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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문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성북구 돈암동으로 넘어가는 큰길 옆 언덕에
새로 지은 혜화문(惠化門)이 있습니다.
본래는 큰길 복판 5~6m쯤 높은 곳에 있어 되너미고개까지 한눈에 보였답니다.
되너미고개란 병자호란에 되놈들이 쳐들어 왔다가 되돌아갔다고 지은 이름인데
미아리 고개로 이름을 바꾸었는데도 6.25동란에 중공군이 넘나들었으니
헛수고 였나봅니다.
혜화문 밖에 펼쳐진 넓은 분지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무성하고 복숭아나무가 많아 해마다 봄철이면
놀이 나온 사람들로 골짜기가 메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화동(桃花洞)이라 하였다는데 현재의 모습을 보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처럼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분지에 성북천이 흐르고 그 주변에 동활인서(東活人署), 선잠단(先蠶壇)이 있었습니다.
구한말에는 군대 훈련장인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답니다.
혜화문 밖에 먹절(墨寺)이 있어 묵사골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어영청 창고인 북창이 있어 북둔(北屯)이라고도 했습니다.
혜화문은 태조 5년(1396)에 지어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으나
성종 14년(1483)에 지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혼동이 되어
중종 6년(1511)에 혜화문으로 고쳤습니다.
서울의 북문인 숙정문(肅靖門)을 폐쇄하고 동소문인 혜화문을
북문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원래 사잇문인 소문은 문을 지키는 출직호군(出直護軍)이 20명이고
대문은 30명인데 동소문인 혜화문은 30명으로 대문의 대우를 받은 셈입니다.
임진왜란에 문루가 불에 탄 후 152년 뒤인 영조 20년(1744)에 문루를 다시 만듭니다.
혜화문의 홍예 틀 내부 천장에 다른 문처럼 용을 그리지 않고 봉황을 그린 것은 도화동 일대에 새들이 많아 그 피해가 컸기 때문에 새들의 왕인 봉황을 이용하여 막아보려는 의도였답니다. 참 재미있는 발상입니다만 과연 효과가 있었을까요?
1928년 일제가 낡은 문루를 헐어버리고 1939년에는 전찻길을 낸다며 석축과 홍예마저 허물어 버립니다. 1994년 자리를 옮겨 복원하였으나 성문 앞에 전봇대들이 시야를 가려 보기 흉합니다. 전선을 땅속으로 묻으면 어떨까요.
성문 밖 내리막길에 대금의 일인자인 이생강선생님의 연구소가 있습니다..
취재를 간 김에 가을에 가질 예정인 ‘펜사모’ 행사에 공연을 부탁했더니
흔쾌히 허락을 하셨습니다.
펜사모 행사 장소는 대원군 별장 ‘석파정’ 숲 속입니다.
서울 중심에 만여 평이 넘는 숲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선남선녀 7~80명이 울창한 숲 속에 모여 이생강님의 대금을 듣는 장면은
생각만 하여도 기분이 좋습니다.
음식은 한국 최고의 채식 뷔폐팀에서 맡을 것입니다.
‘펜사모’가 무었이냐고요?
펜화를 사랑하는 분들의 모임입니다.
회장은 ‘스파크 인터내셔날’의 박신환 사장입니다.
해난사고 전문 로펌의 대표인데 펜화에 미쳤다는 분입니다.
벌써 가을이 기다려 집니다.
중앙일보 5월 11일자 칼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