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스크랩] 음식의 제국과 미각의 제국 [정지창]

문근영 2013. 5. 23. 06:55
제 16 호
음식의 제국과 미각의 제국

정 지 창 (영남대 독문과 교수)

  예나 지금이나 음식, 곧 밥을 골고루 배불리 나누어 먹는 것이야말로 모든 민생정치의 근본이요 인류문명의 핵심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황제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말이 전해온다. 다시 말해, 민심이 천심이요, 천심은 밥그릇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가하면 김지하는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동학사상의 핵심을 “밥이 하늘이다”라는 명제로 재해석하였고(이른바 ‘장일담’ 메모) 이를 바탕으로 임진택은 1980년 4월 서울대 교정에서 마당극「녹두꽃」을 만들어 공연하였다. 해동백미교의 교주 진풍운이 내란음모죄로 처형되자 감옥에서 감화를 받아 후계자가 된 흉악범 고막봉은 “밑바닥이 하늘이다”라는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탈옥하여 굶주림에 분노한 신도들을 이끌고 밥을 찾아 황성으로 진격한다.

  판소리「춘향전」의 백미는 이몽룡이 변학도의 생일잔치에 끼어들어 일필휘지로 판을 뒤엎는 대목이다. “금잔의 좋은 술은 만백성의 피요, 옥쟁반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을 짠 것,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이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드높다. 金樽美酒千人血, 玉盤佳肴萬姓膏, 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걸판지게 먹고 마시던 각 고을 벼슬아치들은 암행어사의 추상같은 꾸짖음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관객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다’(Man ist, was man ißt.)

  그러나 단순히 배를 채우고 생명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만 음식을 먹는 인간은 없다 『음식의 제국』(에번 D. G. 프레이저, 앤드루 리마스 지음, 유영훈 옮김, 알 에이치 코리아)에 따르면 “음식은 혀를 만족시키고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기”(8쪽) 때문이다. 변학도의 생일잔치에 나오는 향기로운 술과 맛있는 안주는 단순한 식량이 아니라 사교적 모임의 우의를 다지기 위한 인류의 오랜 관습, 즉 미식의 한 사례에 불과하다.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난리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산해진미의 잔치판이 벌어지는 것은 인류역사의 변함없는 일상이다.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굶어 죽어갈 때도 서울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달콤한 음악을 들으며 스테이크를 자르고 원두커피나 포도주를 홀짝이는 사교 모임은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금욕적인 절식과 거친 음식, 육체노동, 수행으로 이루어진 수도원을 재현한 공동체가 식량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는가. 얼핏 그럴듯해 보이는 이 방안은 농업의 역사를 훑어보면 실현가능성이 없는 허망한 꿈처럼 보인다. 놀랍게도 서구의 수도원들은 농업혁명과 교역의 중심지로서 오늘날의 다국적기업처럼 각종 농산물의 생산과 가공, 교역과 금융을 모조리 독점하여 부를 축적해왔기 때문이다. 가령 황무지의 개간이나 발토판 쟁기(moldboard plow)의 발명, 윤작, 물레방아를 이용한 제분, 맥주의 양조, 치즈, 포도주, 꿀의 생산과 교역은 중세의 수도원들이 주도해온 사업들이었다.

  『음식의 제국』은 인류문명의 흥망성쇠를 식량과 음식이라는 측면에서 조명하고 해석한 일종의 농경문화사이자 우리가 익히 아는 정치 중심 역사의 이면사(裏面史)이다. 단순한 농업사나 농업경제사가 아니라 농업, 기후, 환경 문제를 총체적으로 다루면서 인류가 당면한 식량위기에 대처할 방안들까지도 제시한다. 물론 그러한 대안들이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고 혁명적인 것도 아니지만, 인류의 유구한 농경문화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훑어보면서 그것들을 차분하고 진지하게 음미하도록 유도한다.

