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권순자] 검은 늪...사랑의 확인

문근영 2013. 8. 8. 14:11

 

 

 

검은 늪

 

권순자

 

 

어느 날부터

역한 세월의 이끼가 슬어 나락에 빠진 늪

융숭한 나날이 퇴적되어

바닥은 비닐과 음료수 캔으로 뒤덮이고

밤마다 속이 쓰려 토악질을 해댔다

바람에 저며진 파문이 무료하게

끓어오른 거품들을 밀어냈다 끌어당기곤 했다

 

어디선가 흘러든 시큼한 폐수로

환부는 더 층층이 썩어들고

애초에 무엇이었는지 모르게

플라스틱처럼 딱딱한 얼굴로 성형된 늪

그 다 죽은 늪이

바람 잔잔하던 날

마지막 힘을 다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검은 침묵을 깨고 눈을 떴다

 

오래도록 꾹 참아 왔던 말을 내뱉듯

시커먼 가슴팍

그 흉한 구멍 안에서 백련白蓮 한 송이 꺼내 보였다

온통 검은 바닥에

슬몃 찍힌 흰 점 하나로 늪은 온통 빛나기 시작했다

 

검은 웅덩이가 아니라 청정한 연못이었음을

그곳에 남 몰래 쓰레기를 갖다버리던 사람들은

그제야 남 몰래 깨끗한 비밀 하나를 알았다

 

 

 

-출처 : 시집『검은 늪』(종려나무, 2010)

-사진 : 다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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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확인

-권순자 시인의 시 「검은 늪」을 읽고

 

 권순자 시인은 두 번째 시집 『검은 늪』(종려나무, 2010)을 통하여 사랑의 흔적을 찾아 떠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사랑이 없거나 사랑이 부족한 시대에 살고 있다. 사실 이러한 규정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회학적 근거와 인문학적 통찰이 있어야겠지만 구태여 그런 것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간단한 수고만 거치더라도 사랑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그 사랑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뭔가를 가지려 하고 있다. 또 그것을 남보다 먼저 얻으려고 도 다시 사랑을 부정해야 하는 악순환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권순자 시인의 시적 작업은 사랑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른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존재의 기억, 즉 시간의 흔적들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것은 이 흔들리는 기억들에 내재한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바로 이 사물화된 기호들로부터 존재의 근원을 부활시키는 일이다.

 

 이 시를 피상적으로 읽었을 때는 다분히 문명비판적이고 생태론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좀 더 꼼꼼히 의미를 따져 읽어 보면 이 시는 시인이 한 존재에 육박해 들어가는 정신적 과정을 보여 준다. 이 시가 이 시집의 표제작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검은 늪”은 현대 문명에 의해 파괴된 환경의 한 모습이기도 하지만 좀 더 넓게는 현대 사회에서의 한 존재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사회가 요구하는 기호들에 의해 규정되고 해석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기호들의 폐기물로 뒤덮여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우리 각자의 본질을 감추고 오염시켜 세상은 온통 “검은 늪”이다.

 

 그런데 그 검은 늪에서 “백련 한 송이 꺼내보”이는 일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다시 이해하는 것, 바로 사랑이다. 그 사랑을 확인해 가는 작업이 바로 권순자 시인의 시적 여정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 황정신 님이 쓰고 詩하늘이 엮음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가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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