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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의 펜화로 보는 한국47
세월도 걸음을 멈춘 곳 - 한개마을 한주정사
답사여행을 하다보면 모처럼 기대를 하였다가 실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은 번지르르 한데 내용이 빈약하여 분칠한 작부의 얼굴 같은 곳, 주민들이 떠나 '죽은 마을'에 장사꾼만 남은 곳, 한적해야 될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장터같이 된 곳, 주변에 양옥이나 빌딩이 들어서 옛 풍치가 사라진 곳 등 이지요.
그러나 간혹 큰 기대 없이 찾아 갔다가 숨은 보석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으니, 성주군 한개마을이 바로 그런 곳 입니다. 한개마을은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 9채를 포함하여 7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형적인 양반촌입니다. 취재도중 산에서 내려온 고라니까지 맞닥뜨릴 만큼 한적한 마을로, 군내버스가 하루에 두 번밖에 운행을 하지 않습니다.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고, 구멍가게하나 찾기 힘듭니다. 좁고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걷노라면 도포 입은 선비와 마주칠 것 같이 세월의 감각이 흐려집니다.
한개마을은 성산이씨 집성촌으로 조선후기 그 위세가 당당하였던 선비촌입니다. 예와 의를 존중하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학문을 중시하고 처신을 신중히 하여 성산이씨라는 관향보다 ‘한개양반’으로 더 잘 알려져 왔습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자 세손을 업고 어전에 나아가 세자를 구하려다가 파직되어 낙향한 북비(北扉) 이석문의 고택에는 북쪽으로 문을 내고 사도세자를 추모한 별채가 있습니다. 영조가 지난 일을 후회하며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답니다. 북비고택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ㄱ'자 형태의 사랑채가 나옵니다. 사랑채 우측의 안행랑채를 돌아 안채 마당으로 들어가면 사당과 안채가 보입니다. 사당 옆 담에는 사랑채로 통하는 샛문이 있습니다. 보기 드문 아름다운 문입니다. 안채 우측의 장독대도 참 예쁩니다. 낮은 담장을 쌓고 기와를 얹은 ’ㅁ'자 형태의 장독대를 보면 정갈한 음식을 만들던 종부를 보는 듯합니다.
근세 유학의 3대가로 손꼽히는 한주 이진상의 한주정사(寒洲精舍)는 한개마을 답사에 클라이맥스입니다. 정사는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우측 침방 앞에 누마루 1칸을 내달아 전체적으로 T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경사가 진 곳에 기단을 2단으로 높직하게 지은 정사에 잘생긴 소나무가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 되었습니다. 누마루 난간은 가늘어 섬약해 보이지만 사슴의 뒷다리처럼 날씬합니다. 누아래 기둥에 까치발을 세워 계자 난간을 받치게 하였습니다. 넓은 처마를 받쳐주는 활주에 돌을 다듬어 만든 장주석만 보아도 꽤나 공을 들여 지은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속일 수 없어서 기둥에 붙인 주련에 글이 모두 지워져 한자도 보이질 않습니다. 조상이 빛을 보려면 자손이 잘 되어야 합니다. 정자 오른쪽으로 원시림처럼 숲이 무성한 속에 수초가 무성한 직사각형 연못 2개가 있습니다. 쌍지라고 부르는데 계곡의 물이 자연스레 흐르던 연못 이었으나 마을의 상수도 공사 후 물줄기가 끊겨 그리되었답니다. 정자 앞 축대 아래 건물들이 퇴락하였고, 잡초가 무성하여 어수선 합니다만 잘 가꾸어 놓으면 명승지로 손꼽힐 것입니다.
한주정사 마루에 달린 조운헌도제(祖雲憲陶齊)란 편액은 주자와 퇴계의 학문을 사숙하는 곳이란 뜻입니다. 한주선생은 퇴계의 주리론을 발전시켜 심즉이설(心卽理設)을 세웁니다.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여 문인록에 올린 제자만 137인으로 이들을 한주학파라 부릅니다. 한주의 아들 대계(大溪) 이승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5적신의 참형과 조약 파기 상소를 올려 옥살이를 한 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이상설과 독립운동을 펼칩니다. 한주 종택에는 대계의 손자인 97세 이해석옹이 부인과 함께 종가를 지키고 있습니다. 어느 고택이든 답사 때 어른을 만나면 꼭 허리 숙여 인사를 드리고 “집안을 둘러보아도 되겠습니까?” 하고 양해를 구하세요. 입장을 바꾸어 시도 때도 없이 구경꾼이 몰려드는 것을 좋다고 하는 분이 있겠습니까. 종택 대문에 하인들이 출입하였다는 작은 쪽문이 있으니 찾아보세요.
한주종택을 나서 30여보를 내려오면 오른쪽에 하회댁(河回宅)의 잔디 마당이 보입니다. 본래 한옥의 마당은 백토를 깔아야 제멋이 난다고 합니다만 서양식으로 잔디를 깐 마당도 보기 좋습니다. 문화재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는 사람 생각도 해주어야지요. 겉모양은 한옥이지만 수세식 화장실과 욕실을 갖추고 입식 부엌에 보일러 온돌을 갖춘 한옥에서 살면 한옥의 멋과 실용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하회댁은 목재의 표면을 깎아내고 칠을 하여 고색은 사라졌지만 깔끔한 손길이 느껴지는 살림집입니다. 흙과 돌로 두껍게 지어 단열 기능을 갖춘 고방채도 볼만하고, 사랑채가 아닌 안채에 난간을 두른 쪽마루가 달린 것도 특이 합니다. 종부의 권한이 남달랐겠지요. 그래서 집 이름에 부인의 고향이름이 붙었나봅니다.
하회댁 바로 아래가 교리댁(校理宅)입니다. 조선 영조 36년(1760)에 이석구가 지은 집으로 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귀상이 1870년에 고쳐지었답니다. 정면 7칸 측면 1칸 반의 큰 안채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사랑채, 대문채, 중문채, 서재, 사당 등이 넓은 터에 늘어서 있는 한개마을에서 제일 큰 집입니다. 안채 뒤의 후원에는 가꾸는 이가 없어 잡목과 잡초가 무성한 연못이 숨어 있습니다.
극와(極窩)고택은 한주 정사 바로 아랫집으로 조선 철종 3년(1852)에 극와 이주희가 지은 집입니다. 이주희는 한일합방이 되자 흰옷과 흰 종이갓을 쓰고 거실에 거적을 깔고 집밖으로 외출조차 하지 않았던 애국지사였습니다. ‘ㅁ’자형의 배치를 이루었던 광이 없어지고 사랑채와 정침만 남았습니다.
이외에도 월곡댁, 도동댁, 진사댁 등이 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이며 첨경재. 서륜재, 월봉정, 여동서당, 일관정 등이 있어 이곳저곳 보물찾기하듯 찾아보는 재미가 있어 답사가 즐겁습니다.
그림.글.사진=김영택 펜화가 honginart@hanmail.net
* 한개마을은 성주에서 5km 쯤 떨어진 마을로 대구에서 가깝습니다. 김천IC에서 성주로 내려가면 가깝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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