  이 책은 인류의 역사가 도시문명의 역사이고 도시문명은 잉여식품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규정한다.: “1만 년 된 인류의 도시 문명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될 수 있다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다’(Man ist, was man ißt.) 예리코에서 뉴욕의 맨하튼까지, 모든 도시는 잉여 식량의 생산과 교환이라는 토대 위에 존재해 왔다. 식품은 부(富)이다. 식품은 예술이고 종교이며 정부고 전쟁이다. 그리고 영향력을 갖는 모든 것이다. 이따금 악취를 풍기는 문화적 꽃이기도 하다.”(10쪽)

  그런데 음식의 제국을 떠받치고 있는 세 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인간 사회, 즉 음식의 제국은 반드시 세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첫째, 농부는 자신이 먹는 것보다 더 많은 식품을 길러내야 한다. 둘째, 이러한 잉여 식품을 구매자에게로 운반할 수단이 있어야 한다. 셋째, 운송 도중에 식품이 썩어 경제적 가치가 사라지지 않도록 저장할 방법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 전제가 함께 들어맞을 때 도시의 삶은 풍요로워진다.”(10쪽)

  “금융위기는 삶을 망치지만 식량위기는 삶을 끝장낸다.”

  그러나 석유와 비료, 종자 개량과 대규모 단일재배 등에 의존하여 지난 백여 년간 번성했던 식품의 제국은 △비옥한 토양과 △온화한 기후, △단일 작물의 대량재배,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지력의 고갈과 기후 변화에 취약하고 석유 고갈 등의 요인에 의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 위의 성에 불과하다고 저자들은 경고한다. 이미 2008년에 전세계적인 풍작에도 불구하고 곡물가가 폭등하여 식량위기가 닥친 바 있다. 2005년 이후 주요 농산물 가격은 80% 이상 뛰어올랐고, 쌀값은 19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밀 가격도 2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여 지난 25년 평균 가격의 두 배가 되었다. 그 결과 7천 5백만 명이 ‘굶주리는’ 계층으로 새로이 편입되었다. 만약 2008년에 환경재앙이 겹쳐, 가령 곡창지대인 미국 중서부에 가뭄이 들거나 우크라이나 밀밭이 유럽조명나방 같은 병충해 피해를 입었다면, 식량에 관한 인간의 안일한 낙관론은 송두리째 뒤엎어졌을 것이다.

  “금융위기는 삶을 망치지만 식량위기는 삶을 끝장낸다. 지난 금융위기 때 증발된 미국 퇴직연금 때문에 아이가 괴혈병에 걸려 이가 빠지지는 않았다. 반면 식품 제국의 붕괴는 생존이 걸린 문제이다.”(33쪽) 이러한 경고는 하도 여러 번 들어 그리 자극적이지 않지만 역사상 모든 제국은 언젠가 흔들리고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경험적 진실 앞에서 우리는 좀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가령 로마제국의 몰락에도 남벌로 인한 이탈리아 반도의 척박한 토질과 자작 소농의 몰락과 원로원 귀족들의 대규모 토지 소유와 단일작물 재배, 머나먼 해외 식량교역로와 해적들의 출몰, 기후의 한냉화 등이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토지 개혁을 주장한 그라쿠스 형제를 타살한 대지주인 원로원 의원들의 완강한 기득권 고수와 조세제도의 부패로 도로 보수와 해적 소탕을 담당할 군대 유지가 어려워진 것도 로마의 몰락을 재촉했다. 서기 410년 서고트족이 침입하여 로마 시를 포위하여 밀 공급이 끊기자 서로마 제국은 몇 주를 버티지 못하고 성문을 열고 말았다.

