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신흥사 양산 신흥사
신흥사(新興寺)는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영포리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통도사의 말사(末寺)이다. 301년에 신본(信本)이 창건했다고 하나, 이 때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이므로 신빙성이 없다. 초창기에는 건물이 110동에 이르는 대찰(大刹)이었다고 한다.
1582년에 성순(性淳)이 중창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僧兵)의 거점이 되었으나, 대광전(大光殿)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타 없어졌다. 1801년 호명(浩溟)이 중창하고, 1983년에는 영규(靈圭)가 주지(主持)로 부임하여 화엄전과 지장전, 칠성각, 산신각, 천왕문, 일주문, 국사당 등을 새로 지었으며, 대광전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흥사의 유물로는 보물 제1120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광전(大光殿)이 있다. 건물은 고려시대 후기의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유일하게 남은 건물로 내부에 관음삼존벽화가 독특하다. 이 벽화에서 나오는 관세음보살은 물병 대신 물고기를 들고 있는데, 대광전을 지을 때 함께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광전 내부 벽에는 모두 57폭의 벽화가 남아 있어 외벽의 14폭과 함께 대광전의 문화재적 가치를 보여주고 있어 보물 지정이 예고되어 있다.
신흥사의 창건연혁
신흥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고려시대까지의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초기의 연혁(沿革)을 알 수 없다. 다만 '여지도서(與地圖書)'의 ' 신흥사재군서육십리이천산 (新興寺在郡西六十里梨川山) '이라는 기록을 통해, 양산군 이천산(梨川山)에 신흥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어, 조선 후기에 사세(寺勢)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1988년 신흥사 대광전(大光殿)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암막새와 상량기(上樑記), 중수기(重修記)를 통해 대광전의 역사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이때 대광전의 중도리 바닥에서 ' 순치십사년정유년십칠일상량 (順治十四年丁酉年十七日上樑) '이라는 상량기(上樑記)가 발견되어, 효종 8년인 1657년에 중건되었고, 명문(銘文) ' 순치십사년월 (順治十四年月) '의 암막새 기와를 통해, 대광전 건립 5년 전인 1653년에 대광전을 건립하기 위한 기와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801년에 쓰인 '신흥사중수기'가 발견되어, 1657년 대광전 건립 이후 19세기 초반에 한ㅊ례의 중수(重修)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일제강점기에 대처승(帶妻僧)이 신흥사 아래에 사하촌을 이루며 사찰을 꾸려 나갔으나, 어느 순간 폐허가 되어 대광전(大光殿)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1983년 주지(主持)로 온 영규(靈圭)스님이 농막으로 사용되어 쓰러져가던 대광전을 보수하고 가람을 정비하여 오늘의 대광전을 보존하게 되었다.
대광전 大光殿
신흥사 대광전(大光殿)은 보물 제 11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건축면적은 128.4㎡이다. 다포계(多包系) 건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1988년 부분적으로 해체보수할 때 종도리(宗道里) 바닥에서 ' 順治十四年 (1657년. 조선 효종 8) 四月十七日記 '라고 쓰인 묵서명(墨書銘)의 상량기(上樑記)가 발견되어 건립연대가 밝혀졌다.
갑석의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礎石)을 놓고, 원주(圓柱)를 세우고, 내부 후불벽 좌우에 고주(高柱)를 세워 대들보를 받도록 하였다. 공포(拱包)는 외삼출목내사출목(外三出目內四出目)으로, 첨차는 모두 교두형이며 초제공(初提拱)에서 삼제공의 외부는 쇠서형이다.
전면에는 빗살문의 분합문을 어칸에 5개, 협칸에 3개씩을 두었고 측면과 후면에는 정자(정자) 디살문을 두었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후면 고주(高柱)에 의지하여 벽체를 조성하고 정면에 불단을 놓아 삼존불상을 안치하였다. 천장은 중도리(中道里) 아래에 있는 종보에 의지하여 우물마루를 가설하고 하중도리와 중도리 사이에는 빗천장을 가설하였다.
