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백무산] 시간 광장

문근영 2013. 7. 19. 09:12

시간 광장

 
백무산


 

 증기기관차가 들어오면 꼭 어울릴 낡은 읍에 가서
간판 글씨 절반은 달아난 전파사 구석 먼지 앉은
30년도 더 지난 에로이카 전축과 턴테이블과
LP판 백여 장 합계 십삼만 원에 사서
집으로 온다 모처럼 종일 두근거린다
스마트폰 살까 아주 잠깐 망설이던 돈이다
 

하루는 이미자 듣고 하루는 배호를 따라 부르고
또 하루는 아바와 놀고 일요일엔 나훈아와
비틀즈와 카펜트와 조미미와 만나고
조잡한 건 조잡한 대로 유치한 건 유치해서 나쁘지 않다
눈물 나는 건 훌쩍거리며 노래는 세월의 갈피다
갈피갈피에 접어 둔 가슴앓이 사연들 실밥이 풀려
그 시절 그 페이지 지지직지지직 바늘 긁힌
자국마다 핏방울 뿜어져 나온다


노래는 공장에서 죽은 내 동무의 얼굴을 재생한다
피를 뒤집어쓴 오후 세 시 삼십 분 여름 햇살이 눈을 찌른다
가난한 이별이 재생되고 비에 젖은 눈물은 지지직
흘러내린다 까맣게 잊은 여자아이 얼굴이 숨이 턱 막히도록
그립다 검은 얼굴 검은 손의 스무 살 내가
지금 막 내 방문을 두드리는 것 같다
 

판을 뒤지다 노래 하나 찾아낸 내 손이
불에 데인다 험한세상에다리가되어, 다
그 노래는 내 추억의 팔할이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이다
 

하지만 하지만 추억이 나를 데려가기에는
세상은 아직은 더러운 빚쟁이다
뒹굴기에는 추억에 가시가 너무 많다
이쯤에서 나는 머리를 흔든다 옛날이 그립지만
그만두자 그때도 몸서리쳤지만 지금도
그게 그거다 다만 추억은 시간을 호수로 만든다
 

스마트폰에 SNS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고
기계치냐고 누가 묻지만 그 반대다 나는 오랫동안
다빈치와 에디슨과 테슬라의 숭배자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한순간에 나는 멈추었다
도시 생태계 서식지는 단일종이 점령하고
별별 유사 혁명은 SNS에서 팔리고
시간을 곤두세우고 끊임없이 추심하려는 자들
강은 직강화 될수록 물은 소통되지 않고
쏟아 낼수록 발과 발이 걸려 불통인 몸 없는 말들 때문에
나는 침묵하고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않는다
머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나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내일은 해가 뜬다는 믿음은 얼마나 허약한 기회주의냐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으나 우리는 건너야 했고
그래서 필요한 것은 다리가 되는 일이라고 믿었던 날들
험한세상에다리가되는데 꼭 저 첨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낡은 쟁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꼰대가 필요한 것도 아니지만
신인류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증기기관차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사이보그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모든 건 도구다 도구다
 

다리만 빼고 모든 도구는 그저 막대기다
내 몸은 네안데르탈인과 마주하던
그 몸이면서 그들이 쥐고 있던 그 막대기다
그들은 여전히 나 자신 가운데 하나다
시간은 광장이다 전방위 화살이다
 

그래서 멈추는 것이 모든 방향으로 펼쳐지는 것이기를
다리는 몸을 낮추고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않는다

 

 


―『시작』(2013. 여름)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흐르는 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