  농업의 빛과 그림자: 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렸지만 골격 작아지고 노동 시간 늘어나

  수렵채취에서 농경으로 생활 방식이 바뀐 이른바 신석기 농업 혁명에 대해서도 이 책은 흥미로운 사실들을 전해준다. 아담과 이브가 살았다는 에덴동산이 코카사스 산맥 기슭이었고 아담과 이브는 실제로 수렵채취 생활을 하며 행복하게 살았는데, 선악과를 먹은 죄로 땀흘려 농사를 짓고 살게 되었다는 가설을 제시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것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서 탄생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중국의 하, 은, 주 문명과 더불어 인류가 수렵 채취 생활에서 벗어나 물길 관리, 즉 관개(灌漑)를 통해 생산한 잉여의 농산물로 교역을 통해 이룩한 최초의 농경문명이었다.

  농업은 더 많은 인구를 먹이도록 해주었지만 그와 더불어 숱한 부작용도 낳았다. 전에는 자연 상태의 신선한 고기와 채소를 먹다가 곡물을 주식으로 삼게 되면서 음식의 질과 음식의 맛이 떨어지고 충치와 시력 감퇴(비타민 결핍), 결핵, 골염 등 질병이 많아지면서 수렵 채취인보다 골격이 작아지고 골밀도도 낮아졌다. (케테 콜비츠의 독일 농민전쟁 연작 판화에 묘사된 16세기 서양의 굶주린 농부들의 왜소하고 피골이 상접한 몰골은 역사적인 진실이었구나!) 인류는 산업혁명 시대에 와서야 1만년 전 조상의 키를 회복했다. 수렵 채취인은 한 주에 평균 20시간을 일한 반면, 농부는 주당 40〜60시간을 뼈빠지게 일해야 했다. 농업으로 잉여농산물이 생기자 이를 빼앗기 위한 전쟁과 범죄가 늘어나고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제, 절대군주제가 정착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부작용은 농경지의 확대로 숲이 사라지고 토양이 척박해지면서, 곡물생산량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계절과 지역의 한계를 초월한 오늘날의 식품제국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 것은 음식의 보존법이 개발된 덕택이다. 가령 고대 로마에서 생선을 소금물에 삭혀 만든 ‘가룸’이라는 액젓,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 살균제인 호프를 넣어 발효시킨 맥주, 8세기에 아랍에서 유럽으로 전파된 후 달콤한 맛으로 혀끝을 유혹하여 당뇨병과 각종 질병의 원인을 제공하고 과일의 절임용으로 보존기간을 연장해준 설탕, 고기와 채소의 신선도를 유지시켜주는 얼음 등이 음식의 세계화를 가능케 하였다.

  비료와 독가스, 과학자의 책임과 양심

  이와 함께 20세기 초에 독일인 프리츠 하버와 칼 보슈가 개발한 암모니아 생산공정에 의해 비료가 대량생산된 것도 식량증산에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오늘날 전세계 인구의 40%가 하버-보슈법으로 만든 단백질에 의존해 산다. “원자로와 우주왕복선은 인류의 참살이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농업용 질소를 합성할 수 없었다면 세계인구가 1900년의 16억 명에서 오늘날의 60억 명으로 늘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캐나다 과학자 바츨라프 스밀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1868년생인 하버는 1909년 공기 중의 질소를 고정시켜 암모니아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냈다. 섭씨 400도의 고열과 대기압 200배의 압력을 가하여 질소 원자를 쪼개어 수소와 결합시킴으로써 암모니아를 합성해낸 것이다. 그는 야금학자인 보슈의 도움으로 실험실에서 가능한 암모니아 제조법을 대규모 공장생산체제로 전환시켰다. 1913년 최초의 암모니아 생산 공장이 남독에서 문을 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독일 군부가 질산염을 이용한 폭탄제조를 의뢰하자, 하버는 질소 비료 대신에 고성능 폭탄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916년에는 적군의 내장을 녹이는 독가스 개발에 나선다. 국제조약으로 독가스 사용은 금지되었지만, 하버는 적군을 단숨에 궤멸시켜 독일 젊은이들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독가스 개발과 살포에 직접 참여한다. 그러자 이에 극구 반대하던 그의 부인은 권총으로 자살하고야 만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20년 그는 뒤늦게 1918년도 노벨상을 수상한다. 그의 노벨상 수상 연설은 겸손하였다. “질소 비료가 토양을 개선하여 인류에게 새로이 풍부한 영양을 가져다 준 걸로 충분합니다. 화학 산업은 대지의 돌을 빵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농부를 돕습니다.” 이후 하버는 살충제 개발에 매진하여 치클론이라는 살충제를 만들어냈으나 히틀러가 집권 한 직후 1934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폴란드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여기서 나는 하버의 기구한 생애를 생각하며 책장을 덮고 잠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비료와 살충제는 농산물의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켜 엄청난 인구를 먹여 살려 오늘날의 음식의 제국을 만들어냈으나 그와 함께 폭탄과 독가스라는 부산물을 낳았다. 그리고 비료와 농약 등 농업화학물은 하천을 오염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하천 오염의 70%가 농업화학물 때문이고, 지표수 오염의 37%가 경작지의 비료 때문이라고 한다.