부처님께서 도량에 앉으시매 / 맑고 깨끗한 크 빛을 발하시네 / 마치 천개의 해가 한꺼번에 떠 오른 듯 / 온 세상을 비추시네
세존좌도장 世尊坐道場
청정대광명 淸淨大光明
비여천일출 比如千日出
조요대천계 照耀大千界
목조 석가삼존불상
대광전 불단(佛壇)에는 목조석가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脇侍)하여 있다. 1657년 대광전을 건립할 때 함께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존(本尊)은 나발(螺髮)의 머리에 육계가 솟아 있으며, 여기에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신체에 비하여 세장(細長)한 모습으로 두 눈은 반개(半開)한 채 아래를 응시하고 있으며,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입가에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대의는 한쪽 끝자락을 오른쪽 어깨 뒤로 넘긴 통견의(通肩衣)로 가슴 위에 노출된 군의(裙衣)에는 띠 주름을 표현하고, 대의(大衣) 아래 부챗살 모양의 도식화된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의 양식은 서로 같은 모습에 좌우의 수인(手印)과 보관(寶冠)이 서로 반대되는 점만 다르고, 전체적인 형태나 상호의 표현은 본존불과 같은 모습이다. 이들 삼존불(三尊佛)은 전반적으로 장방형의 얼굴, 경직된 신체, 도식화된 옷주름 등에서 17세기 후반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신흥사 대광전(大光殿)은 여느 사찰건물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내,외부의 벽(壁)에 채색된 수많은 그림과 단청이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사면의 벽체에 다양한 문양과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모습은 다른 곳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으로, 마치 고미술관(古美術館)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벽체는 액자의 틀처럼 그림을 감싸고 있고, 내부의 그림들은 각각의 주제에 따라 다양한 구성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부처남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八相圖)를 비롯하여 설법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영상회상도(靈山會相圖), 아미타, 약사, 관음삼존도와 같은 다양한 부처의 모습들이 표현되어 있어 불자들에게 있어 그 감회는 더욱 벅차다.
그림이 표현하는 상징과 의미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더라도, 이곳 신흥사 대광전에 가면 역사 속의 옛 사람들이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깊은 불심(佛心)을 느낄 수 있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법당 안의 불화 속에 파묻혀 보면 이곳이 곧 불국정토(佛國淨土)와 다를 바 없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찰 벽화 寺刹 壁畵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가 동산을 보시한 후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부처님께서 만약 허락하여 주신다면 나는 장식하고 싶다. 그리하여 부처님께 가서 말씀을 드렸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뜻대로 가서 그림믈 그리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허락을 들은 다음 온갖 채색(彩色)을 모으고, 아울러 화공(畵工)들을 불러서 어느 채색으로 그리는 것이 좋겠는가 하고 물었다.
그들은 어디부터 제작하여 어떤 것을 그리고 싶으냐고 다시 물었다. 장자가 나는 잘 알지 못하겠으니 마땅히 부처님께 가서 물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장자여, 문의 양쪽에는 마땅히 집장약차(執杖藥叉)를 그리고, 그 옆의 한 면에 대신통변(大神通變)을 그리며, 또 한 면에는 오취생사(五趣生死)의 수레바퀴를 그리고, 첨하에는 본생사(本生事)를 그리며, 문 옆에는 지만야차(持卍夜叉)를 그리고, 강당에는 늙은 비구가 법요(法要)를 선양하는모습을 그려라. 식당에는 음식을 들고 있는 야차(夜叉)를, 창고 문에는 보배를 가진 야차를, 안수당(安水堂)에는 물병을 가진 용이 묘한 영락(瓔珞)을 붙인 그림을 그리고, 욕실과 화실에는 천사경(天使經)의 법식에 의한 그림과 약간의 지옥변상(地獄變相)을, 첨병당(瞻病堂)에는 여래(如來)가 몸소 병을 간호하는 상(像)을, 대소행처(大小行處)에는 시체의 모습을, 방 안에는 마땅히 흰 뼈와 해골을 그려라 '
위의 내용은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 (根本說一切有部毘那耶雜事) '라는 경전에 기록된 최초의 불교 그림이자 불교벽화인 기원정사(祇園精舍) 벽화에 과한 내용으로, 우리 사찰에 남아 있거나 그려지는 벽화도 위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불교벽화는 벽의 위치와 성격에 적합한 다양한 내용의 그림을 그려 넣어 불교의 사상과 이념을 표현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중생들을 교화하고 신앙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불교벽화에 관한 기록은 불교가 전래되어 국교(國敎)로 공인된 삼국시대부터 꾸준히 등장하여 다수의 예가 전하기는 하나 모두 현존하지 않고, 실제로 남아 있는 벽화는 대부분 조선시대 후기에 개채(改彩)되거나 새로 조성된 것이다.
벽화는 건물의 일부로서 건물과 수명을 함께 하는데, 각종 전란(戰亂)이 빈번했던 우리나라는 오래된 건물 자체가 드물고 고려시대의 벽화로는 부석사(浮石寺) 조사당(祖師堂)의 몇 점과 수덕사(修德斯) 대웅전의 벽화 모사도가 전부이며, 조선 전반기까지의 작품 또한 단 몇 점에 불과한 실정이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피해가 극심해, 전 시대까지 천년 이상 면면히 이어져 불전(佛殿)을 장엄(莊嚴)하였던 화려하고 우수한 불교벽화의 전통이 상당부분 단절(斷切)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대부분 단청과 함께 조성되는 관계로 단청의 일부로 치부해 큰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고, 벽체의 제작형식이나 조성방법 또한 많은 부분이 왜곡되고 간소화되었다. 특히 촉박한 제작기간과 비용에 비례하는 관행으로 인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생략되기도 하고, 재료의 품질 저하와 잘못된 운용 등으로 벽화의 수명(壽命)이 한 세대를 넘기기 어려운 경우도 흔히 발생하고 있다.
