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김영택의 펜화기행 9 - 화순 쌍봉사

문근영 2013. 3. 15. 00:34

제목: 김영택의 펜화기행 9 - 화순 쌍봉사
분류: 칼럼
이름: 8.김영택





1910년대의 쌍봉사 전경
삼층목탑은 대웅전으로 역할이 바뀌면서 사모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봅니다.



요즈음의 쌍봉사 대웅전(삼층탑)
본래 삼층탑 뒤에 대웅전이 있었을 터인데 조선조 말기
허물어 진 후 가난해서 다시 복원하기 어려운 시기에 대웅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좁은 대웅전일 것입니다.
스님은 옛 대웅전 사진을 찾아 달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초석은 있는데 사진과 같은 결정적 증거가 없어서
다시 짓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이 남아있는 호성전은 몇년 전에 나라에서 복원해 주었습니다.)
그림의 원본 사진이 1910년대에 찍어 '조선고적도보' 에 실린 사진이라
그 이전에 찍은 사진은 없을 것입니다.



쌍봉사 전경
저는 멀리서 목탑만 보아도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전생 인연이 깊은 모양입니다.



대웅전 화재 때 농부가 구해낸 석가모니 부처와 협시불인 가섭존자(오른쪽)과 아난존자


가섭존자의 '염화미소'가 죽여주지요?
깨달은 사람 만이 깨달은 사람의 질문에 답 할 수 있답니다.
그래서 가섭존자 만이 부처의 '무언의 질문'에 무언으로 답 할 수 있었지요.
부처님이 꽃 한송이를 들자 가섭존자만이 웃음으로 대답을 했답니다.
표정을 보세요.
존경하는 스승을 우러러보며 웃는 모습을!
대웅전 가섭존자의 미소에 대한 주지스님의 자랑이 대단합니다.
국내 어떤 제자상에도 이처럼 아름다운 미소는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보지 못했습니다.
가섭존자는 수행이 최고인 제자였습니다.
이마에 볼록 튀어나온 눈은 '깨달은 수행자' 만이 갖고 있는 '지혜의 눈'입니다.
하늘과 소통하는 곳입니다.
부처의 이마에 수정 등으로 백호를 만드는것과 같습니다.
물론 실제 보이는것은 아닙니다.
아난존자는 기억력이 엄청 좋아서
부처님 열반 후 부처님의 말씀을 모두 기억해 내어서 불경을 만들게 합니다.
그래서 불경 첫머리를 보면
"나는 이와같이 들었노라..."로 시작이 됩니다.



절 왼쪽 언덕에 있는 철감국사 부도.
이것 하나만 보아도 쌍봉사 답사는 본전을 뽑고도 남습니다.
천천히 구석 구석 보세요. 보는만큼 보입니다.
그림을 그리느라 저 부도 앞에서 일주일을 보내는데
어느 순간부터 1000년의 넘어 석공과의 대화가 이루어 지더군요.
그 때 깨달았습니다.
우리 석조물의 아름다움이 서양과 다른점을.

신라와 고려 때에는 큰 스님의 부도만 국가에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많지 않지만 무두 크고 화려합니다.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억불승유'정책으로 나라에서 만들지 않는 대신에
절에서 너도나도 만들어 작고 엉성해 지지요.
사실 윤회를 기본으로 하는 스님에게 죽음은 잠시 외출일 뿐이라 중요치 않은 것입니다.
부도는 보통'대석', '몸돌', '지붕돌'로 구분 됩니다.
각 부분을 꼼꼼히 보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대석은 다시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나뉘는데
하대석에 구름을 조각한것은 스님의 부도가 하늘 나라에 있음을 뜻합니다.
몸돌과 지붕돌은 신리시대 목조건물 양식을 본딴것이어서
배흘림기둥과 같은 특색이 명확하게 보입니다.
8각인 몸돌 앞뒤에는 대문을 걸어 잠근 잠을쇄가 있는 문비와
네면에 사천왕이 스님의 집을 지키고 두면은 비천상이 있지요.
지붕돌의 막새기와를 잘 보세요. 손톱만큼 적은데 연잎 여덟개가 보임니다.
대단한 공력과 정성이지요.
철감이란 시호는 도윤스님이 돌아가신 후 받은 시호입니다.
바쁘셔도 1시간 이상 구석 구석 보세요.
물론 미리 공부하고 가거나 설명서를 지참하면 더욱 좋지요



철감선사 부도비
비석은 온데간데 없고 귀부(거북모양 받침돌)와 이수(지붕돌)만 남았습니다.
이수 위에 삐죽하게 나온것은 '보주'라 하는데
불꽃 덩어리를 형상화 한 것으로 본래 3개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는 달아났습니다.
오른 발을 보시면 한발 앞으로 나가려는 모양입니다.
참 힘 좋은 거북입니다.
이수 가운데 글이 있어 철감국사 부도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글이 없으면 '연곡사 동부도' 처럼 '쌍봉사 서부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불교 소설가로 유명한 정찬주씨와 주지 영제스님.
영제스님은 펜화를 무척 좋아하여서 본인 스스로 '김영택의 펜'이라고 하십니다.
주지실에 제 그림 두점이 걸려 있더군요.
정찬주씨는 '암자기행'등 좋은 소설로 많은 독자를 갖고 있습니다.
젊어서 쌍봉사에 숨어서 글을 써 문단에 데뷔했고
지금은 쌍봉사 건너편에 집을 짓고 작품활동을 하고있습니다.
10여년 전 쌍봉사 취재때 만나 십년지기가 되었습니다.
전임 주지 관해스님은 시골 아저씨 같은 얼굴에 친절한 분인데 능력이 있어
절을 크게 일으킵니다.
이런 스님을 '중창조'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작년에 "너무 오래 사판승(주지 등의 일을 맡은 스님)을 했다"며
송광사 방장스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리산 법계사로 들어가 수행 정진하고 계십니다.
법계사로 가실때 화물차 짐칸을 얻어 타고 가셨답니다.
아시다 싶이 법계사는 찻길도 없어 2시간을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찾는 이들이 적으니 수행에 전념하기 좋을겝니다.
참 훌륭한 스님입니다.
얼굴이나 말씀이 시골 아저씨 그대로 입니다.
혹시 법계사를 방문하시면 펜화가의 친구라 말씀 드리면 대접 좀 받을 겝니다.



