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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
서대문이라 부르던 돈의문(敦義門)이 있던 곳이 어디일까요? 서대문 사거리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조선 태조 5년(1396) 한양의 성곽 공사를 1월부터 시작하여 2월말에 1차 공사를 끝내고, 2차는 8월과 9월에 끝냅니다. 토성과 석성을 함께 이용했습니다. 이때 서쪽에 세운 돈의문은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태종 13년(1413) 경복궁의 지맥을 보전 한다는 이유로 돈의문을 폐쇄하고 남쪽에 새로 문을 세우고 서전문(西箭門)이라 합니다. 동대문처럼 옹성을 둘렀다고 합니다. 현재 경희궁 서쪽 기상청 주변으로 봅니다.
세종 4년(1422) 토성부분을 돌로 고쳐 쌓으면서 이용하기 불편한 자리에 있던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남쪽에 새문을 세우고 이름을 돈의문으로 되 바꿉니다. 현재의 위치로는 경향신문사와 강북삼성병원 사이의 사거리입니다.
이렇게 새로 세운 ‘새문’이라고 해서 서대문 안을 ‘새문안길’이라 하고 한자로는 ‘신문로(新門路)’라 합니다. 그러나 이 신문로라는 이름이 잘못 지어졌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태종이 왕권을 탈취하는 쿠데타에 큰 공을 세운 이숙번은 세도가 대단하여 임금이 불러도 병이 있다며 입궐을 거부할 정도였답니다. 이숙번의 호화주택이 서전문 가까이 있었는데 우마차의 왕래로 시끄럽다고 서전문을 닫게 하고 서소문으로 다니게 합니다. 이런 일로 ‘성문을 막은 집’이라 하여 색문가(塞門家)라 하였고 그 동네를 색문동이라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색문동이란 지명이 자주 등장합니다.
서전문을 불편한 곳에 세운것도 이숙번이 자기 집 앞에 길을 내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랍니다. 나중에 세종이 이를 알고 성문을 옮겼던 것입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 자리에 오른 인조가 태어난 곳이 ‘색문동궁’이었습니다. 광해군이 ‘색문동궁 주변에 왕기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인조의 아버지가 살던 집(이숙번이 살았던 호화주택)을 포함해 수천의 민가를 헐어 버리고 지은 것이 경희궁 등이었습니다만 이미 늦은 셈이었지요.
‘색문동’이 발음의 어려움으로 ‘새문동’으로 변했다고도 하고, 색(塞)자는 ‘새’로도 읽을 수 있어 ‘새문동’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새문동길’과 ‘새문로’로 고쳐야 하겠지요.
돈의문은 4대문이면서도 중층인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다르게 단층문루입니다. 남대문이나 동대문에 비하여 이용이 적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층입니다만 4소문에 비하면 훨씬 높고 규모가 큽니다.
숙종 37년(1711)에 중건되어 잘 유지되다가 1915년 전차궤도가 복선화 되면서 철거됩니다. 4대문 중 유일하게 복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복원을 하여 옛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중앙일보 3월 30일자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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