙뢰가 피뢰침에 떨어지듯
첫 여인의 터치가 우산대를 타고
내 맨손을 전율시키던 날에도...
난 그냥 얼음이었다 뜨거운 얼음

다시 끓으면 가벼워지려나...
눈 감고 끝내 못 부친 그 때 그 편지를 생각하며
늦은 이 가을, 마냥 주전자에 물을 붓는다


 

 

- 시집 『나 기꺼이 막차를 놓치리』(고요아침,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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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지도 않을 거면서
주전자에 물을 끓이면 덧없나요?

떨리지 않으면! 살아있지 않은 것!

달그락 달그락

피식 피식

쌕쌕 쌕쌕

 

막연히 정처없다가, 끓어보셨지요?
그것이 대학 캠퍼스건

절간이건

객기건 젊음이건 정의이건

저기, 구광렬  시인님

후회하지 마소
뜨거우면서 가벼운 것 보다

전율 속 얼음이 더 짜릿하지 않을까요?

소중히 끓을 수 있게
못 부친 편질랑은 잊고,

처음처럼
소복히 끓을 준비 되셨나요?

 

- 김선아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비매/김선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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