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 문근영
겹겹 근심 쌈 싸먹어 보겠다고
주말이면 가꾸던 남편의 배추밭에
보따리 하나 짊어지고 야반도주로 이주해 온
달팽이 한 마리 살고 있다
한여름을 거뜬히 등에 지고
우박의 상처로 듬성듬성한 배추 겉잎에 붙어
자신이 우주 한 모퉁이를 떼어냈다고
종이박스 든 노숙인처럼 우긴다
이때 걸어가는 달팽이의 걸음걸이는
느릿느릿 거드름이다
배추밭 위로 늘어지게 하품도 한다
엎드려 오수에 들다 이를 지켜본 은사시나무는
나풀나풀한 저 배춧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 했으나
구름이 건 발목에 그만 더듬이를 다친 달팽이에게
그늘 등목을 권유한다
온몸으로 건너온 느릿한 생이
끈끈한 자국을 남기고만 한여름의 꿈
나의 그늘 속에 불러들인 당신은
속도가 느려, 쌈 위에서 발각되고
땡볕에서 나무의 주름살은 깊어간다
출처 : 대구문학신문 - 시야 시야
글쓴이 : 문근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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