또한 각종 불사(佛事)와 건물의 보수공사 때 인식부족으로 인해 많은 옛 벽화들이 사라지기도 하였다. 사찰에 그려진 벽화는 탱화와는 달리 그 특성상 고정되어있기 때문에 그리기도 어렵고 보존과 관리 또한 어렵다. 그러나 불교벽화는 미술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지님과 동시에 표현 형태나 양식 소재 등은 불교사상을 밝혀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불교회화의 원류로서 소중하고 당당한 우리 미술의 한 분야이다.
대광전 외부 벽화
신흥사 대광전은 건물 내,외벽과 포벽, 건물 내부의 대량(大樑)과 고주(高柱)에 그려져 있는 별화 등을 포함하여 많은 수의 벽화들이 현존하고 있다. 이들 벽화는 1989년 거물의 해체보수 때 부부넉으로 보수되었으며, 이후 2001년에 경주대학교 부설 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다시 보존처리된 후, 2009년 외부벽화에 대한 보존처리가 있었다.
현재 외부의 단청은 풍화(風化)작용에 의해 대부분 탈락되어 색채와 문양을 정확하게 식별하기 어려운 상태이나 풍판(風板)의 하단부분과 창방, 서까래, 부연마구리 등에는 약간의 자취가 남아 있다. 이에 반하여 내부의 단청은 거의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으며, 세부적인 문양 및 색조가 독특하고 높은 화풍을 보여주고 있어서 창건 이후 큰 개채(改彩)가 없이 전해온 것으로 여겨진다. 벽화 또한 건물 외부에 비하여 내부에 남아 있는 것들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대광전 외부 벽화는 건물 남측면 포벽과 동.서 측면 벽체에 일부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남측면의 포벽화는 어칸에 3점, 양측면의 협칸에 각 2점씩 모두 7점으로 화조(花鳥), 화훼(花卉), 연화(蓮花) 등이 묘사되어 있으며 상당히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은 단단하게 바름질된 회사벽에 그려졌는데, 채색층(彩色層)에 일부 마모와 퇴색이 진행되었고, 벽체는 미세한 균열이 있었으나, 2009년 보존처리를 통해 비교적 안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동,서 측면의 벽화는 동측면과 서측면에 각각 4점씩 모두 8점이 확인되고 있으며, 모두 풍판(風板)으로 가려진 상부에만 남아 있다. 비바람에 의한 풍화(風化)작용과 태양광에 의한 색의 탈락으로 내부에 있는 벽화보다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특히 동측면에 비해 서측면 벽화의 훼손정도가 더욱 심한데, 포벽과 마찬가지로 2009년 보존처리를 통해 비교적 안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동측면의 벽화부터 살펴보면, 가운데 칸에는 위쪽에 6명의 천인(天人)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주악비천도(奏樂飛天圖)를, 그 아래에는 천녀(天女)가 옷깃을 휘날리며 비파를 연주하는 천녀탄주비파도(天女彈奏琵琶圖)를 그렸다. 풍판(風板)을 지지하기 위해 세운 목조 부재로 인해 위쪽의 주악비천도는 중앙 하단부의 박락이 심하지만 외벽화 중에서는 그림의 윤곽과 색이 가장 잘 남아 있다.
좌,우측면의 평방 윗벽에는 쟁반에 여의주를 받쳐들고 있는 채 용(龍)을 타고 있는 용녀(龍女)의 모습을 그린 용녀기룡도(龍女騎龍圖)와 학(鶴)을 타고 있는 동자의 모습을 묘사한 동자비학도(童子飛鶴圖)를 그렸다. 한편 서측면의 벽화는 가운데 벽체에 위아래로 주악비천도(奏樂飛天圖)와 천녀취생도(天女吹笙圖)를 그렸으며, 좌.우측의 창방 윗벽에는 사자(獅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와 보현동자를 각각 그렸다.