  인도적 이유에서 남편의 독가스 개발을 말리다가 부인이 자살했을 때 하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과학자는 실험실에서 연구에만 몰두하면 되지 연구 결과에는 아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전쟁을 빨리 끝내 무고한 희생자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원폭 개발에 참여했으나 후에는 수폭 개발에 반대하여 맥카시 선풍 속에 빨갱이로 몰린 오펜하이머와 그의 재판과정을 연극으로 재현한 키프하르트의 기록극 「로버트 오펜하이머 사건」, 과학자의 책임과 양심을 주제로 다룬 브레히트의 드라마「갈릴레이의 생애」와 뒤렌마트의 드라마 「물리학자들」…. 착잡한 연상의 고리는 쉽게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다.

  “식품을 생산하고 소비하고 구입하고 먹는 것은 정치적 행위”--‘생물지역주의’의 실천 방안들

  “이제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식생활을 환경적 명령에 다라 바꿀 것이냐, 경제적 명령에 따라 바꿀 것이냐. 어느 쪽이 되었든 인류의 식습관은 변화해야만 한다. 식품 체계, 광대하고 얽히고설킨 세계 식품 제국은 연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버-보슈법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가스에 의존한다. 가스를 채운 풍선에 이끌려 하늘을 떠다니는 만화 속 사람을 상상해 보자. 그는 추락하지 않도록 풍선의 끈을 꽉 붙잡고 있어야 한다. 불안정한 시장과 정부 보조금과 배고픈 저개발국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언젠가 다시 땅으로 내려와야만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232쪽)

  그렇다면 안정적인 식량 자급과 지속가능한 식품 제국이 존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대규모의 단일 작물 재배 농장보다는 작고 다양한 소규모 농장 중심으로 농사 방식을 바꾸고, 식품의 생산자와 공급자가 멀리 떨어지지 않게 지역 농산물을 사먹는 ‘생물지역주의’가 필요하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공동체 지원 농업, 직거래 장터, 가족 텃밭이 작지만 실천가능한 대안들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식품을 생산하고 소비하고 구입하고 먹는 것은 정치적 행위”(402쪽)임을 인식하고 슬로 푸드나 유기농 식품, 공정무역을 위해 도시의 소비자가 기꺼이 약간의 돈을 더 내는 일이다. 그리고 친환경 지역농산물을 학교급식에 사용하도록 하는 등의 법제화를 추진하는 일이다.

  먹는 즐거움과 행복한 밥상의 회복을 위해

  『음식의 제국』은 흥미진진하고 진지한 책이다. 읽다보면 미처 몰랐던 사실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곧 머리가 묵직해지고 눈이 침침해진다. 암울한 전망과 미약한 대안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새로운 인식과 통찰을 주지만 식욕은 떨어뜨린다.

