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김예강] 초면

문근영 2013. 7. 20. 09:55

  초면


  김예강

  
 

  초면에 물컵을 떨어뜨렸다 들고 있던 물컵의 작약이 흉터를 예감하며 저편 작약의 없는 손을 잡으러 한다 빗물이 창문에 남겨진 어제의 눈동자를 조용히 지우며 간다 이럴 땐 어제의 내부는 겹꽃 같아서 영혼이 어디론가 자꾸 숨는다 싸늘한 골목의 등은 밤사이 피를 데우려다 아침을 맞이하곤 한다 골목 안 담장에 길없음이라 쓴다 갈팡질팡하던 아침이 등이 휜 고양이가 곧 얇고 유연한 새 골목을 끌고 오는 것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어디선가 들은 희미한 노래가 등 뒤에서 들린다 조금 자란 손톱을 들여다보다 손금이 어디까지 흘렸는지 생각한다 손바닥은 번개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내 안의 열에 내가 데인 자국이다 우리는 초면인데 애인이라 한다 우리는 초면인데 적이라 한다 나는 꿈속인데 느닷없이 사랑하는 말을 한다 고양이 울음이 밤을 서성이다 창문을 두드리고 간다 초승달 속에 오래전 내가 서성이던 골목.

 

 

 

―『현대시학』 (2013. 6)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흐르는 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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