대광전 내부 벽화
대광전 내부의 벽화는 동,서 측면의 벽체와 후불벽을 비롯해 남,북 측면의 포벽과 내목도리 윗벽에 남아 있다. 대체로 동측면과 서측면, 남측면과 북측면이 대칭을 이루는 가운데 동,서 측면에는 공포를 구성하지 않아 넓은 평면의 벽체에 벽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신흥사 대광전 내부 벽화는 그려진 시기를 보면 대략 17세기 후반에서부터 19세기에 걸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내부 동,서 측면의 벽화 중 약사삼존도와 아미타삼존도, 육대보살도, 팔상도 등은 대광전의 건립연대가 1657년임을 고려할 때 1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내부 단청 또한 개채(改彩)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주(高柱)의 여래도와 대량(大樑)의 운룡도(雲龍圖) 역시 비스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내부 포벽과 내목도리 윗벽의 여래도 등은 여러 번의 개채(改彩)로 인해 원래의 모습에서 변형되었으며, 외부벽화는 거의 박락되거나 훼손되어 정확한 시기를 추정하는 것이 어렵지만 19세기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단 벽화 三段 壁畵
신흥사 대광전 벽화는 조선시대 다른 사찰의 벽화와는 달리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물론 좌,우 측면 벽에 삼존도(三尊圖)를 그린 경우는 다른 사찰에서도 볼 수 있으나 한 벽면을 삼단(三段)으로 나누어 가장 위의 상단 벽에 본존불(本尊佛)과 협시보살(脇侍菩薩)을, 그리고 그 아래 중단(中段)에 육대보살을, 가장 아랫부분에는 사천왕과 팔부중을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매우 특이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동,서 측면의 벽화의 배치는 다음과 같다. 우선 동측면의 벽화는 모두 5점으로 중앙 칸 상단의 약사삼존도(藥師三尊圖)를 중심으로 좌,우측에는 위에서 아래로 여래도(如來圖)와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으며, 좌측 하단의 벽체에는 아수라왕도(阿修羅王圖)가 그려져 있다. 이 중 좌측 상단의 여래도는 최근에 새로 그린 것이다. 바면 서측면의 벽화는 총 8점으로 중앙 칸 위에서부터 상, 중, 하 3단으로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 육대보살도(六大菩薩圖), 사천왕도(四天王圖)를 그렸으며, 좌측에는 여래도, 팔상도를, 우측에는 여래도, 팔상도, 신중도의 순으로 배치하였다.
이들 벽화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벽화는 동,서 측면 상단의 약사삼존도(藥師三尊圖)와 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를 들 수 있다. 두 벽화 모두 중앙에는 본존(本尊)인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으며, 좌,우 협시(脇侍)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과 관음, 대세지보살이 반가좌를 취한 채 앉아 있는 모습이다. 특히 서쪽의 아미타삼존도 아래에는 육대보살도와 사천왕도가 함께 그려져 있어 상, 중, 하 3단으로 나뉜 것을 하나로 합치면 전체 화면이 아미타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가 되는독특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두 그림은 나발(螺髮)이나 수인(手印) 등 세부 형태에서 약간씩 다를 뿐 전체적으로 동일한 특징을 보여주는데, 색의 표현이나 필치가 상당히 유려하고 깔끔함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풍만한 얼굴에 치켜 올라간 가는 눈의 상호 표현과, 건장한 체구와 직각형 어깨 등의 신체 표현, 옷깃에 보이는 구름형태의 꽃무늬 등은 17세기 중후반의 불화에서 보이는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더욱이 광배(光背)의 표현에서 볼 수 있는 색색의 광선무늬는 18세기보다는 17세기 불화에서 그 유사성이 확인되므로, 벽화가 그려진 시기는 대광전이 건립되는 1657년 무렵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현재 벽화가 그려진 화면에는 가로 1개, 세로 2개의 중방목이 끼워져 있어 목재 부분의 채색이 탈락되었으며, 벽체에는 크고 작은 균열과 함께 박락(剝落)현상이 진행되고 있으나, 벽화가 조성된 시기를 고려한다면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그 외 동,서 측면의 평방 윗벽에는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다. 벽화로 남아 있는 것으로는 유일(唯一)한 예이며, 팔상도 중에서도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한다. 각 측면에 2점씩 모두 4점이 남아 있으며, 동측면 좌측에서부터 서측면 우측까지 시계방향으로 도솔래의상, 유성출가상, 설산수도상, 쌍림열반상이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다. 그림은 벽체가 귀포에 접하고 있어 화면공간이 좁은 이유로 세부묘사를 생략하고 단순한 구도로 이야기의 핵심만 간략하게 그린 것으로 보인다.
여래도 如來圖
대광전 내 벽화 중 여래도(如來圖)는 모두 4점으로 내부 동측면 벽에 2점, 남측면 내목도리 윗벽과 포벽에 21점, 내부 서측면 벽에 2점, 북측면 내목도리 윗벽과 포벽에 14점이 분포되어 있다.
대광전 내부 남,북 측면의 벽화로는 포벽과 내목도리 윗벽에 그려진 여래도(如來圖)가 있다. 남,북 측면을 모두 합하여 포벽에는 14점, 내목도리 윗벽에는 모두 28점이 남아 있다. 그림은 모두 연화대좌(蓮花臺座)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비로자나불을 그린 것이다. 이 가운데 포벽화는 다른 벽화들에 비해 건물의 하중을 많이 전달받는 구조이어서 벽체 균열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누수(漏水)로 인한 얼룩과 먼지의 침적이 다소 많은 편이다.
대광전(大光殿) 내부의 단청 중 별화(別畵)로는 고주(高柱) 좌우에 그려진 여래도(如來圖)와 대량(大樑)에 그려진 4점의 운룡도(雲龍圖)가 주목된다. 그 중 여래도(如來圖)는 다른 어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구성으로 그 필치 또한 매우 세련되어 보인다. 고주(高柱)의 약 1/2 가량 상단에 연화당초(蓮花唐草)를 화염(火焰)처럼 가득 채우고, 그 속에 연화대좌에 앉아 있는 여래(如來)의 모습을 그렸다.
