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신륵사(神勒寺).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579 ~ 631)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말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抑佛政策)으로 많이 위축되다가, 1469년 영릉(英陵. 세종대왕의 릉)의 원찰(願刹...王의 명복을 빌어주는 절)이되면서 확장되기 시작한다.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이다.
신륵사는 고려말 나옹선사로 인하여 더욱 유명하다. 나옹은 고려 말 공민왕의 왕사 (王師)이었으며
인도로 유학, 인도의 고승(高僧)인 지공(指空)대사의 제자이며 , 조선 건국에 기여한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스승이다. 그는 한국 선불교 (禪佛敎)의 초석을 마련한 고승이었다.
이름은 혜근(彗勤)...호(號)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江月)이었다. 그는 인도 유학 후 왕사로 임명되면서 창건 중인 회암사 주지(主持)로 간다. 회암사 낙성식 때, 그의 명성을 듣고 인산인해를 이룬
백성들을 보고, 위기를 느낀 유학자들이 탄핵하여 밀양 영원사로 귀양을 가게 된다.
밀양으로 귀양 가던 중 ,이곳 신륵사에서 잠깐 머물다 갑자기 입적(入寂)한다. 누군가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여러 스님들과 백성들이 이 강가에서 화려한 다비식 (茶毘式....스님의 시체를 태워 유골을 수습하는 의식 )을 거행하고.....그 자리에 삼층 석탑과 정자(亭子)를세워, 그의 號를 따와 강월헌(江月軒)이라 이름 짓는다.
그의 초상은 이성계의 지시에 의하여 신륵사 내 조사당(祖師堂)에 그 스승인 나옹선사, 그 제자인 무학스님과 함께 모셔져 있다.
나옹선사의 오도송(悟道頌. 고승들이 부처의 깨달음을 얻고 지은 詩)이 유명하다.
청산혜요아이무어 (靑山兮要我以無語) ... 청산을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창공혜요아이무구 (蒼空兮要我以無垢) ...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료무노이무석혜 (聊無怒而無惜兮 ) ...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여수여풍이종아 (如水如風而終我 )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하여튼 이 강월헌은 나옹선사의 죽음과 관련된 일화와 함께, 산수(山水)의 조화가 어울리는 신륵사 내 최고의 조망이다. 여기에는 여러 유명 시인 묵객들의 詩가 걸려 있는데 아래와 같다.
고려 말 큰 선비인 목은 이색(李穡)의 시(詩)는......
천지무애생유애 (天地無涯生有涯) 천지는 가이 없어도 인생은 가이 있으니
호연귀지욕하지 (浩然歸志欲何之) 호연히 돌아가려 하니 어디로 갈 것인가
여강일곡산여화 (驪江一曲山如畵) 여강의 산은 그림처럼 아름다워
반사단청반사시 (半似丹靑半似詩) 반은 단청같고, 반은 시와 같구나...
자연의 무궁함과 인생의 유한함을 노래하면서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를 한탄하고 있다. 망해가는 고려, 망국민으로서의 회한일 수도 있고, 인생무상을 노래한 것일 수 도 있겠다.
또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詩도 있다.
아래애차호강산 (我來愛此好江山) 나 여기 와 아름다운 강산을사랑하며
종일승선우기난 (終日乘船又岐欄) 하루 종일 배도 타고 난간에도 기대 본다
수저삼라개불찰 (水底森羅開佛刹) 물 밑에는 절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임주은약견선단 (林周隱約見仙壇) 숲 사이에는 선경이 보이는 듯 마는 듯하구나.
남아있는 고려시대 유일의 전탑...7층이다. 전탑이란 흙으로 벽돌을 구워 쌓은 탑이다.
멀리 길을 돌아 강 건너에서 강월헌과 삼층석탑의 모습...단풍이 매우 곱다.
