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스크랩] 서울도서관과 스케이팅 [조상호]

문근영 2013. 3. 14. 00:46

 
제640호
서울도서관과 스케이팅
조 상 호 (출판인)

새해는 항상 설렘과 함께 와야 한다. 그래서 미지의 순백 같은 가능성을 꿈꾸며 나름의 다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세월이 손에 잡힐 듯 헤아려지면서 새해의 찬란함도 그저 그런 일상이 될 무렵에 하늘이 3세를 선물로 안겨준다. 손자가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치사는 아부인 줄 알면서도 싫지 않은 손자바보가 된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3으로 시작하는 김강민이 그 녀석이다. 갑자기 할 일이 생긴 것처럼 마음이 바빠진다. 눈길을 마주치면 웃음도 띠울 줄 아는 돌도 되지 않은 손자에게 세상구경을 시켜주고 싶어 안달이 난다. 새 이가 나오면서 간지러운지 오물거려 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넣어 부지런히 빨기도 하는 손자를 안고 처음으로 서울시청 서울도서관을 찾아 나섰다. 서울광장을 건너기 전 무교동쪽 부산은행이 있는 빌딩 앞에 다소곳이 자리한 돌에 새긴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이라는 시비의 글귀가 섬광처럼 스쳤다. 20년 넘게 그 앞을 스쳐 지났지만 오늘에야 눈에 띈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는데 내가 이제 발견했을 뿐이다. 지훈상 운영위원으로 모셨던 김종길 원로시인의 ‘설날 아침’이었다.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설날 아침’처럼,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시청 광장에 다시 섰다. 손자가 자라 그들 세대가 꿈꾸는 광장은 또 어떤 모습일지 전혀 상상할 수는 없다. 유리로 뒤덮인 새 시청사는 위용을 뽐내지만 그 모습은 눈에 설다. 다행히 당초 설계에는 없는 장송과 느티나무 몇 십 그루가 심어져 삭막함을 감추게 한다. 이제는 유물처럼 자그마해진 일제 식민지통치의 잔재인 구청사를 전부 부수지 않고 시청 도서관으로 개조한 열정적인 독서가인 박원순 시장의 문화리더십이 고마웠다. 어쩌면 서울 르네상스 같은 현란한 선전문구로 도배되었을지도 모를 소중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지도자 한 사람을 잘 선택한 시민의 기쁨이 이런 것이다. 높은 책장의 벽엔 책이 가득하고 넓은 계단을 꽉 채우고 있는 창조적인 상상력의 공간에 부모의 손에 이끌려온 아이들이 책에 빨려 들어간 모습은 장관이다. 좀이 쑤시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녀석들도 있다. 처음 경험하는 도서관인데 조금 부산을 떨더라도 웃어넘기기로 했다. 바로 문을 열면 시청광장에서 스케이트를 지치고 있는 친구들보다야 훨씬 인내력 있게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한 세대가 지나면 이 사회를 이끌 꿈나무들이 그들 속에서 성장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새해 선물, ‘세상 가장 큰 책’

겨울산은 낙엽 떨어진 그 나무의 키만큼이나 다소곳이 낮아진다. 폭설로 쌓인 눈으로 다시 키가 커진다 해도 그 고즈넉한 나목들의 합창으로 포근하긴 마찬가지다. 겨울이 한겨울로 성숙하는 원시의 폭설 속에 나남수목원 산행에 초대된 외우(畏友) KBS 임병걸 시인이 <세상 가장 큰 책>이란 시를 선물했다. 과거완료형이 아닌 “푸른 쉼표”라는 시구의 새해 축복이 그지없이 고맙다. “세상을 향해 종이 위에 침묵의 말 건네던 사람 언제부턴가 더 큰 침묵의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그는 돌멩이로 모음을 쓰고 나뭇가지로 자음을 썼다 흐르는 계곡의 물과 능선을 넘어온 바람으로 줄거리를 만들었다/ 책은 나무가 산고 끝에 잉태한 아들 평생 책의 아들이었던 그는 연어가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듯 나무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세상의 유혹에 흔들릴 때 구상나무 심고 세상이 그리울 때 빠알간 복자기 심었다 세상이 답답할 때는 쭉쭉 뻗는 낙엽송 심었고 세상에 고함치고 싶을 때는 활활 타오르는 자작나무 심었다/ … 마침내 세상 가장 큰 책을 쓰고는 흙 묻은 등산화에 낡은 청바지 입은 그도 한 그루 느티나무 되어 책속의 쉼표로 찍혔다 겨울에도 푸른 쉼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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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상호

· (주)나남출판 대표이사
· 나남수목원 이사장
· 고려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 지훈상 상임운영위원
· 저서 : <언론 의병장의 꿈>
<한국언론과 출판저널리즘> 등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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