포벽에 그려진 것으로는 14점이 있는데 공통적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나타낸 것이다. 아미타불은 연화좌에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왼팔을 아래로 내려 무릎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가슴 위치에 들어 올리고 있는데, 왼손과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법의(法衣)는 대의(大衣)와 군의(裙衣 ..치마)를 착용하고 있으며, 노출된 가슴의 아래 부분에는 수평으로 가로지른 승각기(僧却崎 ..속옷)와 띠 매듭이 보인다. 머리는 외곽만 나발(螺髮)의 모습이 표현되었고, 반달 모양의 중간계주는 있으나 정상계주는 표현하지 않았다. 상호는 직사각형에 가까운 갸름한 모습이며 이목구비는 시원스레 표현되었으나 얼굴에 비하여 입이 다소 작은 편이다.
육대보살도 六大菩薩圖
육대보살도(六大菩薩圖)는 대광전 내부 서측벽 중앙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왼쪽부터 제장애보살(除障碍菩薩), 미륵보살(彌勒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화면의 상단, 즉 보살의 가슴 부위에는 중방목이 가로질러 있는데, 이로 인해 벽체가 벌어지고 채색(彩色)이 박락(剝落)되어 보존처리를 한 흔적이 남아 있다. 육대보살(六大菩薩)은 두건(頭巾)을 쓰고 있는 지장보살을 제외하고 모두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신체에 비해 다소 작은 타원형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양 어깨에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표현되었으며, 법의(法衣)자락은 양팔 사이를 휘감아 아래로 흘러내리게 하였다.
보살 각각의 수인(手印)과 자세를 보면 제일 왼쪽의 제장애보살(除障碍菩薩)은 오른손은 아래로 내리고 왼손에는 함(函)을 들고 있으며, 미륵보살은 여의주를 들고 있다. 보현보살은 아래로 내린 왼손으로는 천의(天衣)자락을 쥐고 오른손은 들어 결인(結印)을 하였으며, 문수보살은 두 손을 가슴께로 들어 왼손을 펴 위로 향하게 하고 오른손은 앞으로 보이게 하여 수인(手印)을 맺고 있다. 지장보살은 다른 보살과는 달리 붉은색의 두건(頭巾)을 쓰고 붉은색의 대의(大衣)를 입고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은 오른손은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천의자락을 잡고 왼손은 가슴께로 올려 수인을 맺고 있다.
사천왕도 四天王圖
사천왕도(四天王圖)는 대광전 내부 서측면 벽 중앙 제일 하단에 그려진 것이다. 중방목과 중깃 때문에 3개로 나누어진 벽체에 그려졌는데, 왼쪽에서 첫 번째 칸에는 비파(琵琶)를 들고 있는 동방 지국천왕(東方 持國天王)을, 두 번째 칸에는 활과 화살을 들고 있는 북방 다문천왕(北方 多聞天王)과 용과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서방 광목천왕(西方 廣目天王)을 배치하였다. 이 사천왕도는 현재 중깃 부분에 채색된 것은 떨어지고 없으나 3칸이 연결된 하나의 화폭을 이루며 전체적으로 동, 북, 서, 남 순서가 되도록 하였다.
아미타삼존도 阿彌陀三尊圖
아미타삼존도는 대광전 내부 서측면 벽 상단에 그려진 것으로, 동측면 벽에 그려진 약사삼존도(藥師三尊圖)와 동일한 구도와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약사여래의 육계가 뾰족한 반면에 아미타불은 납작하여 중간계주만 표현되었을 뿐 정상계주는 표현하지 않았다. 관음보살은 보관(寶冠)에 화불(化佛)이 묘사되었고, 대세지보살은 경책을 들고 있다. 이 아미타삼존도 역시 화면을 가로지는 중방목으로 인해 채색이 박락되었으며, 벽체가 떨어져 나가 복부(腹部) 부분은 보수한 흔적이 크게 남아 있다.
신중상 神衆像
신중도(神衆圖)는 대광전 내부 서측면 벽 중앙 제일 하단에 그려진 그림이다. 커다란 날개가 달려 있는 구반다왕(鳩槃茶王)과 그 아래 코끼리 얼굴을 하고 있는 상왕(像王),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규(圭)를 들고 있는 인물, 송곳니가 뾰족하게 난 얼굴을 하고 있는 신중(神衆)이 묘사되어 있다. 구반다왕(鳩槃茶王)과 상왕(像王)의 경우 존상 옆에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쓴 방제(旁題)가 있어 그 존명(尊名)을 알 수 있지만, 그 외 두 신중의 경우는 방제(旁題)가 지워지거나 덧칠되어 있어 존명(尊名)을 알 수 없다. 특히 상왕(像王)의 하반신 부분은 벽체가 떨어진 것을 새로 보수하여 그림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위 사진의 구반다왕(鳩槃多王)은 붉은색 머리카락이 위로 솟구쳐 있고 송곳니가 뾰족하게 난 얼굴에 두 손을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구반다(鳩槃多)는 사람을 가위 눌리게 하는 귀신 또는 사람의 정기(精氣)를 빨아 먹는다는 귀신으로 사람의 몸에 머리는 말(馬)의 모양을 하고 있다. 구반다(鳩槃多)는 사천왕의 하나인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의 부하로, 8부중(八部衆)의 하나이며, 마두인신(馬頭人身)의 형상을 하고 있다.