신륵사는 드물게 강가에 세워진 절이다. 이 일대 남한강의 풍경은 조선 세종시대의 문장가 김수온이 " 여주는 낙토(樂土)인데, 신륵사는 이 형승(形勝)의 복사판" 이라고 할 만큼 환상적이다. 하지만 몇해 전, 강원도 인제와 평창에 집중호우가 왔을 때, 범람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이 당시 백지화되었던 東江댐 건설 계획이 다시 재론 될만큼 위기가 심각하였었다. 이명박이 대운하계획을 실행한다면 무조건 신륵사 특히 이 강월헌은 물에 잠긴다고 한다.
오래 전, 큰 홍수때 이미 강월헌이 떠내려 간 적이 있었고, 지금의 그 것은 그 후 콘크리트로 복원한 것이다. 이렇게 위태로운 곳에 절을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 찾아 본다.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신륵사는 한국 자생 풍수의 본질에 충실한 비보(裨補) 사찰이라고.... 비보란 글자 그대로 도울 비, 도울 보...모자란 것은 채우고, 병든 땅은 고쳐서 쓴다는 의미이다.
한국의 전통 풍수는 땅을 어머니처럼 여기며,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편안하게 살아가는 삶터를 만드는 것이 모적이며, 이해가 되지 않는 위험천만한 곳에 자리잡고는 사랑으로 어루만지면서 좋은 땅으로 가꾸어 가는것이 바로 비보(裨補)라는 설명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할 때, 무학대사는 한양의 지기(地氣)를 다스리기 위하여
호압사(虎壓寺), 사자암(獅子庵)을 관악산에 세운다. 전형적인 비보사찰이다.
이렇게 신륵사에는 남한강변에서 살아 가는 중생들이 잦은 홍수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살펴 달라는 발원(發願)이 담겨 있다. 설혹 범람하더라도 홍수 경보기 역할을 수행하여, 마을 사람들이 대피는 할 수 있도록 불법(佛法)의 힘을 빌린 것이다.
신륵사에 위와 같은 비보사찰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전설에서도 확인이 된다. 절 건너 마암(馬岩.말바위)에서 날 뛰는 황룡마(黃龍馬)와 여룡마(驪龍馬)를, 고려시대 인당대사가 굴레를 씌워 다스려 신륵사로 이름지었다는 전설이다. 날뛰는 누런말(황룡마)과 검은말(여룡마)이 장마철 급류를 상징한다면, 이 것을 잠 재울 심령스러운 굴레 (즉, 신륵.神勒)는 절을 지은 사람들의 염원이라 할 수있겠다. 이 곳 여주의 이름이 고려시절에는 황려(黃驪), 조선에 들어 와서는 여흥(驪興)과 여주(驪州)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증명이 된다고 할수 있다.
조사당(祖師堂)... 이 조사당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지시로 신륵사 안에 건립한 건물로... 이성계의 스승이었던 왕사(王師) 무학대사... 인도의 저명한 스님 지공(指空)선사...그리고 나옹선사의 초상이 걸려 있다. 나옹선사는 지공스님의 제자이었으며, 무학대사는 나옹선사의 제자이었다. 일찌기 인도 유학에서 고려로 돌아 온 나옹선사는 이성계가 王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무학대사는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데 많은 공을 세운다.
이성계가 나옹선사를 기리며 조사당(祖師堂)을 짓고, 그 앞에 향나무를 심었다.
조사당 내부에 모신 지공선사. 나옹선사 그리고 무학대사의 초상화.
나옹선사의 부도탑과 석종(石鐘)
불교에서 물고기의 의미는 각별하다. 물고기는 잠을 잘 때에도 눈을 뜨고 자며, 죽어서도 눈을 뜨고 있다. 따라서 항상 깨어 있어, 깨달음을 얻으라는 의미이다. 스님들이 하얀 고무신을 신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마음을 깨끗히 하듯이, 하얀 고무신도 항상 때 묻지 않은 순백을 유지하여야 한다..
'문화유산을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개성 경천사지 10층석탑 (0) | 2013.07.07 |
|---|---|
| [스크랩] 구인사..천태종 (0) | 2013.07.06 |
| [스크랩] 양산 신흥사 .. 사찰 벽화의 보물창고 (0) | 2013.07.04 |
| [스크랩] 용주사 (0) | 2013.07.03 |
| [스크랩] 해인사 (0) | 2013.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