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숱한 젊은이들 가운데 내 딸이 끼어있지 않다는 사실- 그것이 수 십 년의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내 딸의 학교가 홀로 보여주었던 교풍이었던 말인가. … 내가 네게 바라는 것은 ‘비굴한 행복’보다 ‘당당한 불행’을 사랑할 줄 아는 여성이 되어지이다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서울의 거리가 온통 너와 같은 젊은 세대의 불길로 거세게 타오를 때, 옥아!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그 피의 폭풍이 강산을 휩쓸고 마침내 낡고 썩은 것들이 너희들 젊음 앞에 굴복하고만 그 시각에 나의 피를 받은 너는 대체 어디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더냐? 그 불덩어리들 속에 타오르는 심장의 핏빛이 네 피와는 다르더란 말이냐? 그 암흑을 밀어나가는 북소리들이 네 목소리와는 다르더란 말이냐? 너는 정녕 그 젊은 기수들 속에 네 생명을 바쳐 사랑하는 애인 한 사람 없었더란 말이냐? 서글픈 일이다. 분한 일이다. 너는 네 젊음을 스스로 모독한 시대의 고아가 되고 말았구나! 어찌 네 가슴에 뺏지를 달고 이 태양 아래 활보할 수 있으랴! 총탄에 넘어진 아들딸을 가진 부모들의 비통함보다 털끝 하나 옷자락 하나 찢기지 않은 너를 딸로 가진 이 애비의 괴로움이 더 깊고 크구나. 인옥아! 어서 뺏지를 떼고 교문을 나와 병원으로 달려가거라. 죄인과 같은 부끄러움과 겸손한 태도로 아직도 병상에서 신음하는 그 젊은 영웅들 앞에 네 피를 아낌없이 쏟아라. 그 젊은이들이 너 같은 여자의 피라도 받아준다면. …” 이 글은 1960년 4·19혁명 직후, 목포에 사는 학부형이 서울에서 여대에 다니던 자신의 딸에게 쓴 편지의 한 부분이다. 그 해 4월 말, 일간지에 게재된 이 편지글은 4·19와 관련해서 쓰여진 어떠한 글보다도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우리는 지금 53년 전, 4·19혁명의 그 기간을 지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그 해 4월 18일에서 26일까지의 기간만큼 숨가쁘고 감격적인 시간은 없을 것이다. 4월 18일의 고려대 시위로부터 4·19와 4·25 교수단시위, 4·26 이승만 하야 성명으로 이어진 1주일은 한국사에서는 물론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장엄한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혁명권을 담보로 존립한다 우리 세대는 4·19와의 인연이 각별하다. 나 개인적으로도 4·19와는 사연이 많다. 4·19혁명이 일어나던 그 해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3·15부정선거의 조짐이 짙어지던 2월 28일, 대구에서 경북고등학교 시위가 일어난 뒤를 이어 3월 8일, 마침내 우리 학교에서도 우리 학년의 주도하에 시위하기에 이르렀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우리는 이심전심으로 떨쳐 일어나 거리에 나섰는데, 구호를 외치면서 나도 모르게 내 손은 불끈 쥐어지고, 목에서는 무언가 치밀어 올라 목이 메이고, 눈에서는 눈물이 나고, 입에서는 말이 울음이 되었다. 슬픔과 환희 같은 것이 한꺼번에 범벅이 되어 벅차올라 오던 그때의 감정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조지훈의 시구처럼 “그것은 천리였다/그저 터졌을 뿐/터지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인 순수한 정의의 감정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아마도 맹자가 말하는 인간 본성으로서의 수오지심(羞惡之心)이 필경은 이런 것일 거라고 나는 믿는다. 올해 우리는 우리가 다니던 학교 교정에 ‘3·8 민주의거비’를 우리 손으로 다시 세웠다. 1960년 3월 8일 순정한 정의의 함성이 침묵하던 시대와 강산을 흔들어 깨워 마침내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했으니 그 의기 높고도 장했다 여기를 거쳐 가는 대능의 젊은이여 불의를 보고 분노할 줄 아는 그날의 용기를 되새겨 항상 깨어있어라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원하지 않는 정부를 폐지할 수 있는 국민의 혁명권을 담보로 하여 존립한다. 4·19는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국민이 혁명권을 발동하여 국민이 원하지 아니하는 정치권력을 폐지시킨 장엄한 국민혁명이었다. 4·19혁명은 헌법전문의 지향과 그 제1조가 ‘민주공화국’인 한 우리가 반드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정신적 고향이자 시원(始源)이요, 이루어내야 할 이상이자 목표이며, 민족의 정기이자 생명이다. 4·19를 짓밟고 그 정신을 유린하고 유폐시킨 5·16군사쿠데타 이후 30여 년에 걸친 군사독재 기간 내내, 해마다 4월은 잔인한 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4·19 제 몇 선언이 해마다 나오고 백기완은 4·19영령이 있다면 돌아와 탑을 부수라고 외치기도 했다. 새 정부 인사청문회에서 그런 5·16에 대해 답변을 회피하는, 역사의식도, 영혼도 없는 구차한 장관들을 보면서, 4·19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서글픈 심사를 금할 수 없었다. “4월의 하늘은 이토록 청명한데, 우리를 둘러싼 대기는 어이 이처럼 암울한가(1963년 4월 19일, 서울대 4· 19 제4선언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