위 사진의 상왕(像王)은 불교에서 '석가모니부처'를 코끼리 가운데 가장 큰 코끼리에 비유하여 일는말이다. 위 그림의 상왕(像王)은 하반신이 남아있지 않아 어떤 자세로 서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두 팔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검(劍)을 잡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관음삼존도 觀音三尊圖
후불벽(後佛壁) 뒷면에는 흑색 바탕에 백선묘(白線描)로 그린 관음삼존도(觀音三尊圖)가 그려져 있다. 현재 전국의 사찰 전각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는 모두 10여점 정도인데, 모두 본존불과 상관없이 관음보살을 그렸다는 점이 하나의 특징이다. 대광전 후불 뒷면에 가로 444.5cm 세로 223.7cm의 규모로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 이곳 신흥사 대광전의 관음삼존도가 주목되는 것은 관음(觀音)을 삼존(三尊)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관음벽화는 백의관음(白衣觀音)이나 수월관음(水月觀音) 등을 독존(獨尊)으로 표현하고 있는 데 반하여, 이 벽화는 중앙의 수월관음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어람관음(魚籃觀音)과 백의관음(白衣觀音)을 협시(脇侍)로 배치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벽화의 상태는 일부분 크고 작은 긁힘 자국과 먼지 등 불순물의 침적을 제외한다면 벽체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후불벽 뒷면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수월관음(水月觀音)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어람관음(魚籃觀音)을, 오른쪽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을 배치하여 삼존(三尊)을 구성하였다. 이처런 하나의 화면에 관음삼존(觀音三尊)을 표현한것은 희귀한 사례이다.
전체적으로 검은 바탕에 백색 선묘(線描)로 그렸으나, 보살의 머리카락과 정병(淨甁)에 꽂힌 버드나무가지는 녹색으로, 얼굴과 가슴, 손, 발 등은 피부색으로 채색하였다. 백의관음은 인도(印度)가 그 기원이며, 수월관음은 중국(中國)이 기원이다. 특히 어람관음(魚籃觀音)의 도상은 우리나라 불화에서 보기 드문 예로, 중국 당(唐)나라 때 어람관음의 연기설화에서 그 시원(始源)을 찾을 수 있다.
가운데, 수월관음 (水月觀音)
암석(岩石)에 앉아 오른발을 내린 유희좌(遊戱坐)로 원형의 광배(光背)를 뒤로 두고 정면을 향하여 앉아 있는 모습이다. 화불(化佛)이 있는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세로로 각진 듯한 얼굴에는 둥근 눈썹에 꼬리가 위로 올라간 가늘고 긴 눈, 두툼한 코에 작고 붉은 입술을 표현하였다.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에서 늘어진 천의(天衣)자락이 양팔 사이를 휘감아 바위 아래로 늘어져 휘날리고 있는가 하면, 법의(法衣)에는 당초(唐草)무늬, 국화무늬, 그름무늬 등이 세심하게 그려져 있어 정성을 기울였음을 느낄 수 있다. 오른쪽 반석 위에는 청조(靑鳥)가 앉은 버들가지를 꽂은 정병(淨甁)이, 왼쪽 반석에는 대나무가 그려져 있다.
중앙의 수월관음을 양류관음(楊柳觀音)이라고도 한다. 양류관음은 불교에서 병고(病苦)를 덜어주는 관음으로, 자비심이 많고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마치 버드나무가 바람에 나부낌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불화에서 주요한 화제(畵題)의 하나가 되어 오고 있는데, 그 상(像)은 대개가 바위 위에 비스듬히 앉아 오른손에 버들가지를 쥐고, 왼손은 왼쪽 젖가슴에 올려 놓고 있으며, 아래쪽 한 모서리에는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배치하여 그림상의 대각선구도를 살리고 있다.
예로부터 불화에서는 관세음보살이 다양한 자세로 묘사되어 왔는데, 흔히 오른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힘을 준다는 표식인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다. 버드나무 가지는 중생이 바라는 것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온갖 병을 제거한다는 맹세를 표시하는 것으로 이해되나, 그 유래는 분명하지 않다.
왼쪽, 어람관음 (魚籃觀音)
왼손에 커다란 물고기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가다가 수월관음(水月觀音)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원형의 두광(頭光)을 갖추고 감아올린 머리에 쪽을 진 모습이다. 겉으로 드러난 복식(服飾)은 아무런 특징이 없이 일반인들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하여 귀갑문(龜甲紋)을그려 넣었고, 듬성듬성 기운 듯한 표현도 눈에 띈다.
