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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갑곶나루와 진해루
강화도는 한강 입구에서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중요 요충지입니다. 내륙과 섬 사이를 흐르는 염하강(鹽河江)의 물살이 거세어 천혜의 요새라 할 만합니다. 고려 고종 18년(1231) 몽고가 쳐들어오자 수도를 강화로 옮긴 것도 그 때문입니다. 고려는 이곳에서 원종 11년(1270)까지 39년간 항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도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을 했습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에는 강화도로의 피난길이 막혀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하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합니다.
이후 효종과 숙종은 강화도 해안에 5개의 진(鎭)과 7개의 보(堡), 8개의 포대(?臺), 53개의 돈대(墩臺), 8개의 봉수(烽燧)를 쌓아 방위에 만전을 기합니다. 그러나 성능이 우수한 군함과 총포를 앞세운 서구와 일본의 침략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고종 3년(1866) 프랑스군이 갑곶나루에 상륙하여 진해루(鎭海樓) 부근의 고지를 점령하고 강화도를 유린합니다. 고종 8년(1871)에도 미국의 전함이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포로 공격하여 초토화 한 후 병력을 상륙시켜 조선군에 큰 피해를 줍니다. 또한 고종 12년(1875)에는 일본군이 침략하여 살인과 방화, 약탈을 합니다. 그러고도 억지를 부려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뒤늦게 신식해군의 필요성을 절감한 조선은 고종 30년(1893) 강화도 진해루 안쪽에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이란 이름의 해군사관학교를 세웁니다. 영국군사교관 콜웰(Callwell)대위와 영어교사 허치슨(W.du.F.Huchion)을 초빙하여 50명의 사관생도와 500여명의 수병을 양성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집요한 방해로 신식해군의 꿈은 2년도 못 넘기고 물거품이 됩니다. 이때 영국 교관의 부인이 본국에서 갖고 와서 심은 순무가 강화의 특산물이 되었답니다.
강화도의 관문으로 영욕의 역사를 겪었던 진해루는 강화대교가 놓이고, 도로가 나면서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해안가에 세웠던 외성도 자취가 없습니다. 옛 사진 에 남은 허물어진 성문과 성벽, 갑곶나루의 주막집을 펜화로 되살려 보았습니다. 진해루 자리 좌측 언덕에 복원된 갑곶돈대 앞을 흐르는 염하강은 약소국의 설음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후기 *고종이 세운 해군사관학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으로서 이번 취재 때 발굴이 되었다. 물론 조사하고 글을 쓴 분은 따로 있다. 군사훈련 사진도 있는데 영국 교관과 생도들의 훈련모습이 정연하여 잘 훈련된 모습이었다. 고종은 군함을 사려고 처음에는 개화승 이동인을 시켰으나 살해 되었고, 世昌洋行에 의뢰도 하고 직접 영국의 영사에게 여러차레 간곡하게 부탁을 하였으나 일본과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응하지 않았다. 결국 중국의 우편선을 사라는 웃기는 결론이 난다. 이런 사실을 보면 고종이 결코 나약한 군주가 아니라고 보여진다. 옛 그림은 강화도령(철종)을 모시러 강화로 들어간 행차도의 일부로 진해루와 좌측의 갑곶 돈대가 보인다. 맨 아래 갑곶돈대의 모습은 구한말 사진과 다소 차이가 있다. 복원이 잘못 된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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