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귀/이성선

문근영 2013. 8. 6. 12:48

 

내 귀를 비우고 싶네.

거리의 소리가 너무 높아서

진실도 거짓도 알기 어려워

내 귀는 쉬고 싶네.

 

내 귀를 이젠 바다를 향한

보석함으로 두고 싶네.

 

사람의 파장을 뛰어넘어서

다른 떨림의 울림 속에 들어가 살고 싶네.

풀잎 사이에 내려놓고

풀잎들의 맑은 목소리나 듣고 싶네.

 

나무들의 숲으로 가서

짐승과 별과 달과 바람이 얼굴 비비며

속삭이는 나라의 소리를 듣고 싶네.

 

내 귀를 이젠 비우고 비워서

떨리는 사랑의 소리나 가려 듣고 싶네.

 

-『이성선 전집』(서정시학, 2011)

 

이성선 시인이 들려주는 ‘귀’를 위한 서시를 앞에 두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떤 귀를 가져야 할까?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 우리는 이에 대한 좋은 답을 영혼의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가 간곡히 들려주는 ‘들음의 미학’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듣는 것은 쉽게 터득할 수 없는 기술이다. 하지만 이 기술 속에는 아름다움과 위대한 깨달음이 들어 있다. 듣는 행위는 존재의 다양한 깊이에서 이루어지지만, 우리는 언제나 선입견이나 특정한 관점을 갖고 듣는다. 있는 그대로 들을 줄을 모르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 고유의 생각, 결론, 편견들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어 제대로 듣는 것을 방해한다.

 

진정으로 들으려면, 내면이 고요하고, 배워야 한다는 긴장감으로부터 자유로우며, 편안하게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깨어 있으되 저항하지 않는 상태에 머물러야만 말 너머의 것을 들을 수 있다.

 

말은 어지러운 것, 그것은 단지 외부적인 소통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말의 소음 너머에서 소통하려면, 깨어 있으되 저항하지 않는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 사랑하는 이들은 잘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우리 대부분이 단지 결과만, 목적만 이루려고 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이기고 정복하는 데만 집중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듣지를 못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들을 줄 알아야만 말의 노랫소리도 들을 수 있다. -크리슈나무르티, 󰡔생활의 기술󰡕 중에서

 

빛나는 영적 통찰에까지 닿아 있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들음의 철학’은 참으로 깊고도 아름답다. 세상 밖의 소음뿐 아니라 내면의 소음 때문에, 우리는 어떤 ‘소리’ 하나조차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듣지를 못한다. 우리의 귀는 우리의 온갖 마음의 장막으로 막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마음의 소용돌이로 막혀 있는 귀는, 그가 말하는 ‘욕망의 장막을 따라 자기 욕망의 소리만 듣게 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럼 우리의 귀가 깨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길은 무엇보다 마음을 비우고 내면을 고요하게 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내면 속에 깊은 침묵이 깃들어, 비온 후의 숲 속처럼 온갖 소음이 차분히 가라앉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내면 속 고요로 깨어있는 귀, 그 비워짐으로 어떠한 저항 없이 어떤 소리에도 편안하고 순수하게 집중할 수 있는 상태, 그럴 때 우리는 말의 소음 너머에서 소통하며 말 너머의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우물 곁에 있다는 것.

우리가 눈을 뜬다는 것은

귀가 깨어

하늘의 숨소리를 듣는 것.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새벽 들판의 풀잎처럼

언덕 위 나무처럼

별 아래 함께 서 있는 것.

-<하늘의 숨소리를 듣는>

 

풀잎들이 주고 받는 맑은 목소리나, 숲 속 짐승과 별과 달과 바람이 얼굴 비비며 속삭이는 소리, 자연 속의 온갖 떨림과 하늘의 숨소리를 듣는 것은 오직 마음의 장막을 걷고, 있는 그대로 무구함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영혼의 귀가 활짝 깨어난 사람에게나 가능할 것이다. 이는 모두 인간의 욕망이나 기준 너머에 있는 빛 고운 자연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잘 듣는다는 것은 나를 내려놓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우물 곁이나 별 아래 함께 서서 서로를 깊이 들으며 말 너머의 것을 나눌 줄 아는 데 있을 것이다.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취루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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