그러나 가슴과 소매, 다리 등에 부분적으로 드러난 안쪽의 옷은 화려한당초무늬와 연꽃무늬, 국화무늬가 장식되어 있어 이중적인 복식착용을 보여준다. 이로 볼 때 누추한외면은 어람관음의 ㅅㄹ화(說話)에서 보이듯, 생선을 파는 여인의 화신(化身)임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 속의 가려진 화려함은 관음보살 본연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어람관음의 연기설화
당나라 헌종(憲宗) 12년인 817년 때, 섬서지방은 사람들의 성질이 난폭하여 사악(邪惡)한 일만 일삼고 있는 무법지대나 마찬가지이었다. 어느 날 이 지역 금사탄 위에서 바구니에 생선을 담아 팔고잇는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그러자 청년들은 서로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싸움을 벌이기에 이르렀는데, 이에 그 여인은 많은 청년들에게 '관음경(觀音經)'을 나누어주며 하룻밤에 다 외우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말했다. 이튿날 아침, 관음경(觀音經)을 다 외운 청년이 수십 명이 되자 여인은 다시 '금강경(金剛經)'을 나누어주며 하룻밤 사이에 외우라고 했다.
다시 이튿날 금강경을 다 외운 사람이 10명이 되자, 여인은 '법화경(法華經)'을 나누어주며, 사흘 안에 다외우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마씨(馬氏)라는 청년이 홀로 다 외우고 여인과 혼례식을 올렸는데, 그 여인은 혼례식장에서 돌연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 여인의 장례를 치른 뒤 100일이 지난 어느 날, 한 노승(老僧)이 청년에게 찾아와 그 여인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화현(化現)이라고 일러 주었다. 이에 청년이 달려가 무덤을 파헤치자 향기가 진동하고 관(棺) 속에는 황금빛 쇄골(鎖骨)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노승(老僧)은 ' 이는 관음보살이 몸을 나타내오 중생을 교화한 성스러운 자취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그 후 이 지방의 사람들은 성질이온순해지고 신심(信心)이 깊어졌다고 한다.
오른쪽, 백의관음 (白衣觀音)
머리에는 베일이 보관(寶冠)에서부터 양 어깨를 감싸고 있어 화불(化佛)이 있는 부분만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다. 두 손은 법의(法衣)에 가려져 보이지 않으나 가슴 앞으로 올려 모으고 있는 듯하고, 두 발은 활짝 피어난 연꽃 2개를 각각 딛고 있다. 온 몸을 감싸고 있는 법의(法衣)에는 당초무늬와 연꽃무늬, 국화무늬가 가득 표현되어 있고, 부분적으로 어람관음(魚籃觀音)에 표현된 귀갑문(龜甲紋)이 보인다.
팔상도 八相圖
팔상도는 대광전 내부 동.서 측면의 평방 윗벽에 2점씩 모두 4점이 그려져 있는데, 벽화로 남아 있는 팔상도로는 유일한 것이다. 벽화들을 보면 처음부터 4점만 그렸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측면의 왼쪽에는 도솔래의상(兒率來儀像), 오른쪽에는 유성출가상(踰城出家像)이 그려져 있고, 서측면의 왼쪽에는 설산수도상(雪山修道像), 오른쪽에는 쌍림열반상(雙林涅槃像)이 좌우대칭으로 그려져 있다. 이 팔상도 벽화들은 좁은 화면에 그려서인지 불화에서 표현된 것처럼 다양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고 핵심적인 장면만 그려져 구도가 단순하고 간략한 편이다.
도솔래의상 兒率來儀像
도솔래의상은 과거세에 선(善)한 업(業)을 많이 쌓은 호명보살(護明菩薩)이 제천(諸天)을 거르리며 흰 코끼리를 타고 마야부인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을 보면 상단은 흰 코끼리를 타고 있는 호명보살이 수많은 권속들을 이끌며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이다.
주위의 시자(侍者)들은 일산(日傘)과 번, 부채 등을 들고 있으며, 보살은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규(圭)를 든 제왕의 모습이다. 하단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궁궐이 있는데, 지붕 용마루 끝에 표현된 치미가 특이하게 표현되었고, 건물의 주변은 서운(瑞雲)이 감돌고 있다. 내부에는 침상에 앉아있는 마야부인과 시녀를 표현하고, 상단에서 내려온 구름 끝이 마야부인의 머리에 닿도록 함으로써 호명보살이 마야부인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호명보살과 마야부인 사이의 공간에는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아솔래의상'이라는 화제를 적어놓았다.