  식욕을 잃은 독자들을 위해 『나를 위한 제철 밥상』(이영미 글, 김권진 사진, 판미동)을 권한다. 연극과 대중문화 평론가인 이영미가 지은 이 책은 식량위기에 대한 우려나 미식에 대한 죄책감 없이 먹는 즐거움을 온전하게 되돌려줄 것이다. 여기 실린 글은 ‘맛집 기행’이나 요리법 강의가 아니라 “내가 해 먹고 사는 음식에 대한 소박한 체험을 적은 수필에 가깝다.”(8쪽) 동네 시장이나 수퍼마켓에서 제철 식재료를 사서 자기가 해먹고 싶은 음식을 즐겁게 만들어 식구들과 즐겁게 먹는 이야기이다.

  저자가 제철 음식을 고집하는 이유를 들어보자. “계절의 흐름을 만끽하면서 음식을 맛보는 것, 그리 값비싼 재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연이 내려준 제철의 맛을 지니고 있는 것, 그래서 기장 간단한 조리법만으로도 감동적인 맛을 낼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제철 음식이기 때문이다.”(10쪽)

  “내가 이렇게 제철 식재료에 집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제철의 재료가 가장 값싸고 가장 맛있고 가장 건강하고 가장 올바르기 때문이다. 제철을 거스르며 채소를 길러 내려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기 위해 석유나 전기 같은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며, 생물체인 재료들의 건강 상태가 좋을 리 없으니 농약을 많이 쓰기 쉽다. 당연히 가격도 비싸지는데 정작 맛은 싱겁고 향도 떨어진다. 철이 아닌 때에 귀물을 먹어본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매력도 이득도 없는 셈이다. 이러니 제철 재료를 고집하지 않을 수 없다.”(12쪽)

  자, 이제 봄철 별미인 바지락 맛을 볼 차례다. “조개를 껍질째 잘 씻어 건진 후, 팔팔 끓는 물에 쏟아 부어 살짝 익혀 먹는 것이다. 조갯살 맛으로 먹으려면 물이 끓을 때 조개를 넣고, 국물을 내어 먹으려면 찬물에 넣어 끓이는 것이 좋다. (…)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치듯 한 번 파르르 끓여 입을 짝짝 벌린 조개를 그대로 상에 올리는 방식이, 가장 맛있는 조갯살을 먹는 비법이다. 당연히 물은 적게 잡는 것이 좋다.”(71쪽) 이 정도면 남자들도 멀리 벌교까지 갈 필요 없이 가까운 시장에 들러 바지락 1〜2킬로그램쯤 사다가 편하고 담백하게 제철 별미를 맛볼 수 있지 않겠는가.

  봄이면 생각나는 또 다른 별미, 주꾸미는 어떻게 먹을까? “주꾸미 역시 단순하게 먹는 게 좋다. 동그란 머리에 칼을 대지 않고 그냥 뒤집어 고동색 내장만 빼내는 방식으로 다듬어 씻는다. 머리 안에 든 하얀 것은 맛있는 주꾸미 알이니, 내장인 줄 알고 버리면 안 된다. 주꾸미 애호가들은 이 ‘밥알’을 한 숟가락 먹어 줘야 봄이 봄답다고 너스레를 떤다. 주꾸미를 씻을 때 밀가루를 한 숟가락 섞어 주물럭거리며 빨면 다리의 빨판도 깨끗해지고 미끈거리던 것도 좀 사라진다. 이렇게 다듬은 주꾸미를 팔팔 끓인 물에 살짝 데친 후 초고초장을 찍어 먹으면 쫄깃하고 신선한 맛이 그만이다.”(73〜74쪽) 그래, 먹는 즐거움은 결코 죄가 아니다.

▶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글쓴이 / 정지창
· 영남대학교 독문과 교수
· 연극평론가
· 민예총 이사장
· 저서 : <서사극 마당극 민족극> 등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