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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조의 법령개정 신중론과 비변사 [김태희]

문근영 2013. 5. 29. 07:03

 

제 269 호
정조의 법령개정 신중론과 비변사

 

 

김 태 희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정조는 즉위한 지 2년쯤 지나 민산(民産)·인재(人材)·융정(戎政)·재용(財用)을 내용으로 한 ‘경장대고(更張大誥)’를 선포했다. 대략 민생, 인사, 군사, 재정의 네 가지의 개혁대강을 밝힌 것이다. 정조는 이 선포문에서 나라의 상태를 큰 병이 든 사람으로 비유했다. 그리고 “경장(更張)하는 것이 옳은가, 인순(因循)하는 것이 옳은가” 묻는다. 병든 사람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법령을 바꾸는 것에 대해 신중한 입장이었다. “대개 법령은 조종조(祖宗朝: 왕조를 일으킨 시기)에 몸소 겪어보고 강구·연마하여, 넘어지고 엎어지더라도 깨지지 않을 것을 구한 연후에 거행한 것이다.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것이 형세이지만, 변한 것을 바로잡아 옛것을 따를 뿐, 쉽게 경장할 수 없다.”

본래의 법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중요

  정조의 <일득록>에서 이런 입장을 여럿 볼 수 있다.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바로잡는다. 그런데 바로잡는 것이 그 요체를 얻지 못하면 그 폐단이 바로잡기 전보다 오히려 심해진다.” 또 섣부른 변통보다 본래의 법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고, “탐관오리가 설치는 것이 법이 치밀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법이 행해지지 않은 데서 연유한 것이라”는 말도 했다.

  정조를 충실히 따랐던 다산은 <경세유표> 서문에서 경장의 필요성을 강력히 피력했는데, 정조에 비해 더욱 절실했다. 조종(祖宗)의 법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개정논의를 억제하는 경향이 있는데, 다산은 조종의 법이 아직 어수선했던 시기에 여러 사정을 좌고우면하여 원망을 적게 하는 길을 찾느라 미흡했다 하여, 오히려 그 한계를 주목했다.

  다산은 “세상의 도(道)가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아서, 한번 정하면 만세토록 불변이라는 것은 이치로 보아 그럴 수 없는 것”이라 했다. 대동법, 노비법, 군포법 등의 개정이 “모두 천리(天理)에 부합하고 인정(仁情)에 화합하여 사계절이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나아가 폐단을 드러낸 오래된 법제를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경고했다.

  구체적 사안으로 비변사에서 정조와 다산의 입장 차이를 볼 수 있다. 비변사는 <경국대전>에 규정되지 않은 임시기구였는데 점차 상설기구가 되었다. 의정부-육조 라인을 골간으로 하는 공식 관료체제를 잠식하고, 기능이 비대해졌다. 비변사의 존재로 인해 의정부는 쓸데없는 관청이 되었다. 비변사는 당시의 정치적 역관계를 반영하여 구성되는 지극히 정치적인 기구였다.

  정조는 처음에 의정부가 본래 모습을 복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본디 의정부는 왕권을 견제하는 신권을 상징했지만, 정조는 대신(大臣)의 권한을 강화하여 왕권 강화를 뒷받침하려는 의도에서 의정부의 기능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태도를 바꿨다. 임시방편적인 비변사가 이미 제도로서 고착되었다고 보아 비변사를 대신(大臣) 중심으로 운영할 것을 도모했다. 정조의 입장변화는 과거 최명길의 논의변화와 같은 모습이었으며, 선후 입장은 모두 대신권 강화를 통해 왕권 강화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였다.

정조가 활용한 비변사를 훗날 세도가가 활용

  다산은 <경세유표>에서 비변사 업무가 변무(邊務)만이 아니라 모든 업무[萬務]이므로 이름과 실질이 불일치하다고 지적했다. 탕평론자인 박세채가 이미 지적했던 바였다. 다산은 이름만 있고 실질이 없는 중추부가 비변사의 실질을 가져가고, 일부 기능은 없애 의정부 기능을 정상화하는 개혁안을 제시했다.

  제도인식과 법령개폐론은 논자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정조와 다산의 차이에는 군주와 신료라는 지위에 따른 관점의 차이가 엿보인다.

  정조가 주목한 비변사의 효율성은 정조 사후 세도가에 의해서 활용되었다. 비상한 시기를 전제한 비변사는 관료체제의 장악력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의 유교관료제가 내장한 견제장치를 제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명실(名實)의 불일치는 권한과 책임의 괴리를 초래할 수 있었다. 권한은 행사하면서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비변사를 통해 세도가는 공조직을 장악하고 사적으로 농단할 수 있었다.

  오늘날 법제는 헌법, 법률 등의 순으로 위계가 있다. 헌법에 대해서는 정조의 신중론처럼 개별규정의 본래 취지와 전체의 헌법정신에 충실한 것이 우선 과제일 것이다. 또한 비변사 사례가 말해 주듯, 권력기구를 둘러싼 제도운영은 효율성에 현혹되어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방기해서는 안 된다. 특히 권한과 책임이 비례하지 않는 경우를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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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태희

· 다산연구소 연구위원(전 기획실장)
· 정치학박사

· 논저 
< 정조의 통합정치에 관한 연구>(2012)
< 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공저, 2011)
< 왜 광해군은 억울해했을까?>(2011)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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