정찬주씨의 이불재(耳佛齋)
10여년전 처음 찾았을 때에는 건물 하나(오른쪽 건물) 달라당 있었는데
이제는 건물 3채에 담장도 치고 백수련을 심은 연못도 있습니다.



백수련을 주겠다고 연못에서 작업을 하는 정선생과 부인.
두 뿌리를 얻어다 인천집 마당에 심었습니다. 잘 자라면 여름이 지나 분양을 할 예정입니다.


 

                쌍봉사 대웅전


   세계 최고의 목조건축 기술을 지닌 우리 조상들은

요즈음 건물 20층 높이와 같은 황룡사 9층 대탑을 비롯한 여러 목탑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많은 전란으로 모두 불타버리고

임진왜란 후 중건한 법주사 팔상전(八相殿)과 화순 쌍봉사(雙峰寺) 삼층목탑만 남았습니다.

   5층탑인 팔상전은 지붕의 넓이가 위로 올라가면서 급하게 줄어들어

경주 남산 바위에 새겨진 마애탑이나 우리 선조들이 일본에 세운 목탑과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

이에 비해 쌍봉사 3층탑은 지붕의 넓이가 수직적으로

우리 탑다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쌍봉사는 신라 경문왕 때 도윤(798~886)스님이 창건한 큰 절입니다.

임진왜란에 소실된 후 인조 6년(1628)에 중건 했습니다.

목탑은 1690년에 중건하고 1724년에 큰 수리를 하여 대웅전으로 이용하던 중

1984년 화재로 전소됩니다.

이때 동네 농부가 불길 속에서 불상 3구를 구해낸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장정 4명이 간신히 들 수 있다는 석가모니불을

아들과 둘이서 업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그 덕에 협시불인 가섭존자의 아름다운 미소를 볼 수 있습니다.

‘염화미소’라 하는데
부처님이 제자들 앞에서 꽃 한 송이를 들자
다른 제자들은 아무도 그 뜻을 못 알아차렸는데 가섭존자 만이 빙그레 웃어 답하였다는 뜻입니다.

수제자인 가섭존자의 높은 수행정도를 부처님도 크게 인정을 하여

남루한 옷에 냄새가 고약한데도 의자에 함께 앉도록 하였답니다.

  

   부처님을 구한 농부는 돌아가시고 그 아들(47세)은 살아있는데도

농부의 꿈속에 부처가 나타나 “절에 불이 났으니 빨리 가라”고 했다는 것은

주지스님 주장이고,

소설가 정찬주씨는 “대웅전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뛰어왔지, 꿈은 무슨 꿈이냐”고

다른 말을 합니다.

쌍봉사가 좋아 오래 전부터 절 앞에 사는 정찬주씨의 주장이 맞을 것 같습니다.

주지스님이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다행히 1962년 해체 수리 때 만든 실측도가 있어 1986년 다시 지을 수 있었습니다.

해체 때 발견한 대로 3층 지붕을 팔작지붕에서 사모지붕으로 바꾸고

상륜부를 올려 탑다워 졌습니다.

그러나 보물 지정은 해제가 ?습니다.

   
   그림은 1910년대의 사진을 바탕으로 그렸습니다.

가난하고 힘들던 때의 모습입니다.

절 마당이 온통 밭이고 논입니다.

잡초가 우거진 마당 구석에 요사채로 지은 초가건물도 보입니다.

  

   도윤스님은 중국에서 큰스님으로 인정받은 스님으로

귀국하여 쌍봉사를 창건하고 높은 능력을 인정받아 국사(國師)가 됩니다.

당시 쌍봉사는 구산선문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컸습니다.

그러나 조선조 후기로 들어서면서 사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보존하기 어려워진 목조불상들을 장성 백양사로 보냅니다.

전임 주지인 관해스님이 부임하여 절을 크게 되 살려 놓았습니다.

그 덕에 송광사 말사 중  쌍봉사 주지 자리가 높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새 주지인 영제스님은 송광사 재무스님을 겸하고 있습니다.

재무스님은 큰 절의 돈 관리를 맡은 스님으로 보통 주지의 오른팔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쌍봉사에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철감(澈鑑-도윤)스님의

부도(浮屠-고승의 사리를 넣은 돌탑)가 있습니다.

구례 연곡사 동부도와 쌍벽이라 하지만 철감선사 부도를 더 쳐주는 분들이 많습니다.
국보 제57호로 보물 제 170호인 철감선사 부도비가 함께 있습니다.
앞발을 들고 힘차게 걸어 나가려는 듯한 거북이의 모습이 참 좋습니다.


   쌍봉사는 펜화가가 사랑하는 절입니다.

화순 운주사와 묶어서 답사를 하셔도 좋습니다.



출처 : 청정남
글쓴이 : 청정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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