유성출가상 踰城出家像
유성출가상(踰城出家像)은 출가를 결심한 태자가 한밤중에 마부가 준비한 말을 타고 사천왕의 도움으로 성벽을 넘어가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을 보면 하단에는 구불구불하게 표현된 성벽이 보이고, 그 아래 말을 타고 있는 태자와 말을 발을 받치고 있는 두 명의 시종이 보인다. 성벽 뒤로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무리를 지어 태자의 출가를 애통해 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상단은 숲속에 들어간 태자가 반석 위에 앉아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태자의 앞에는 말이 꿇어앉아 마치 발을 깨무는 듯한 모습이며, 한쪽에서는 마부 차익(車匿)이 태자의 관(冠)을 든 채 울고 있다. 또한 오른쪽에는 구름 속의 제석천이 그릇을 들고 있으며, 태자와 차익(車匿) 사이의 공간에는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유성출가상'이라는 화제(畵題)를 적어 놓았다. 그런데 상단에 그려진 그림은 팔상도의 설산수도상(雪山修道像)에 나오는 '금도낙발(金刀落髮)' 장면으로, 유성출가상과는 관련이 없는 내용을 이곳에 그려놓은 것은 출가하여 바로 머리를 깎았다는 내용을 연결하기 위한것으로 여겨진다.
설산수도상 雪山修道像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은 출가한 태자가 머리를 깎고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수행하다가 마침내 눈이 쌓인 설산(雪山)에서 6년 고행(苦行)을 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에서는 위쪽에 머리 위에 까치가 집을 짓고 있는 것도 모르고 수행 주인 태자(太子)의 모습과 오른쪽에 공양물을 들고 있는 인물, 왼쪽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예배하는 스님이 묘사되어 있다.
태자의 뒤로는 설산(雪山)을 나타낸 듯 산봉우리마다 흰색으로 채색하였고, 아래쪽에는 연꽃가지와 여의주(如意珠)를 들고 앉아있는 문수동자와 보현동자를 표현하였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설산수도상'이라는 화제(畵題)를 적어 놓았다.
쌍림열반상 雙林涅槃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은 사라쌍수 아래 누워 열반(涅槃)에 든 석가모니의 모습과 그를 둘러싼 제자들이 슬퍼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을 보면 상단에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쌍림열반상'이라고 적힌 화제(畵題)가 보이고 있으며, 그 아래 가운데로 가지를 뻗은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 사이에 마련된 단 위에는 오른팔을 베고 누워 열반에 든 부처님과 주위를 둘러싼 제자(弟子)들이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그런가하면 그림의 아래쪽에는 서기(瑞氣)를 뿜어내고 있는 사자(獅子)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약사삼존도 藥師三尊圖
약사삼존도(藥師三尊圖)는 대광전 내부 동측면 벽 상단에 그려진것으로, 화면을 가로지르고 있는 벽중방이 자리하고 있어 벽체가 균열되고 채색(彩色)이 박락(剝落)되어 있다. 땅에서 솟은 듯한 연꽃을 좌대로 삼아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는 약사여래와, 좌우에 역시 같은 형태의 연화좌대에 연꽃가지와 여의주를 들고 유희좌(遊戱坐)로 앉아 있는 일광,월광보살이 표현되었다.
중앙의 약사여래(藥師如來)는 우뚝 솟은 육계에 중간계주와 보주형(寶珠形) 정상계주를 갖추고 있으며, 상호는 방형(方形)이나 턱선이 갸름한 편이다. 얼굴 표현에 있어 눈 꼬리는 좌우로 치켜 올라가 이질적인 모습이나, 다부진 두 어깨는 전체적으로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손을 들어 결인(結印)을 하고 있는데, 왼손부분은 벽체가 떨어져 나가 보수를 하여 그림이 지워져 있다.
그러나 약사여래의 도성특성상 왼손에는 약합(藥盒)이 올려져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법의(法衣)는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의(通肩衣)로 대의(大衣 ... 설법을 하거나 걸식할 때에 입는 승려의 옷)와 군의(裙衣 .. 치마)를 착용하였으며, 노출된 가슴의 아래 부분에는 수평으로 가로지른 승각기(僧却崎 .. 속옷)와 띠 매듭이 일부 보인다. 대의(大衣)의 끝단에는 보상화문을 변형하여 표현한 문양과 구름문양으로 장식되었다. 약사여래의 광배(光背)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결합된 형태로 몸에서 오색광명이 뻗어나가는 모습이며 바깥쪽에는 경계를 지으려는 듯 구름으로 마무리하였다.
약사여래의 왼쪽에 협시(脇侍)하고 있는 일광보살(日光菩薩)은 연잎 위에 왼쪽 다리를 내린 유희좌(遊戱坐)로 앉아 연꽃가지를 들고 있으며, 이중으로 표현된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갖추었다. 화려하게 장엄된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끝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 색 원형 보주(寶珠)가 묘사되었으며, 가슴에도 영락(瓔珞)이 장엄된 목걸이를 하고 있다.
법의(法衣)의 장식 또한 약사여래와 동일하게 수평으로 가로지른 승각기(僧却崎 .. 속옷)와 띠 매듭이 보이고 있으며, 대의(大衣)의 끝단에도 보상화문을 변형하여 표현한 문양과 구름문양으로 장식되었다. 월광보살(月光菩薩)은 일광보살과 대칭적으로 그려 모든 표현에서 동일하지만, 보관(寶冠)에 흰색으로 달을 표현한 것이나 여의주를 들고 있는 점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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